* 2017년 10월 13일 제10회 임화문학 심포지움에서의 발표문
================
리얼리즘론 이후와 보그다노프의 조직학
이 발표문은 완결된 형태의 글이 아니라 발표의 편의를 위해 작성된 문서입니다. 그리고 학문적 성취의 발표라기보다는 어떤 발견을 공유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다지 길지 않으리라고 예상되는 발표 시간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 가급적 많은 내용을 본문보다는 각주에 넣어서 그때그때 여유가 있으면 다루고 아니면 나중에 읽으실 수 있도록 하려했는데, 작성하다보니 본문 자체가 길어져서 본문을 다 읽지도 못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각주든 본문이든 발표 시에 다루지 못한 부분을 나중에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시간 때문에 중간중간 쥐파먹듯이 해야 하는 발표가 좀 어지럽더라도 양해해주십시오. [발표자]
1. 발견
발표자가 보그다노프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맥켄지 워크의 Molecular Red(2015)라는 책에서입니다. 그리고 워크가 설명하는 보그다노프에 관심을 갖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당시 발표자의 어떤 생각과 보그다노프의 생각이 공명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발표자는 당시 네그리·하트가 말하는 ‘삶정치적 생산’에서 힌트를 얻어서 ‘삶정치적 지성’(biopolitical intelligence)이라는 생각을 나름대로 발전시키고 있었습니다. 1 ‘삶정치적 지성’은 현재까지의 모든 물질적·정신적 성취를 새로운 삶형태의 창조를 위한 구성요소로 삼는 방향으로 작동하는 지성을 가리킵니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만드는 방향으로 작동하는 지성입니다. 발표자가 이로써 배격하고 싶었던 것은 옮고 그름을 가리는 데 갇힌 사고방식, 2차이를 배제의 근거로 삼는 ‘배제적 이접’의 사고방식(성차별, 인종주의, 지역주의, 학연 등등) 등이었습니다. 이와 함께 발표자는 모든 지식은 미래를 위해 그 나름대로 쓰임새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는 지식을 상품화하는 데 토대를 제공하는 공리주의의 사고방식은 애초부터 배격한 데서 나온 생각이었습니다. 여기서 쓰임새란 새로운 삶의 창조에의 쓰임새이지 상품으로서의 가격에 의해 표시되는 유용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
발표자는 보그다노프의 조직학과 조직학을 구상하게 된 동기를 접하고는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삶정치적 지성’과 통한다는 점에 놀라고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입니다. 당시 4 발표자는 레닌의 눈을 통해 보그다노프를 줄곧 관념론자로 알고 있다가 그나마 거의 망각한 상태였습니다. 발표자가 ‘삶정치적 지성’에 도달하게 된 데에는 네그리·하트만이 아니라 네그리가 자신이 속한 계보로서 제시한 일군의 철학자들―스피노자, 맑스, 푸꼬, 들뢰즈·가따리―과의 만남도 작용했음을 감안하면 5 혁명기 러시아에 이미 이러한 사유의 씨앗이 존재했다는 점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6
2. 보그다노프가 누구?
보그다노프는 볼셰비끼에서 레닌과 맞먹는 영향력을 가진 혁명가였습니다. (물론 의사이며 철학자이고 소설가, 과학자이기도 합니다.) 단순한 영향력 때문이 아니라 혁명의 방향에 대한 생각이 레닌과 달랐던 보그다노프는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8)에서 레닌에게 ‘관념론자’로 낙인찍히고 1909년 볼셰비끼에서 추방됩니다. 1928년 사망한 이후에는 소련의 안에서든 바깥에서든 줄곧 파묻혀 있다가 20세기 말에 와서야 러시아의 바깥에서부터 제대로 평가받기 시작합니다. 보그다노프는 사실상 아직도 ‘발굴 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보다는 러시아 외부에서 더 관심을 받고 있는데, 영어로 번역된 텍스트도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7 또한 여러 이론들―체계이론(systems theory), 복잡계 이론, 사이버네틱스, 자기조직화론 등등―의 선구자로서 다시 평가되지만 이러한 ‘선구자’론이 보그다노프의 실천적 관심을 얼마나 이어받은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새 시대의 이론들이 권력(국가, 자본)에 봉사하는 통제의 이론으로도 얼마든지 쓰일 수 있음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혁명가로서의 활동, 경제연구에서 문화론을 거쳐 조직학(tektology)에 이르는 그의 일련의 작업은 모두 그가 ‘사회주의 사회’라고 부른 사회―“모든 사회적 생산이 의식적으로 동지적인 원칙들에 기반을 두어 조직되는 사회” 8―, 지금 우리가 쓰는 말로는 대안 근대 혹은 탈자본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바쳐진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보통 러시아 혁명과 연관시키는 혁명의 길은 레닌의 길입니다. 이는 ‘정치의 우선성’으로 특징지어지며 국가권력 장악이 1순위입니다. 이에 비해 보그다노프의 길은 새로운 계급인 프롤레타리아가 그 고유의 문화를 구축하고 그 문화로 사회 전체를 바꾸어서 새로운 사회, 그가 말하는 사회주의 사회, 즉 “모든 사회적 생산이 의식적으로 동지적인 원칙들에 기반을 두어 조직되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9 이에 따라 계급투쟁에 대한 보그다노프의 견해도 레닌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10 ‘정치의 우선성’에 따르면 당연히 계급투쟁이 가장 주요한 역사의 통력입니다. 보그다노프에게는 다릅니다.
맑스에 따르면, 역사의 변증법적 측면은 인류의 자연과의 투쟁과 사회 내에서의 계급들의 투쟁이다. 이는 논리적인 과정들이 아니라 그의 부정확한 표현으로는 ‘물질적인’ 투쟁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첫째 것인 자연과의 투쟁만이 역사의 기본적이고 항상적인 동력이며, 둘째 것인 계급투쟁은 파생적이고 일시적이라는 점이다. 계급투쟁은 원시부족사회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중의 사회형성체에서 발생하고 점점 더 심화되었으며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계급들과 함께 필연적으로 제거되어야 할 것이다. 11
그래서 보그다노프에게 자본주의와의 싸움은 큰 싸움의 일부일 뿐입니다. 오히려 후위전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삶형태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 전선은 자연과의 사이에 형성되며 자본주의는 뒤에서 발목을 잡는 장애물이기 때문입니다. (장애물도 치워야 하기는 하죠.)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은 자본주의와의 전쟁으로만, 그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세력의 축적으로만 환원될 수 없다.” 12
그는 볼셰비끼에서 추방된 후 자신의 생각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고유의 문화의 구축을 위해 <프롤레트쿨트> 운동을 일으켰고 프롤레타리아 대학을 실험적으로 세웠습니다. 그러나 혁명에 성공한 당국의 지원은커녕 오히려 홀대를 받는 상황에서 이 기획이 잘 실현될 리는 없습니다. <프롤레트쿨트>는 쇠퇴하였고 보그다노프는 그 운동과 프롤레타리아 대학에서 영향력을 박탈당했습니다.
보그다노프에게 문화란 정치경제적 삶을 보조하는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었으며 당연하게도 뒤로 미루어도 될 어떤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경험을 조직화하는 능력, 즉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는 능력, 삶에 적용하자면 새로운 삶형태를 만드는 능력이었으며, 보그다노프는 바로 이러한 능력을 처음에는 프롤레타리아에게서 양성하고, 이를 통해 나중에는 사회 전체에 확산시킴으로써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3. 과학·철학에서 조직학으로
보그다노프는 모든 과거의 지식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쓸모가 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서 지식을 쓸모의 관점, 실용성의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물론 자본의 관점에서의 쓸모(교환가치)가 아니라 삶의 관점에서의 쓸모입니다. 13 그 쓸모의 핵심은 경험을 조직하는 능력에 있습니다. 경험을 조직하는 데서 가장 신뢰받는 위치를 차지해온 것이 과학과 철학입니다. 보그다노프는 경험의 조직화에서 그 일반성 혹은 통합성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일반성의 정도가 높을수록, 즉 경험을 통합하는 범위가 넓을수록 조직학적으로 더 강력한 것으로 봅니다. 14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과학은 전문화로 인해서 한계를 가집니다. 철학은 과학과 달리 경험의 통합을 향한 경향이 있지만 15 그 경향이 실천적이지 못하고 관조적이라고 합니다.
