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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예술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 로렌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We Need One Another)



D. H. 로렌스



우리는 인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공연히 반발하여 상처받은 후에, 반항하고 부루퉁해지기도 한 후에, 이 모든 것 후에는 수긍하고 마음을 푸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개인주의자들이다. 우리는 모두 이기주의자들이다. 우리는 모두 자유를 맹렬하게 믿는다. 어쨌든 우리의 자유를 믿는다. 우리는 모두 절대적이고자 하며 자신만으로 충분해지고자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우리의 자존심에 큰 타격이다. 우리는 여자들 중에 가볍게 한 사람을 고르고 선택하는 것을 개의치 않는다. 여자라면 남자들 중에서 그러는 것을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아이구, 나는 저 제어할 수 없는 나의 여자 없이는 살 수 없어!’라고 인정하는 못되고 뾰족한 놋쇠 압정으로 귀결되는 것, 이것은 우리의 고립된 자부심에 끔찍하게도 굴욕적인 것이다.


그러나 ‘나의 저 여자 없이는’이라고 말할 때 내가 애인을, 프랑스적 의미에서의 성적 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여성을, 여성 자체와 나의 관계를 의미한다. 특정 여성에 대한 관계가 없이 명랑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남자는 세상에 거의 없다. 물론 다른 남성이 여성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여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특정 남성과의 친밀한 관계가 없이 명랑하게 살아갈 수 있는 여성은 세상에 거의 없다. 물론 다른 여성이 남성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현재 우리의 사정이다. 3천년 동안 남성들과 여성들은 이 사실에 대항하여 투쟁해왔다. 특히 불교에서 남성은 여성을 훔쳐보기만 해도 최고의 열반에 도달할 수가 없다. “홀로 했도다!”가 열반에 도달하는 양반의 자부심 어린 주장이다. 그리고 영혼이 구함을 받은 기독교도도 “홀로 했도다!”라고 말한다. 불교와 기독교는 자신만만한 개인주의의 종교이다. 물론 이는 우리의 해로운 근대적 개인주의로 귀결한다. 이 세상에서 성사(聖事)로 인정받는 결혼은 죽음의 절대적 명령에 의해 해체된다. 천국에는 결혼 관계 속에 주고받음이 없다. 천국의 영혼은 지극히 개인적이며, 가장 높은 존재와의 관계 말고는 모든 관계로부터 방면되어 있다. 천국에는 결혼도 없고 사랑도 없으며, 우애도 부성도 모성도 형제자매도 없다. 완결된 고립의 상태에 있고 지고의 존재, 최상의 존재와의 완벽한 관계에 놓인 나만 있을 뿐이다.


우리가 천국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사실은 우리가 이 땅에서 가장 도달하고 싶은 것, 가장 되고 싶은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천국의 조건은 지금 열망하고 조건, 되고자 노력하는 조건이다.


이제 내가 여성이나 남성에게 “당신은 모든 관계로부터 순전히 자유롭고 싶습니까?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형제자매로부터, 남편, 애인, 친구 혹은 아이로부터? 이 모든 엮임들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지고의 권능, 최상의 존재하고만 연결된 순수한 자아로 환원되고 싶습니까?”라고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당신에게 묻건대, 대답이 무엇인가? 당신의 진지한 대답은 무엇인가?


나는 거의 모든 경우에 대답은 강한 ‘그렇다’이리라고 예상한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남성들이 ‘그렇다’라고 대답하고 대부분의 여성들은 ‘아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내 생각에 많은 남성들이 주저할 것이며 거의 모든 여성들은 주저 없이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현대 남성들은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지 않은 이 열반과도 같은 상태를 거의 획득해서 자신들이 어떤 존재이고 어디에 있는지를 궁금해하기 시작하고 있다. 당신의 거창한 독립성을 주장하고, 모든 인연과 ‘구속들’을 깨며 자신을 ‘순수한’ 개인성으로 환원하는 당신은 어떤 존재인가? 당신은 어떤 존재인가?