보그다노프가 전문화된 과학의 한계는 물론이요 철학의 이러한 한계도 극복하려는 목적에서 만든 것이 바로 ‘조직학’(tektology)―‘조직화에 관한 일반적 학’(general science of organization)―입니다. 16 조직학은 정신과 물질을 모두 포함한 모든 실재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개별 과학과 다릅니다. 범위의 한정이 없습니다. 또한 실천과의 밀접한 연관성에서 철학과도 다릅니다. 17 조직학은 개별 학문들의 협동/합류(전문화의 극복)를 지향하는 학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맥켄지 워크가 바로 이런 식으로 보그다노프를 조명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는 “자연으로부터 삶을 추출하는 바로 그 과정이 자연 자체의 계속되는 삶을 무너뜨리는 이차적 효과를 산출할 때 지식과 노동은 어떻게 조직될 수 있는가?”라는 실천적 물음을 던지고 여기에 필요한 것은 “협동적 기반 위에서 통합된 해결책들을 설계할 일종의 하위이론(low theory)”이라고 봅니다. 보그다노프의 조직학이 바로 이 ‘하위이론’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18
네트워킹 시대에 하위이론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각 학문들이 위계적·수직적 방식이 아니라 협동적인 수평적 네트워킹의 방식으로 서로 통합되는 것입니다. ‘아래’는 구체적 현실을 가리킵니다. 이 아래에서 수평적으로만 움직이기 때문에 ‘하위이론’입니다. (이에 반해서 ‘상위이론’은 ‘구름을 잡으러’ 하늘로 올라갑니다.) 보그다노프의 조직학은 이러한 통합의 방법론을 제공합니다. 조직학이 철저하게 실천적인 목적으로 구상되고 창안되었다는 것은 다른 어디보다도 그의 과학소설에 잘 나와 있습니다. 당시 볼셰비끼의 일반적 생각에 따르면 대중의 의식은 외부에서 주입되어야 합니다. 대중은 이른바 ‘자생성’의 수준을 넘어가지 못한다고 보죠. 이를 더 넓혀서 보자면 노동자들은 외부의 누군가―지식인, 전문가, 지도자, 언론 등―가 말하는 것을 믿고 그것을 따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엔지니어 메니』에서 한 노동자는 이러한 상황에 분통을 터뜨립니다 19. 그는 자신의 앎을 구축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앎을 그저 믿고 따라야 하는 상황에 대해 “이건 노예제, 그것도 그 중 가장 최악의 형태 아닌가요?”라고 개탄하면서 어떻게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동지들에게 묻습니다. 20 여기에 이 소설에서 조직학의 창시자가 되는 네티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오늘날 과학이 노동계급에게 하등 쓸모가 없는 이유는 그것이 너무 어렵고 부적합하기 때문입니다. 프롤레타리아는 이를 변화시켜 습득해야 합니다. 노동자의 손에 들어가면 과학은 훨씬 단순해지고, 조화와 생명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과학의 분열화는 개선되어야 하며, 자신의 원초적 기원인 노동에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21
조직학의 내적 목적은 “조직화 경험을 체계화하는 것”이며 그 대상은 모든 지식과 그 지식을 낳은 실천들입니다 22. 앞에서도 말했듯이 조직학은 특정 분야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모든 분야를 가로지릅니다. 다만 대상들에 대한 고찰은 그 방법의 차원에서만 이루어집니다. 23 ‘조직화’란 전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모여서 하나의 형식을 이루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보그다노프에 따르면 사실 이 세상의 활동은 크게 ‘조직화’(organization)와 ‘탈조직화’(de-organization), 그리고 양자가 서로 상쇄되는 ‘평형’(equilibrium) 셋으로 나뉩니다. 그런데 ‘평형’은 운동의 부재가 아니라 두 반대 방향의 운동의 상쇄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조직화’(organization)와 ‘탈조직화’(de-organization) 둘 밖에 없습니다.
이 발표에서는 조직학의 내용을 상세하게 소개할 수는 없습니다. 몇 가지 중요한 측면에 주목하기로 합니다.
1) 앞에서 말했듯이 조직학의 대상은 조직화, 탈조직화, 평형인데, 이 중에서 핵심은 역시 조직화입니다. 그런데 조직화 혹은 ‘조직되어 있음/조직성’(organizedness)의 개념 자체가 중요합니다. 아마도 자본주의적인 것이든 레닌주의적인 것이든 위계적 조직에 익숙해진 사람에게 ‘조직’하면 곧 위계적인 조직을, 위에서 아래로 하향식으로 구성되는 조직을 떠올릴 것입니다. 물론 이런 조직화가 유효했던 역사적 시기나 상황이 있습니다. 24 그러나 보그다노프가 실천적인 과제로 추구하는 사회주의 사회는 “모든 사회적 생산이 의식적으로 동지적인 원칙들에 기반을 두어 조직되는 사회”입니다. 이것은 조직화의 온전한 현실화에 해당합니다. ‘전체가 부분들의 합보다 크다’라는 말이 적용되는 경우 ‘조직화’가 발생합니다. (‘전체가 부분들의 합보다 작은’ 경우는 ‘탈조직화’이며 양자가 같은 경우가 중립적인 상태, 즉 평형 상태입니다.) 전체가 부분들의 합보다 크다라는 말은 부분들이 협동의 형태로 결합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 경우 힘의 벡터들이 서로 상쇄하여 낭비되는 일이 없고 오히려 서로 증폭시킵니다. 25 보그다노프에게 조직화는 기본적으로 활력의 상승을 낳는 방향으로 요소들(‘활동-저항들’)이 결합되는 것을 말합니다. 26 그가 말하는 사회주의 사회는 활력의 상승이 일반화된 생산양식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사회입니다.
2) 바로 앞의 주석에서 언급했듯이, 보그다노프에게 모든 복합체들(complexities)과 그 복합체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그 자체가 복합체입니다)은 고정된 사물이 아니라 활동(력)입니다. ‘활동(력)-저항(력)’이 바로 보그다노프의 물질 개념입니다. ‘활동’은 ‘저항’과 동일합니다. ‘저항’은 활동을 다른 활동에 대립되어있는 측면에서 본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자연은 저항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미 알고 있는 ‘자연’ 관념을 떠올리고 거기에 ‘저항’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안 됩니다. 거꾸로 읽어야 합니다. 인간의 사회적 노동에 저항이 되는 것이 바로 자연입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책을 이해하려 하는데 그 내용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 상황에서는 그 내용이 바로 ‘자연’입니다. 이해하려는 우리의 노력에 저항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보그다노프의 물질 개념 혹은 자연 개념은 열려있는 총체 27로서 구체적인 사회적 노동과의 관계에서만 구체화됩니다.
3) 전체의 활력을 증가시키는 협동적 관계를 핵심으로 하는 조직학은 (앞에서 그 동기를 언급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과학들(지식들)의 협동이라는 생각을 포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생각은 『1844년 경제철학 수고』의 맑스를 이어받은 것이면서 28 또한 이후 프리고진, 29네그리 30 등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다른 한편 맥켄지 워크가 보그다노프의 조직학에 주목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발전이 낳은 ‘물질대사의 단절’ 31이 가져온 여러 위기들―그 가운데 하나가 기후 변화입니다―을 해결하는 데 과학들의 협동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기후변화 자체도 여러 과학들의 협동으로 밝혀진 것입니다. 32
4) 앞에서도 말했듯이, 보그다노프는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할 가능성은 문제가 일반적인 형태로 진술될 때 증가한다고 봅니다. 33 그리고 이 일반화의 정도가 가장 높은 학이 바로 조직학이고 여기에 조직학의 강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반화가 부정적인 의미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압니다. 부정적인 의미의 ‘추상’과 연관되어, ‘그건 너무 추상적인 일반화야’라고 말합니다. 이런 일반화가 분명 존재합니다. 가령 더 큰 방을 만들어서 그 방에 어떤 대상을 넣는 식의 일반화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예를 들어, 개―이 자체가 이미 하나의 방입니다―를 포유류라는 더 큰 방에 넣는 것, 그리고 다시 척추동물이라는 그보다 상위의 방에 넣는 것이 이런 식의 일반화입니다. 보그다노프가 일반화를 이야기하고 추상을 이야기할 때에는 이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보그다노프의 일반화, 혹은 추상은 하나의 복합체(체계)를 구성요소들로 분해함으로써 진행됩니다. 그리고 요소들 가운데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합니다. “사용되는 수단은 ‘추상’인데, 이는 복잡하게 만드는 특징들을 빼거나 제거하는 것이다.” 34 그리하여 “이 현상의 핵심을, 즉 그 가시적인 복잡성 뒤에 숨은 지속적인 경향을 순수한 형태로 드러낸다.” 35 이것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설명해보겠습니다.
기존의 복합체의 부분적 개선이 아니라 새로운 복합체를 만들려할 때 외부에서 그 구성요소를 찾을 수 없다면 그것들을 기존의 복합체 내에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기존의 복합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실제로든 머릿속에서든 일단 기존의 관계에서 떼어내어 다른 관계에 진입할 수 있는 자유로운 상태로 만들어야 합니다. 36 (확정적인 것을 덜 확정적인 상태로 만든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다음 이 가운데 일부 요소들이 모여서 새로운 복합체를 구성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 이 일부 요소들은 조직화를 거치지만, 나머지 요소들―빼거나 제거하는 요소들―은 탈조직화를 겪습니다.) 들뢰즈·가따리의 ‘공재의 평면’(plane of consistency) 구성하기가 바로 이런 조직화 과정을 나타내는 모델입니다. 기존의 영토 안에 기존의 관계에 고정되어 있던 ‘탈영토화의 첨점’들이 탈주하여 (탈주선을 그려서) 서로 공재하면서 새로운 무언가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공재의 평면’은 추상적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추상적이면서 동시에 실재적입니다. 37 바로 그렇기에 ‘공재의 평면’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적용될 수 있으며 보그다노프적 의미에서 하나의 탁월한 조직학적 모델입니다. 38
4. 리얼리즘론 이후와 조직학1
문학론 자체는 조직학이 아니라 특수한 개별 이론입니다. 그리고 보그다노프가 따로 세밀한 문학론을 쓴 것은 아니므로 39 그의 조직학이 문학론과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관되는지는 그가 조직학을 만든 취지와 조직학의 성격으로 미루어 파악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조직학의 밑바탕에 자리잡은 관점은 ‘노동의 관점’입니다. 우연치 않게도 우리의 80년대 문학론에서 관점에 대한 인식이 ‘각성된 민중’을 거쳐 ‘각성된 노동자의 눈’까지 나아갔다는 점을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40 이제는 정말 아스라한 기억인데, 이는 그 후로 이 ‘각성된 노동자의 눈’이 표현하는 인식이 아쉽게도 별다른 새로운 생성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1 실제로 현실 속의 노동계급의 의식이 정규직/비정규직으로의 분열을 겪으면서 후퇴했고 또한 노동계급 내에서 계급구성이 달라지면서 ‘노동(자)’가 들어가는 어구의 효력이 사라진 것이 사실입니다. 42 그렇더라도 ‘각성된 노동자의 눈’이 노동계급의 개별적 관심사를 대변하지 않고 민중 전체, 민족 전체의 관심사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보그다노프의 ‘노동의 관점’과 통하는 면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보그다노프의 ‘노동의 관점’은 노동계급 혹은 프롤레타리아의 고유한 관심사가 바로 사회 전체, 인류 전체의 조화와 통합을 향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직학은 바로 이 과제를 위해 고안되고 구축된 43일반적 과학입니다..
80년대에는 민중문학론, 노동자계급문학론, ‘각성된 노동자의 눈’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실천적인 사회·역사적 과제 및 이 과제를 달성할 주체와 문학의 연관이 전제되는 한편 문학의 예술성과 현실연관성을 통합적으로 달성할 ‘창작방법’으로서 ‘리얼리즘’이 추구되었습니다. 문학주체론이든 리얼리즘론이든 단 하나의 형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여럿이 병존하며 서로 자극했습니다. 리얼리즘론의 경우 (이름보다 내용으로 가르자면) 현실의 반영을 강조하는 갈래 44와 반영을 배제하지 않지만 작품에서 새로운 실재의 창조를 더 중심적인 것으로 보는 갈래, 45크게 보아 이 둘이 있었습니다.
사실 레닌에서 정점에 달했고 80년대에도 만만찮은 힘을 지녔던 반영, 혹은 재현이라는 생각은 그 이후 전개된 지구 사회의 지적 발전과정에서 거의 탈락되다시피 했습니다. 이미 1958년에 과학자 슈뢰딩거가 그리스 시대부터 내려온, 주체를 말소하고 객체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겠다는 사고방식을 비판한 바 있거니와 46 최근 뇌과학에서의 성과는 인간이 가장 기초적인 감각에서부터 재현이 아니라 창조를 하는 존재임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47 본격적인 철학 연구에서는 누구보다도 들뢰즈가 재현의 보수성(동일한 것의 반복)을 확연하게 비판하고 표현의 창조성(차이의 반복)을 부각시켰습니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주체의 구성에서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인지 노동으로 대표되는 노동 자체의 기술적 변형을 포함한 여러 이유로 종래의 산업노동자들이 노동운동에서 가졌던 중요성이 사라지고 이질적으로 다양하면서도 합류하는 새로운 형태의 주체―그것을 ‘다중’이라 부르든 ‘촛불’이라 부르든―가 등장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레닌의 이름과 깊은 연관을 가진 전위주의(중앙주의)가 이제 역사적으로 시효를 다했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48
이런 상황에서 문학(예술)이 가진 힘을 재현(반영)에서 찾는 것은 시대에 뒤쳐지는 일이 되었습니다. 이에 비하면 작품의 활력을 실재의 창조(‘진리의 발생’)에서 찾는 것은 아직 더 발전할 소지가 많습니다. 그런데 가령 하이데거의 진리 개념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식으로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이데거의 진리 개념(‘알레테이아’)은 재현 혹은 반영의 밑바탕에 있는 상응진리론을 비판하는 데 매우 강력합니다. 그러나 ‘알레테이아’의 핵심인 ‘탈은폐’는 ‘은폐’에 ‘탈’자가 붙은 데서 보듯이, 은폐된 것의 차원이 드러난 것의 차원에 우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49 다시 말해서 존재의 차원이 존재자들의 차원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이 없습니다. 50 사실 하이데거의 철학은 로런스(D. H. Lawrence)의 소설가·사상가로서의 성취를 설명하기 위해 유효하게 쓰인 바 있는데, 내 생각으로는 로런스가 하이데거보다 더 나아간 듯합니다. 로런스는 삶의 활력의 원천―하이데거에게서는 ‘존재’에 해당하는 것―에의 (가능하면 일상적인) 접속을 강조함과 동시에 그 활력의 현실성(actuality) 차원에서의 표현―특이한 힘들의 상호관계 51의 52구축―을 강조합니다.