당신은 자신을 어떤 매우 거창한 존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치명적인 이기주의와 자만심 그리고 공허함에 빠지지 않고서 이러한 자립성에 근접이라도 할 수 있는 개인들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당신 자신의 독자적인 장점으로 환원되고 다른 사람과의 대부분의 활력적인 접촉으로부터 차단되었을 때, 진짜 위험은 당신이 그냥 아무 것도 아닌 존재나 다를 바 없이 된다는 점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어떤 개인을 그 혹은 그녀를 구성하는 요소들로 환원해보라. 그는, 그녀는 어떤 존재가 되는가? 극히 보잘 것 없는 존재이다! 예를 들어 나폴레옹을 비참한 섬에 혼자 있게 하면, 그는 어떤 존재가 되는가? 성마르고 철없는 조그만 친구가 된다. 메리 스튜어트를 흉측한 돌로 된 성의 감옥에 가두어 놓아 보아라. 그러면 그녀는 단지 고양이 같은 조그만 사람이 된다. 비록 쎄인트헬레나 섬에 가두어지면 그렇게 되지만, 나폴레옹은 성마르고 철없는 조그만 친구가 아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은 포더링게이(Fotheringay)나 그와 같은 지하감옥에 고립되어 있을 때에만 고양이 같은 조그만 사람이다. 이 거창한 고립, 이 초보적 자아들로의 환원은 가장 큰 사기이다. 그것은 공작의 실체에 접근하려고 공작으로부터 깃털을 다 뽑는 것과 같다. 공작의 깃털을 다 뽑으면 무엇이 남는가? 공작이 아니라 털이 다 뽑힌 새의 시체가 남는다.


우리와 우리의 거창한 개인주의의 경우에도 그렇다. 우리들 중 누구라도 단순한 개인으로 환원해버리면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는가? 나폴레옹은 성마르고 철없는 조그만 친구가 된다.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은 고양이 같은 조그만 사람이 된다. 성 싸이미언 스타일라이츠(St. Simeon Stylites)[각주:1]는 기둥 위에 꼼짝 않고 있을 때 우쭐한 미치광이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놀라운 존재들이지만, 쓰레기 같고 자만심 강한 조그만 현대적 이기주의자들이 된다. 오늘날 세계는 인간의 모든 훌륭한 유대를 깨고 우월성에 대한 주장을 자신들의 공허함과 무가치함에 입각시킨 어리석고 건방진 이기주의자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공허한 자들은 그 정체가 밝혀지고 있다. 상당한 소음을 내는 공허함은 짧은 시간 동안 기만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떤 사람을 분리시켜 그 자신의 순수하고 놀라운 개인성 속에 고립시킬 때 그 사람의 실체는 사라지고 황량한 찌꺼기만 남을 뿐이라는 사실은 남아있다. 나폴레옹을 고립시키면 그는 아무것도 아니다. 칸트를 고립시키면 그의 거창한 생각들은 그의 머릿속에서 여전히 계속 똑딱거리겠지만 그 생각을 써서 전달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살짝수염벌레[각주:2]의 소리나 다름이 없게 될 것이다. 심지어 부처를 예로 들어도 그렇다. 만일 그가 어떤 외딴 곳으로 휙 가서 보리수 아래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고 아무도 그를 보거나 그의 열반 설법을 듣지 못했다면, 그렇다면 내 생각에 그가 열반으로부터 많은 재미를 끌어낼 수 없었을 것이며 그는 그냥 괴짜가 되었을 것이다. 절대적인 고립의 상태에서 그 어떤 개인이 대단한 존재가 될까. 혹은 그 어떤 영혼이 구원하거나 심지어는 가질 가치가 있게 될까.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각주:3] 그러나 들어올려질 다른 사람들이 없다면, 쇼 전체가 실패일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은, 모든 개별성 자체는 관계에 의존한다. “신은 나 없이는 살 수 없다”라고 18세기의 한 프랑스인은 말했다. 그가 의미한 것은, 인간이 없다면,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은, 인간의 신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리라는 것이다. 맞다. 인간이 없다면 예수는 무의미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쎄인트헬레나의 나폴레옹은 무의미해졌으며, 프랑스라는 나라는 그 군대 및 나라와 연관된 나폴레옹이 없어서 그 의미의 큰 부분을 잃었다. 큰 힘이 나폴레옹으로부터 흘러나왔으며 다시 그에 응하여 프랑스 국민으로부터 나폴레옹에게로 큰 흐름이 흘러갔다. 여기에 그와 프랑스 국민의 위대함이 놓여있었다. 그 관계 속에 말이다. 빛은 회로가 완성될 때에만 빛난다. 흐름의 반으로는 빛이 빛나지 않는다. 모든 빛은 일종의 완성된 회로이다. 모든 삶도 그렇다. 만일 진정한 삶이 되려는 것이려면 말이다.