보그다노프의 조직학은 ‘존재’의 혹은 삶의 활력의 원천 자체에 대한 드러난 강조는 거의 없고, 그 활력이 현실성의 차원에서 표현되는 방식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로런스의 소설론을 보그다노프의 조직학이 소설에 적용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53 로런스는 소설을 “섬세한 상호연관”의 사례로서 인간이 발명한 최고의 것으로 봅니다. 54 창조의 과정에서 소설은 소설을 구성하는 부분들이 가진 힘을 최대로 발휘하게 해준다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좋은 소설은 단순히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무언가가 (힘의 표현이)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즉 무언가 삶의 활력이 북돋워집니다. “소설에서만 모든 사물들은 최대의 활동력을 발휘하도록 허용받는다······.” 55 새로운 관계의 수립이 계속적으로 일어날 때, 보그다노프의 말로 하자면 조직화가 계속적으로 일어날 때 바로 ‘삶’이 존재합니다. “우리의 삶은 바로 우리 주위의 살아 있는 세계와 순수한 관계를 맺는 데 있다.” 56 그저 생명만 유지하는 것―보그다노프의 조직학 용어로는 ‘중립적 복합체’로서 ‘평형’ 상태에 있는 것―은 로런스에게는 삶이 아닙니다. 57 소설을 비롯한 예술이 바로 이 관계를 드러냅니다. “예술이 할 일은 살아있는 순간에 맺어지는 인간과 주위세계의 관계를 드러내는 일이다. 인간은 항상 옛 관계의 그물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으므로 예술은 항상 ‘시대’에 앞서 있으며 이 시대는 또한 살아 있는 순간보다 훨씬 뒤쳐져 있다.” 58
이렇듯 로런스의 소설론은 그 자체로 소설에 대한 훌륭한 조직학적 설명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이 소설론이 소설의 단순한 형식이나 구조에 대한 것이 아닌 이유는 ‘조직화’의 핵심인 활력이 소설 안에 존재함을 짚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소설에는, 모든 등장인물들 뒤에 느껴지지만 알려지지는 않는 불꽃이 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단어들과 제스처들에는 그 불꽃의 깜박거림이 있다. 만일 당신이 너무 개인적(personal)이거나 너무 인간적이면 그 깜박거림은 희미해지고 당신에게는 끔찍하게 실물 그대로인 듯하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삶의 활력이 없는 어떤 것만 남는다. 59
그것[활기, the quickness]은 이상한 종류의 유동적이고 변화하며 기괴하거나 아름다운 관계맺음 속에 존재하는 듯하다. 60
소설 속의 사람은 ‘활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많은 알려지지 않은 의미들 중에 한 가지를 의미한다. 즉 그가 소설 속의 다른 모든 것들과 살아있는 관계를 맺어야 함을 의미한다. 61
이것이 중요한 것은 조직화가 일어났느냐 아니냐는 오직 활력의 증가가 일어났느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활력의 증가는 존재자들과의 관계에서만 판단될 수 있습니다. 62
우리는 이제 진리론을 ‘탈은폐’와는 다른 것에 입각시켜야 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 성과는 이어받아야지요.) 현실 세계에서의 활력의 증가는 잉여 혹은 초과의 형태를 띱니다. 63 로런스도 이미 ‘잉여’에 주목한 바 있습니다. 64 더 집중적으로 이것을 ‘초과’(eccedenza)라는 개념으로 다듬어낸 사람은 네그리입니다. 초과는 척도(측정 가능성)와의 대조 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척도로 측정될 수 없는 일(‘사건’)이 일어날 때 초과가 발생합니다. 네그리에게는 초과가 바로 아름다움입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이란 새로운 존재이고 집단적 노동을 통해 구축되는, 노동의 창조적 활력에 의해 산출되는 초과입니다. 아름다운 사건을 결정하는(낳는) 이 생산, 아름다움의 이러한 생산이 바로 명령으로부터 해방된 노동입니다. 이 노동은 추상적이며 추상적일수록 존재의 초과를 산출하는 능력을 가집니다. 이것들이 아름다움의 정의의 주된 요소들입니다.” 65 ‘형태’를 놓고 말하자면, 형태의 초과, 즉 새로운 형태의 창조가 아름다움의 창조입니다. (저 앞의 주석에서 말했듯이 스피노자의 ‘절대 민주주의’론도 활력의 잉여 혹은 초과와 연관됩니다.)
이제 우리는 진리의 발생이란 바로 초과의 발생, 아름다움의 발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적어도 인간의 사회적 노동이 이루어지는 삶의 모든 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66 보그다노프의 조직학이 함축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조직화 즉 활력의 증가는 우주 어디에서도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직화만이 일어나는 것처럼 이해하면 안 됩니다. 항상 탈조직화가 병행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생명 현상에는 필연적으로 죽음이 병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진리에 대한 푸꼬의 생각을 잠깐 언급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자기돌봄’, ‘진실/진리’, ‘자기에의 배려’, ‘아스케시스(askesis)’, ‘다른 삶’ 등의 말로 특징지어지는 푸꼬의 후기의 작업 67은 주체의 활력에 조직학을 적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테시스(지식을 배우는 것)가 아니라 아스케시스(수련)를 통해 주체를 활력이 증가되는 방향으로 변화시키고 그것을 이전과는 다른 삶(새로운 삶형태)과 연결시키는 것이 그 골자이기 때문입니다. 푸꼬는 진리(진실, verité)를 다음과 같이 파악합니다.
진실의 수립에는 타자성의 정립이 절대 필수적이다. 진실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다른 세계'와 '다른 삶'(l’autre monde et ··· la vie autre)의 형태로만 진실이 존재할 수 있다. 68
하이데거의 ‘탈은폐’와는 확실히 다릅니다. 현재 존재자들이 맺는 관계에서 풀려나야 하는 것이 당연히 전제되지만, 그것이 하이데거식의 존재에 머물지 않고 새롭게 조직된 삶형태로 표현됩니다.
잉여, 초과, 새로운 삶형태를 낳는 힘, 이것이 바로 삶의 힘입니다. 69 이는 단순한 생명의 연장―이를 로렌스는 ‘existence’라고 부르고 ‘being’과 구분합니다―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러한 잉여 혹은 초과는 그리고 그에 기반을 둔 예술은 자본주의의 유지와 확장을 추동하는 잉여, 즉 잉여가치의 잉여, 이윤의 잉여, 자본의 축적과 원리적으로 대립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반(反)자본주의적입니다. 자본이 가진 힘은 척도―교환가치, 가격―에 종속시키는 힘인데 반해 예술이 대표하는 힘인 활력은 척도를 초과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보그다노프의 조직학이 어떤 의미에서 노동의 관점에 서있는 지를 온전하게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조직학을 선구자로 삼는다는 어떤 이론이 노동력 통제의 도구로 사용된다면 이는 보그다노프의 조직학을 사실상 능멸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5. 리얼리즘론 이후와 조직학2
지금까지는 작품을 중심으로 한 논의였는데, 이제 마지막으로 문학예술과 실천적 과제의 관계를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작품이 구현하는 활력의 증가는 결국 독자(감상자)에게서 검증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이런 어려움은 앞에서 사례로 든 들판을 치우는 노동과 비교할 때 확연해집니다. 이 사례에서 협동을 통한 활력의 증가는 과제를 완수하는 시간의 감소에 의해 확연하게 검증됩니다. 그러나 작품이 가진 활력의 검증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질 수가 결코 없는 것입니다. 들판을 치우는 노동의 경우에는 그 대상―돌, 숲 , 뿌리들 등―이 거의 중립적 복합체들(저항이 일정합니다)이었습니다. 70 그러나 작품 감상의 경우에는 다릅니다. 감상자는 지적·정동적 능력, 의지, 사상, 집중력, 습관 등등이 다 다릅니다. 작품과 만난 경험을 조직하는 능력이 뛰어난 감상자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편에는 탈조직화를 서슴지 않는 악의적인 감상자―예컨대 작품을 자신이 증오하는 정치적 입장의 표현으로 부당하게 환원한 후 비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서 감상 행위 자체에 협동을 도입하는 방식이 좋습니다. 다시 말해서 같이 읽고 토론해서 작품의 활력과 만나는 능력을 집단적으로 높이는 것입니다.
니체는 앞으로의 미학은 ‘주는 사람’ 즉 예술가의 입장에 기반을 둔 미학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조직학의 관점에서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작품을 창조한 예술가에게 일어난 것과 같은 변화가 감상자에게서도 일어날 때 일정한 조직화가 ‘작가-작품-감상자’ 사이에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감상자를 받는 사람으로만 규정해서도 안 될 듯합니다. 보그다노프는 예컨대 식물과 동물의 공생도 조직화의 한 사례로 보는데, 산소를 흡수하고 이산화탄소를 내놓는 동물과 반대로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내놓는 식물의 서로 공생하는 체계(복합체)는 에너지(활력)를 낭비 없이 보존했다는 점에서 조직화의 사례입니다. 71 이는 서로 주는 체계에 다름 아닙니다.
그런데 감상자―문학으로 단순화하여 독자라고 하지요―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줄까요? 그리하여 ‘작가-작품-독자’가 구성하는 복합체를 가장 활력이 높은 복합체로 만들까요? 이 점을 마지막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재현은 정의상 새로운 활력의 창조와 무관합니다. 최선을 다해보아야 기존의 것의 유지(소통)입니다. 작품이 기존의 현실에 대해서 그저 중복의 역할만 하기 때문입니다. 72 그런데 예술이 무언가를 창조하는 경우 이것은 철학이나 과학이 새로운 사유나 인식을 창조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후자는 독자에게 기본적으로 이해(理解)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예술작품에는 이런 식의 이해라는 것이 잘 적용되기 힘듭니다. 잘못 적용되면 작품에서 독자의 의도를 찾으려 들거나, 현실에 대한 정보를 찾으려 들 것입니다. 들뢰즈는 예술과 철학의 차이를 이렇게 말합니다. “사유는 사유하도록 강제하고 사유에 완력(violence)을 행사하는 어떤 것이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다. 사유보다 중요한 것은 ‘사유에 이르게 해주는 것’이다. 철학자보다 중요한 것은 시인이다.” 73 이 “사유에 이르게 해주는 것”은 그저 전달되기만 하면 되는, 일단 이해되면 확연해지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해석의 대상인 기호로서 다가옵니다. “철학은 그 방법과 호의에도 불구하고 예술작품의 은밀한 압박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창조는 사유하는 행동의 발생처럼 항상 기호들에서 출발한다. 예술작품은 그것이 기호들을 발생시키는 만큼이나 기호들에서 탄생한다. 창조자는 진리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기호들을 면밀히 살피는, 질투하는 사람, 신의 해석자이다.” 74 따라서 독자의 해석 행위가 바로 활력을 주는 행위, 창조 행위가 됩니다. 독자들이 발휘하는 해석 능력이 뛰어날수록 ‘작가-작품-독자’ 복합체의 활력의 총체가 높아집니다. 75
이 논의와 반드시 같지는 않지만, 보그다노프는 문화에서 예술이 가진 변별적 특성을 알고 있습니다.
과학의 경우와 유사하게 예술도 인간의 경험을 하나의 총체로 통합하는 데 복무한다. 다만 예술은 추상적 개념의 형태로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이미지의 형태로 조직한다. 이런 성격 때문에, 예술이 과학보다 더 민주적이며 대중에게 더 가깝고 대중 안에서 더 광범하게 퍼진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감정, 포부, 이상이 스며들어있는 고유한 사회주의 예술을 필요로 한다. 76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민주성과 대중성은 ‘예술가-작품-감상자’ 복합체가 얼마나 광범한 것이 될 수 있는지를 시사합니다. 아쉽게도 보그다노프는 자신이 속한 현실에서는 프롤레타리아 고유의 문화의 광범한 구축이라는 기획의 실현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자, 그럼 자신의 기획에 성공한 자본가들이나 정치권력의 장악에 성공한 레닌의 길을 따라야 하나요? 아니면 “인간의 삶의 목적은 성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성과 늘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에 있”다는 보그다노프의 말 77을 따라야 할까요? 이는 각자의 판단에 맡겨져 있습니다.
♣
[추가]
★ 보그다노프가 말하는 ‘노동의 관점’을 구성하는 세 요소
① 노동의 온전성. 노동 자체 내에서의 분할―가령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으로의 분할―이 사라짐.
② 노동의 공통되기. 동지애에 기반을 둔 협동으로 조직화를 구축함.
③ 민주주의. 조직자와 실행자, 즉 명령을 내리는 자와 명령을 수행하는 자의 분리가 사라짐. 조직화가 권위와 종속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고 우애, 이니셔티브, 그리고 모두에 의한 관리에 의해 이루어짐.
- ‘삶정치적 생산’이란 현대 자본주의의 생산의 가장 주요한 특징을 가리키는 말로서, 이전 시대 자본주의에 특징적인 삶의 수단의 생산에서 삶의 형태의 생산(이는 사회적 관계의 생산, 인간의 생산 등과 동의어이다)으로 이행했음을 서술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지음, 정남영·윤영광 옮김 『공통체』(사월의책, 2014) 3부 1장 참조. [본문으로]
- 들뢰즈는 이것을 “삶을 그보다 우월한 가치들의 이름으로 ‘심판’”하는 것이라고 불렀습니다. Gilles Deleuze, “Pour en finir avec le jugement”(「심판의 종식을 위하여」). [본문으로]
- 아닐 뿐만 아니라 정반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른바 교환가치(화폐)는 마치 그것이 삶보다 우월하다는 듯이 삶 위에 군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 당시라고 해봐야 1년 쯤 전입니다. [본문으로]
- 발표자의 경우에는 개인적으로 로런스(D. H. Lawrence)를 추가해야 합니다. 왜곡되어 알려진 측면이 큰 로런스라서 설명이 필요하지만, 이 발표문의 주제가 보그다노프이니만큼 여기서는 들뢰즈·가따리의 철학사상의 원천 가운데 한 사람이 로런스라는 점을 지적하는 데서 그치기로 합니다. (「니체와 사도 바울, 로렌스와 파트모스의 요한」“Nietzsche et Saint Paul, Lawrence et Jean de Patmos”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들뢰즈는 주저 없이 로런스를 ‘천재’라고 부릅니다.) [본문으로]
- 네그리가 감옥에서 절망을 견디고 대안 근대로 나아가는 실마리를 잡은 것이 스피노자 연구와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연구였는데,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은 보그다노프에게도 또 레닌을 비롯한 소련 맑스·레닌주의의 철학 작성자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저작이었습니다. (『1844년 경제철학 수고』도 알려지지 않았었습니다.) 만일 알려졌더라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소련의 맑스·레닌주의는 맑스에게서 온 여러 갈래 중 하나를 ‘정통화’한 것이며 맑스에게서 온 다른 갈래가 이 ‘정통’에 의해 오랜 세월 동안 가려져 있었고 보그다노프를 전혀 모르는 새로운 철학자들로 점선으로 이어지고 있었다는 것이 보그다노프에 의해 입증된 셈입니다. 보그다노프는 맑스를 “조직학의 위대한 선구자”로 봅니다.(Alexander Bogdanov, The Philosophy of Living Experience : Popular Outlines, Trans. Ed. and Intro. David G. Rowley, Brill 2016, 104면.) [본문으로]
- 영어로 논문을 쓰는 사람들도 상당수를 러시아어로 된 원래 텍스트에서 인용합니다.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과학소설 『붉은 별』 하나밖에 없습니다. [본문으로]
- Alexander Bogdanov, “Socialism in the Present Day”, https://libcom.org/library/socialism-present-day-alexander-bogdanov 이 글은 http://minamjah.tistory.com/189에 우리말로 옮겨져 있습니다. 보그다노프는 생산양식을 중심으로 사회를 파악하는 맑스의 원칙을 이어받았습니다. [본문으로]
- 국가형식(state form)에 대한 보그다노프의 견해는 명확합니다. “모든 국가형식은 계급지배의 조직화이며, 이는 계급이 없는 곳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Aleksandr Bogdanov, “Socially Organised Society: Socialist Society”, Chapter X of A Short Course of Economic Science, 10th edition, 1919, English translation J. Fineberg, 1923. https://www.marxists.org/archive/bogdanov/1919/socialism.htm) [본문으로]
- 레닌은 1923년의 글 「협동에 대하여」에서 보그다노프들을 겨누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반대자들은 우리가 문화적으로 불충분한 나라에 사회주의를 이식하는 일에 성급하게 착수했다고 거듭해서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이론(온갖 종류의 현학자들의 이론)이 정해준 바와 반대 방향에서 출발했다는 점으로 인해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치 및 사회혁명이 문화혁명에 선행했기 때문이다. 이제 바로 그 문화혁명이 우리의 당면 문제인 것이다.” (V. I. Lenin. “On Cooperation”, The Lenin Anthology, Ed. Robert C. Tucker, W.W. Norton & Company, 1975, pp. 712-13. 여기서 레닌은 사실상 문화혁명의 필요를 받아들이면서도 보그다노프들을 현실을 모르는 ‘현학자들’로 몰고 정치혁명이 선행된 것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당화의 근거는 권력 탈취에 성공한 ‘현학적이지 않고 현실적인’ 공적 말고는 없습니다. 현실에서의 결과를 기준으로 하는 레닌의 논법에 따르면, 국가가 주도하는 문화혁명에 결국 실패했고 소련은 관료들이 지배하는 국가자본주의가 되었기 때문에 레닌의 말은 모두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잘 생각해보면 레닌의 ‘정치의 우선성’은 ‘인간이 되려면 먼저 권력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라는 말, ‘닥치고 정치’라는 말과 다를 바 없습니다. [본문으로]