우리의 개별성은 바로 관계 속에 존재한다. 이 중요하고도 가시가 있는 사실을 삼켜보자.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와 떨어져서는 개인들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거의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 다른 삶들, 다른 현상들 사이의 살아있는 접촉 속에서 우리는 움직이고 존재한다. 이 접촉들을 제거하고 살아있는 땅 및 태양과의 접촉을 제거해 보아라. 그러면 우리는 공허로 찬 공기주머니처럼 된다. 우리의 개별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섬에 홀로 있는 종달새는 노래도 안 부르고 의미도 상실할 것이다. 그의 개별성은 풀밭의 쥐처럼 이리저리 달아나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암종달새가 그와 함께 있다면 그는 하늘로 날아오르며 노래할 것이고 그의 진정한 개별성을 회복해줄 것이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개별성은 그리고 타자와 뚜렷이 구분되는 존재성은 바로 서로에 대한 관계 속에 존재한다. 접촉의 바깥에서가 아니라 접촉 속에. 당신이 원한다면 이것을 성(sex)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풀밭에 비치는 햇빛이 성이 아니라면 그것 또한 성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접촉, 주고받음의 관계이다. 남자들과 여자들 사이의. 남자와 여자 사이의, 위대하고도 미묘한 관계이다. 여기에서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개인들이 된다. 그것이 없다면, 진정한 접촉이 없다면 우리는 정도 차이만 조금 있을 뿐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남아있다.


그러나 물론 이 접촉을 살아있게 하고 고정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여자와 결혼하고 그걸로 끝내자’의 문제가 아니다. ‘여자와 결혼하고 그걸로 끝내자’는 접촉을 회피하고 접촉을 죽이는 어리석은 처방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진정한 접촉의 모든 가능성을 죽이는 많은 대중적인 회피법들이 있다. 예를 들어 여성을 주춧대 위에 입상처럼 세워 놓거나 아니면 반대로 눈에 띄지 않게 하는 것, 혹은 ‘모범’ 주부로 만들거나, ‘모범’ 어머니로 만들거나 ‘모범’ 내조자로 만드는 것 등이다. 이것들은 모두 여성과의 접촉을 회피하는 장치들일 뿐이다. 여성은 ‘모범적인’ 어떤 존재가 아니다. 여성들은 심지어 뚜렷하고 확연한 인격들도 아니다. 이러한 고정된 생각들을 제거할 때이다. 여성은 그 물보라가 자신의 주위에, 가까이 오는 모든 이에게 뿌려지는 살아있는 분수이다. 여성은 대기 중의 기묘한 부드러운 떨림으로서,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발하여 응답하는 떨림을 찾는다. 아니면 여성은 귀에 거슬리는 불협화음의 고통스런 떨림으로서 발하여 사정거리 내에 있는 모든 사람을 해친다. 남성도 마찬가지이다. 살고 움직이고 존재를 갖는 남성은 삶의 떨림의 분수로서 그의 흐름을 받아들여 되돌려줄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향하여 진동하며 흘러간다. 그리하여 회로가 완성되고 그러면 일종의 평화가 찾아온다. 아니면 그는 노여움, 불협화음, 고통의 원천이 되어서 근처의 모든 사람을 해친다.