- Alexander Bogdanov, The Philosophy of Living Experience : Popular Outlines, Trans. Ed. and Intro. David G. Rowley, Brill 2016, p.181. 밑줄은 인용자의 강조입니다. [본문으로]
- Alexander Bogdanov, “Socialism in the Present Day”. [본문으로]
- 이와 유사한 태도를 우리는 가따리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학이라는 제도들에 의하여 중립화된 맑스주의와 프로이트주의는 이제 더 이상 아무도 불안하게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기성질서의 보증자들이 되었으며 이 기성질서를 심각하게 흔들어놓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음을 귀류법으로 증명하는 것이 되었다. 응용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이 이론들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항의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의 메시지가 변질된 것이며 따라서 원천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물신주의의 함정이다. 과학의 영역에서는 이와 같은 일이 없다. 수정주의가 관례이다. 이미 존재하는 이론들을 상대화하고 해체하고 탈구시키는 것은 영속적인 과정이다. 저항하는 이론들은 항상 공격을 받는다. 이상적인 것은 이 이론들을 미이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구축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다. 이렇게 구축된 것은 마찬가지로 일시적이지만 그러한 실험에 의해서 더 강화된다. 길게 보아 중요한 것은 특정의 이론을 우리가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 따라서 우리는 맑스주의와 프로이트주의의 실용적 활용을 무시할 수 없다.” (Félix Guattari, "Marxism and Freudianism No Longer Disturb Anyone," Soft Subversion, Ed. Sylvère Lotringer, Tr. David L. Sweet and Chet Wiener, Semiotext(e) p. 189.) [본문으로]
- 보그다노프는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일반화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면서 그 사례로 아르키메데스의 일화를 듭니다. 아르키메데스가 왕으로부터 부여받은 과제―금으로 된 왕관에 은이 섞였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를 물체의 특수한 무게를 재는 일반적인 문제로 대체했기에 풀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보그다노프가 말하는 일반화는 우리가 보통 철학이나 과학에서 보는 추상적인 유형의 것과는 매우 다릅니다. ‘매우 실천적이고 탐구적인 성격의 것입니다. 뒤에서 이 점에 대해 좀더 논의합니다. [본문으로]
- “철학은 원래 아직 전문화되지 않은 과학적 지식을 소박한 일반화 가설들에 의해 연관지어 그저 모아놓은 것이었다. 과학이 전문화되던 시대에 그것은 과학적 지식의 상부구조로서 인간의 사상에서 통합을 향한 포부를 표현했다.”(Alexandr Bogdanov, Bogdanov’s Tektology Book1, p. 104.) [본문으로]
- 이 용어는 ‘건설자’(bulider)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tekton’에서 나왔습니다. [본문으로]
- “조직학의 입장에서 경험의 통일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고 능동적인 조직적 방식으로 창조되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항상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왔다. 그러나 요점은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라고 조직학의 위대한 선구자인 맑스는 썼다. 조직학으로 조직 형태들을 설명하는 것은 그 통합성을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전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Alexandr Bogdanov, Bogdanov’s Tektology Book1, p. 104.) [본문으로]
- McKenzie Wark, Molecular Red: Theory for the Anthropocene, London : Verso, 2015, Kindle Edition, Kindle Location 157. [본문으로]
- 『붉은 별』이라는 이름의 책 안에 두 편의 소설―『붉은 별』과 『엔지니어 메니』―이 들어있습니다. [본문으로]
-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 지음, 김수연 옮김, 『붉은 별』, 도서출판 아고라, 2016, 282쪽. [본문으로]
- 같은 책, 285쪽. [본문으로]
- Alexandr Bogdanov, Bogdanov’s Tektology Book1, p. 85. [본문으로]
- 당연한 말이지만 각 분야의 전문화된 내용 자체를 건드리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본문으로]
- 이런 취지로 레닌 시대의 전위주의적 조직(화)을 그 당시로서는 최선이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본문으로]
- 아주 쉬운 예를 들자면 한 사람이 하면 이틀이 걸리는 일에 두 사람이 협동의 방식으로 일을 하면 이틀의 반인 하루가 아니라 하루의 3분의 2 혹은 반나절에 일을 마칠 수 있을 때 ‘조직화’가 발생한 것입니다. 이틀이 걸리는 일을 2d라고 하면 이것을 둘로 나눈 값 2d/2=1d가 아니라 (2/3)d 혹은 (1/2)가 결과로 나온 것입니다. [본문으로]
- 보그다노프는 별다른 언급이 없지만 이런 식의 결합을 오래 전에 말한 사람이 스피노자입니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등에서 개인들이 모여서 이룬 ‘더 큰 몸’인 사회가 개인들 각각에게 이익이 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스피노자적 의미에서 이익이란 곧 활력의 상승입니다. 사회를 이루는 결합 속에서 개인들의 활력이 상승하므로 개인들이 따로 있을 때의 활력의 합보다 사회를 이루었을 때의 합이 더 큽니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의 ‘절대 민주주의’론의 골자입니다. 스피노자는 모든 몸의 본질을 스스로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힘인 ‘코나투스’로 본다는 점에서도 만물을 ‘활동-저항’으로 보는 보그다노프와 유사합니다. 다만 스피노자가 ‘사랑’(아모르)를 말한 곳에서 보그다노프는 ‘의식적으로 동지적인’ 유대를 말할 뿐입니다. [본문으로]
- 그 총체를 무어라고 미리 구체적으로 규정하지는 않기 때문에 ‘열려있는 총체’입니다. 사회적 노동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이 ‘자연’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 “역사 자체는 자연사의 즉 자연이 인간으로 발전하는 과정의 현실적 부분이다 자연과학은 곧 인간과학을 자신에 통합할 것이며 인간과학은 마찬가지로 자연과학을 자신에 통합할 것이다. 하나의 과학만이 존재할 것이다.” Karl Marx, Collected Works 3,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87, PP. 304-305. [본문으로]
- 프리고진은 맑스의 ‘하나의 과학’과 같은 것이 실제로 진행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두 문화’의 존재는 서로에 대한 관심의 결여에 기인할 뿐만 아니라 과학적 접근이 문학과 예술에 속하는 시간이나 변화와 같은 문제들에 대하여 할 말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도 적어도 부분적으로 기인한다. (...) 흥미롭게도 유럽과 미국 모두에 철학적 주제들과 과학적 주제들을 더 가까이 접근시키려는 강한 흐름이 있음이 주목된다.”(xvi)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시간의 문제와 변화의 법칙에 이러저러한 식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고, 반대로 시간의 문제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우리 시대의 문화적ㆍ사회적 변화에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xvii) (Ilya Prigogine, From Being to Becoming: Time and Complexity in the Physical Sciences, San Francisco: W. H. Freeman and Company, 1980) [본문으로]
- “오늘날 우리는······코뮤니즘의 토대들이 광범하고 전반적으로 재구축되는 국면에 있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이 국면에서는 코뮤니즘의 혁명적 요소―즉 코뮤니즘을 직접적으로 투쟁에, 특수한 적대에 연결시키는 모든 것―만이 재발견되고 다시 다듬어지는 것이 아니라 급진적 자유주의의 계보들에서 불교와 같은 동양의 특정 종교들의 대항적 재전유에 이르는 극히 다양한 요소들을 포함하는 방대한 문화적 맥락 또한 그렇게 됩니다. 요컨대 우리는 일단의 형식화된 욕망들이 전지구적 규모로 다시 결집되는 건설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집합 혹은 배치를 나는 새로운 코뮤니즘적 교부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배치의 관점에서 볼 때 ‘민주주의’나 ‘코뮤니즘’과 같은 용어들은 완전히 대체가능합니다.” (Cesare Casarino and Antonio Negri, In Praise of the Common : a Conversation on Philosopy and Politic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Minneapolis·London, 2008, p. 107.) [본문으로]
- ‘물질대사의 단절’(metabolic rift)은 자본주의적 발전이 분자적 차원에서 가져오는 단절(분자적 흐름의 단절)을 가리키는데, 맑스가 『자본론』 3권 47장에서 제시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 현재 이곳(http://www.ucsusa.org/)에 기후변화 등 지구의 삶의 위기를 걱정하는 과학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본문으로]
- Alexandr Bogdanov, Bogdanov’s Tektology Book1, 독일어판 서문. [본문으로]
- Alexandr Bogdanov, Bogdanov’s Tektology Book1, p.90. [본문으로]
- 같은 책, 같은 면. [본문으로]
- 자연과학의 실험실들에서 하는 일은 바로 이런 자유로운 상태를 만드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 들뢰즈·가따리는 ‘추상적이어서 문제인 것이 아니라 충분히 추상적이지 못해서 문제이다’라는 말을 종종 했습니다. 충분히 추상적이지 못하면 공재의 평면을 구성하지 못하고 다시 기존의 관계로 재영토화됩니다. 『해커 선언』에서 맥켄지 워크는 ‘해킹’을 긍정적인 의미의 ‘추상’과 같은 의미로 사용합니다. “추상한다 함은 평면을 구축하여 그 위에 상이한, 이 평면이 없다면 연관되지 않을 것들을 많은 가능한 관계들 속으로 가지고 오는 것이다.” (McKenzie Wark, A Hacker Manifesto,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2004, Abstraction 008) 그리고 해킹은 새로운 추상을 창출하는 행동입니다. [본문으로]
- 흥미로운 것은, 들뢰즈·가따리가 ‘조직화’(organization)라는 말로 지칭하는 것은 ‘공재의 평면’과 반대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공재의 평면’의 구성은 보그다노프가 말하는 ‘조직화’ 가운데 최고 형태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그다노프는 권위에 의해 조직되는 협동도 협동으로, 즉 조직화로 보기 때문입니다. 물론 ‘권위적 협동’은 역사적으로 과거에 속하는 유형이며 당 조직 등에 남아있으면 사회주의로의 진전을 가로막는 위험이 됩니다. “······동시에 우리는 권위주의의 이 비옥한 씨앗이 만일 보존된다면 야기할 있는, 사회적 진전을 가로막는 큰 위험을 볼 수 있다. 당 지도자들의 역할이, 권위를 가진 당국과 이들에 대한 집단적 통제의 중요성이 새로이 조명된다.” (Aleksandr Bogdanov, “Religion, Art and Marxism”, The Labour Monthly, August 1924, pp.489-497, https://www.marxists.org/archive/bogdanov/1924/religion-art.htm 보그다노프는 자신이 그리는 사회주의는 ‘지도-피지도’라는 형태의 협동이 사라진 사회임을 분명히 합니다. “전문화의 맨 마지막이지 가장 완강한 형태의 것, 즉 조직하는 기능과 실행하는 기능의 분할은 변형되어 그 의미를 잃을 것이다.” (Aleksandr Bogdanov, “Socially Organised Society: Socialist Society”) [본문으로]
- 세밀한 비평을 쓴 것도 『햄릿』론 이외에는 없는 듯합니다. [본문으로]
- 백낙청,「민중. 민족문학의 새 단계」(1985) [본문으로]
- 발표자는 특별한 한 개인이 아니라 문학을 논의하는 집단 전체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 발표자도 이제는 ‘다중’이라든가 ‘커머너’(commoner)라는 말을 주체를 표현하는 말로 사용합니다. [본문으로]
- 엄밀하게는 ‘그 구축이 시도된’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보그다노프는 자신이 조직학을 완결했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며, ‘조직학이 출현하고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 이에 대한 일정 시점에서의 발표자의 견해에 대해서는 그 대표적 이론가인 루카치의 문학이론의 성취와 한계를 살펴본 글 「루카치의 문학이론의 성취와 한계」(2001, http://trustsun.net/xe/229)를 참조하십시오. [본문으로]
- 새로운 실재의 창조를 하이데거의 ‘진리의 발생’으로 설명하는 백낙청의 문학론이 대표적입니다. [본문으로]
- 슈뢰딩거는 과학적 방법의 토대를 이루는, 그리스 시대부터 작용한 두 일반적 원칙들인 자연의 이해가능성과 ‘객관화’(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에서 ‘주체’ 혹은 ‘정신’을 제거하고 남은 ‘객관적 현실’을 관찰대상으로 삼는 것)가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으며 “과학적 태도가 새로이 정립되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Erwin Schrödinger, “Mind and Matter”, “What Is Life?” with “Mind and Matter” & “Autobiographical Sketches” (1992;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3장 참조. “Mind and Matter”는 1958년에 처음 발표되었습니다. [본문으로]
- “감각들은 감각신경말단들의 코드화 기능에 의해, 그리고 중추신경계의 신경 통합 메커니즘에 의해 정해진다. 몸 중심부로 향하는 신경섬유들은 고충실도 기록기들이 아니다. 특정 자극들은 강조하고 다른 자극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중추 신경세포는 신경섬유들과의 관계에서 이야기꾼 역할을 하며 결코 완벽하게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과 측정의 왜곡을 허용한다······. 감각은 실재 세계의 복제가 아니라 추상이다.” Erkc Kandel, In Search of Memory: The Emergence of a New Science of Mind (Kindle Locations 4364-4365). W. W. Norton & Company 2006. Kindle Edition. [본문으로]
- 이 이외에도 그 사이의 새로운 사태전개에서 두 가지가 더 언급되어야 합니다. 그 하나는 사회 변화를 설명하는 방법으로서 맹위를 떨치던 변증법이 폐위되다시피 한 것입니다. 이제는 엑서더스, 탈주, 누수, 해킹 등의 방식으로 사회변화를 설명하는 방식이 우세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들뢰즈·가따리, 네그리 등 변증법을 비판하는 철학자들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다른 하나는 80년대를 휩쓸었던 미래의 진보에 대한 믿음과 달리 새로운 세기에 들어와서는 미래가 유실되고 또 실제로 그동안 자본주의적 발전이 이루어놓은 “물질대사의 단절”로 인해 기후변화를 비롯한 환경악화가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게 된 상황입니다. [본문으로]
- 하이데거나 후기에 ‘현존재’(Dasein)에서 ‘존재’(Sein)로 관심이 이동했다는 것도 이와 연관되는 듯합니다. [본문으로]
- 대승 불교의 경우 ‘돈오’(頓悟)를 통해서 견성을 하여 ‘공적영지’(空寂靈知)의 차원(하이데거의 말로 하자면 존재의 차원)에 접속을 해도 다시 속세(존재자들의 차원)로 나와서 보살행(6바라밀)을 통해 ‘점수’(漸修)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악업’이 아니라 ‘선업’을 지어야 합니다. 하이데거에게는 이 ‘보살행’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는 경향적으로 그쪽에 가깝다는 말입니다. 하이데거도 ‘역사성’을 중요한 의미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 로런스는 ‘individual’이라는 단어를 들뢰즈의 ‘특이한’(singular)에 해당하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합니다. [본문으로]
- 개인들의 관계, 개인들과 주위 세계의 관계를 모두 포함합니다. [본문으로]