그러나 우리가 건강하고 긍정적인 상태로 남아있는 동안 우리는 내내 다른 사람들과 진정한 관계를 맺게 되기를 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관계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우리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의도적으로 해서는 많은 것을 할 수가 없다. 깨뜨리는 경우 말고는 그러한데, 일반적으로 깨뜨리는 것은 어렵지가 않다. 긍정적인 측면에서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것이 일어나도록 놔둘 수 있을 뿐이다. 방해하지도 않고 강요하지도 않으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잘못된 생각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다. 여러 세기 동안 남성은 정복자 영웅이었고, 여성은 단지 그의 활의 줄이었다. 그의 장비의 일부였다. 그 다음에 여성은 자신의 영혼을, 단독의 영혼을 갖도록 허용받았다. 그렇게 단독화가 시작되었고, 자유와 독립의 아우성 소리가 울렸다. 이제 자유와 독립이 다소 지나쳐서 아무 것도 아닌 공허한 곳으로, 모든 우리의 죽은 감정들과 쓸모없는 환상들의 쓰레기더미에 이르렀다.


정복자 영웅 같은 것은 이제 힌덴부르크 원수[각주:4] 만큼이나 노후한 것이 되었고 그러면서도 거의 마찬가지로 효과적이다. 이 묘기를 부활시키려는 시도들이 세상에 나타나고 있으며 보통은 결국 어리석은 것이 된다. 남성은 더 이상 정복자 영웅이 아니다. 우주 속에 고립되어 홀로 있으며 죽음의 영원 속에 있는 미지의 것을 바라보는 지고의 영혼도 아니다. 이 묘기 또한 거의 진부해졌다. 비록 오늘날의 애처로운 청년들이, 특히 지난 전쟁 동안의 괴로움에서 생긴 이기적인 비애감을 온몸에 둘둘 감고 있는 애처로운 청년들이 계속 강조하고 있기는 하지만.


두 묘기는 모두 진부해졌다. 정복자 영웅도, 괴로움에 싸여 영혼의 마지막 고립 속에서 ‘영원’을 보는 애처로운 영웅도. 물론 두 번째 묘기가 오늘날 더 인기가 많으며, 더 젊은 세대에 속하는 자기연민에 빠진 진부한 청년들에게는 여전히 위험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죽은 묘기, 끝난 묘기이다.


오늘날 남성이 해야 할 일은, 적어도 이 모든 고정된 생각들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어떤 사람도 고정된 객체로서는, 심지어 개인이나 인격으로서는, 대단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 위대한 ‘나는 스스로 존재한다’[각주:5]는 인간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니 그냥 놔두는 게 좋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누군가가 위대한 ‘나는 스스로 존재한다’가 되면 그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모든 이는 흐름이며 흐르는 삶이다. 그리고 서로가 없이는 우리는 흐를 수 없다. 마치 강이 둑이 없으면 흐를 수 없듯이 말이다. 여성은 나의 삶(의 활력)의 강의 한 쪽 둑이요, 세상이 다른 쪽 둑이다. 두 강변이 없다면 나의 삶은 늪이 될 것이다. 나를 삶(의 활력)의 강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여성과의, 그리고 나의 동료인간들과의 관계이다.