- 흥미롭게도 보그다노프는 1873년생, 로런스는 1885년생, 하이데거는 1889년생입니다. 일반적으로 한 세대를 이루는 20년이라는 시간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본문으로]
- D. H. Lawrence, "Morality and the Novel", Phoenix: The Posthumous Papers of D. H. Lawrence (London: William Heinenmann Ltd., 1936), p, 528. [본문으로]
- D. H. Lawrence, “Why the Novel Matters”, Phoenix, p. 538. [본문으로]
- D. H. Lawrence, “Morality and the Novel”, Phoenix, p. 528. [본문으로]
- 생명은 있지만 삶이 아닌 상태를 로런스는 혹은 (겉잎으로 둘러싸 키워서 안쪽이 썩어가는) ‘규격품 양배추’(regulation cabbage)에, 혹은 건반들 반이 소리가 안 나고 죽어있는 피아노에 비유합니다. [본문으로]
- D. H. Lawrence, “Morality and the Novel”, Phoenix, p. 527. [본문으로]
- D. H. Lawrence, “The Novel”, Phoenix II (New York: The Viking Press, 1970), p. 419. [본문으로]
- 같은 책, p. 420. [본문으로]
- 같은 책, 같은 면. [본문으로]
- 스피노자의 경우에도 이와 유사합니다. 특이한 개체들은 활력의 상승과 하강을 겪지만, 무한한 활력 그 자체인 신에게는 활력의 상승과 하강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불교에서 공적영지 혹은 참나의 자리도 늘 ‘여여’할 뿐 변화를 겪지 않습니다. [본문으로]
- 자본의 몸을 이루는 잉여가치는 활력으로서의 잉여, 혹은 초과를 물신화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 “내가 막 뽑은 가시 돋친 방가지똥도 그것 나름으로 존재한다. 모든 시간 중에 처음이다. 그것은 그것 자신이며 새로운 것이다. 그것은 그 작은 원판 모양의 노란 꽃에서 가장 생생하게 그 자신으로 존재한다. 가장 생생하게. 그것은 그 꽃에서 존재한다···. 그렇다면 생식에 동반되는 이 잉여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것인가? 잉여는 존재의 최대 상태에서의 사물 자체이다. 만일 이 잉여에 못 미쳤다면, 방가지똥은 전혀 존재하지 않은 것이었으리라. 만일 이 잉여가 없었다면, 어둠이 대지를 덮을 것이다. 이 잉여에서 방가지똥은 꽃으로 변용되고, 마침내 자신을 성취하는 것이다.“ (D. H. Lawrence, "Study of Thomas Hardy", Phoenix, p. 402.) [본문으로]
- 안또니오 네그리, 『예술과 다중』(갈무리 2010), 「마씨모에게 보내는 편지」. [본문으로]
- 이에 반해 하이데거는 진리의 발생을 (하나에 국한하지는 않지만) 희소한 것으로 봅니다. ‘존재의 망각’이라는 그의 생각을 감안해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망각 상태의 일반화가 반드시 희소함의 필연성을 낳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불교의 ‘여래장’은 “‘신령스러운 성품’과 그것을 덮어씌우고 있는 번뇌를 합하여” 부르는 이름입니다.(교봉 종밀 지음, 신규탁 옮김, 『화엄과 선』정우서적 2010, 102면) 일반적으로는 번뇌가 ‘신령스러운 성품’이 드러나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이데거의 ‘존재 망각’ 상태와 비슷하죠. 그러나 단박에 깨우쳐서 ‘신령스러운 성품’에 접속할 가능성이 언제 어디에나 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희소할지모르지만 잠재적으로는 전혀 희소할 수 없습니다. ‘신령스러운 성품’은 구름 뒤의 태양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 ‘여여’하게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 이는 꼴레즈 드 프랑스에서의 1979-80 강의 “살아있는 것들의 통치”에서 시작하여 1983-84년의 마지막 강의 “진리/진실의 용기”까지의 연구 주제들입니다. 이 연구는 주체의 변형(활력 증가) 자체에 대한 연구라는 점에서 그 이전까지의 ‘권력’ 연구와 확연하게 구분됩니다. 푸꼬는 안타깝게도 이 연구를 더 진척시키지 못하고 1984년 사망했습니다. 그 이전의 권력 연구로부터의 변화에 대해서 푸꼬는 “핵심은 위치이동의 궤적(un tracé de déplacement)이다. 즉 이론적 구조의 궤적이 아니라 나의 이론적 입장들이 계속적으로 변하는 위치이동의 궤적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Michel Foucault, On the Government of the Living : lectures at the Collège de France, 1979–1980, New York Palgrave Macmillan: Picador, p. 76) [본문으로]
- Michel Foucault, The Courage of Truth (the Government of Self and Others II) : lectures at the Collège de France, 1983–1984 (New York Palgrave Macmillan: Picador, p. 340 각주. [본문으로]
- 보그다노프는 이 잉여 때문에 조직화 과정에는 수학 모델이 잘 적용될 수 없다고 봅니다. 수학 모델은 부분들의 활력의 합이 전체의 활력이 같은 경우, 다시 말해서 중립적 복합체들을 다루는 경우에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보그다노프는 수학에 조직학적 성격이 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언어 모델을 선호하는 네그리는 들뢰즈가 수학모델을 좋아하는 것을 비판한 적이 있는데, 이 점에서 보그다노프는 네그리에 더 가깝습니다. 또한 다음과 같은 점에서도 보그다노프는 네그리에 가깝습니다. “우리를 모이게 하고 공통적인 것을 구성하는 것은 차이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활동입니다. 즉, 이것, 저것, 그 어떤 것이라도 구축하는 활동입니다. 요컨대, 그것은 ‘알마 비너스’[‘모든 것을 기르는 사랑’이라는 의미이다―인용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나와 들뢰즈의 결정적 차이입니다. 내가 여기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즉 공통적인 것의 문제들, 그 구성과 활동들과 실천들의 문제들―은 분명 이미 들뢰즈에게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이 근본적인 문제들이라는 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가끔 특수한 정치적 문제를 다룰 때 말고는 그렇습니다). 구조주의 사상―여기에 그들은 옳게도 정통 맑스주의도 포함합니다―의 억압적 기계를 파괴하려는 들뢰즈와 가따리의 욕구가 극히 강렬하였기에 그것이 그들을 저 다른 문제들로부터 눈을 돌리게 했던 것입니다.” (Antonio Negri, In Praise of the Common, 83면) [본문으로]
- 그래서 수리적 계산이 가능합니다. [본문으로]
- Alexandr Bogdanov, Bogdanov’s Tektology Book1, p. 72 참조. [본문으로]
- 물론 재현되는 현실을 몰랐던 사람들이 재현을 매개로 그 현실을 알게 되는 것은 활력의 증가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는 재현물이 일종의 사제의 위치로, 권력의 위치로 바뀔 위험이 상존합니다. 지금 대한민국 언론이 보여주는 꼴사나움을 보십시오. ‘나쁜’ 언론만이 아니라 모든 언론이 근본적으로 이렇게 꼴사납게 될 수 있습니다. 보그다노프의 용어로 말하자면, 언론은 독자나 시청자에 대해서 권위적 협동의 관계에 있는 조직입니다. 이에 비해 자율미디어는 수평적 협동을 원리로 합니다. [본문으로]
- Gilles Deleuze, Proust and Signs, Tr. Richard Howard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00), p. 95. 1부 결론 「사유의 이미지」 에 속하는 대목인데, 이 부분의 내용은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의 핵심적인 장으로 다시 다듬어져서 등장합니다. [본문으로]
- 같은 책, p. 98. [본문으로]
- 여기서 ‘해석’이라는 말을 웹상의 무책임한 댓글 작성자들처럼 제멋대로 자의적인 자기 생각을 맥락 없이 갖다 대는 혹은 미리 정해진 자신의 경직된 견해를 기계적으로 관철하려는 행위로 ‘해석’하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을 것입니다. 모든 해석 능력은 자신을 열어놓는 것, 즉 일단은 기존의 생각에서 풀려나는 것(마음 비우기)을 전제로 하며 이는 지식의 축적(마테시스)이 아니라 글읽기의 아스케시스(수련, 혹은 훈련)에 의해 배양됩니다. [본문으로]
- Alexander Bogdanov, “Socialism in the Present Day”. [본문으로]
- 같은 글. [본문으로]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판, 변형, 사유 (0) | 2018.05.12 |
---|---|
보그다노프, 노동자가 물려받은 예술 유산 (0) | 2017.10.12 |
보그다노프의 1911년 글 (0) | 2017.09.29 |
보그다노프, 객관성 (0) | 2017.07.29 |
푸꼬, 주체와 진실의 관계 (0) | 2017.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