그리고 나에게 영혼을 주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다른 인간과 활력적인 관계를 가져본 적이 없는 남성은 정말로 영혼을 가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칸트가 영혼을 가졌다고 느낄 수 없다. 영혼은 나의 접촉들에서, 내가 사랑했거나 증오했거나 진실로 알았던 사람들과의 살아있는 접촉 속에서 형성되고 스스로를 이루는 어떤 것이다. 나는 나의 영혼으로 이르는 단서를 가지고 태어난다. 나는 나의 영혼의 온전성(wholeness)을 이루어야 한다. 내가 영혼으로서 의미하는 바는 나의 온전성이다. 오늘날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온전성 혹은 빠진 것 없이 완결됨―이는 곧 평화이다―에 대한 감각의 결여이다. 우리가 결여하고 있는 것, 젊은이들이 결여하고 있는 것은 ‘자신 속에서 온전함’에 대한 감각이다. 그들은 단편적인 존재처럼 느껴서 평화롭지 않다. 평화로써 나는 타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활력이 강처럼 한껏 흐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온전하지 않기 때문에 평화를 결여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맺게 될지 모르는 활력적인 관계들의 일부만을 알아왔기 때문에 온전하지 않다. 우리는 관계들의 제거를 가치있다고 믿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양파의 껍질처럼 제거하라. 순수한 혹은 텅 빈 무(無)에 도달할 때까지. 공허.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달한 곳이다. 그들 자신의 완벽한 공허에 대한 지식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되기를 너무 끔찍하게 원해서 아무 것도 아닌 존재, 혹은 거의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


거의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은 그다지 재미없다. 삶은 재미있어야 한다. 가장 재미있어야 한다. 단순히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좋은 시간을 갖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되는 것에서 오는 진정한 재미이다. 인간에게 가능한 두 가지 위대한 관계가 있다. 남성의 여성에 대한 관계와 남성의 남성에 대한 관계이다.[각주:6] 양자에 관하여 우리는 절망적으로 엉망인 상태에 있다.


그러나 남성의 여성에 대한 관계가 실제적인 인간의 삶에서 중심적인 사실이다. 그 다음으로 남성의 남성에 대한 관계가 온다. 그리고 훌쩍 뒤에 떨어져서 모든 다른 관계들이 온다. 부성, 모성, 형제, 자매, 친구.


일전에 한 젊은 친구가 나에게 다소 비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성에 의해 영국이 갱생된다고 믿을 수 없을 것 같군요.” 나는 대답했다. “확실히 당신은 그럴 것 같소.” 그는 나에게 자신이 성과 같은 쓰레기가 범접하지 못하는 곳, 여성들과 같은 진부한 존재가 범접하지 못하는 곳에 있음을 알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흔한, 활력이 평균 이하이고 공허하며 이기적인 젊은이였다. 두른 것을 풀면 부스러질 일종의 미라처럼 자신 속에 무한하게 감싸여있는.


그리고 성이란 결국 남성의 여성에 대한, 여성의 남성에 대한 관계의 상징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남성의 여성에 대한 관계는 모든 삶만큼이나 넓다. 그 관계는, 상이하고 심지어 반대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 두 존재 사이의 무한하게 상이한 흐름들로 구성된다. 순결 또한 육체적 열정에 관하여 남성과 여성 사이에 흐르는 흐름의 일부이다. 이것들 너머에 우리가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무한한 범위의 미묘한 소통이 존재한다. 내 생각으로 어떤 어엿하게 결혼한 두 사람의 관계는 몇 년마다 심오하게 변한다. 종종은 두 사람이 그것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채. 모든 변화는 비록 그것이 기쁨을 가져올지라도 고통을 유발한다. 결혼이라는 긴 과정은 영속적인 변화를 동반하는 긴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남성과 여성은 서로 자신들의 영혼을 구축하며 자신들을 온전하게 만든다. 이는 항상 미지의 새로운 곳을 통해 흘러가는 강들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어리석고 우리의 제한된 생각들에 의해 고정되어 있다. 어떤 남성이 말한다. “나는 나의 아내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 나는 더 이상 그녀와 자고 싶지 않아.” 그러나 왜 항상 그녀와 자고 싶어야 하는가? 다른 미묘하고도 활력적인 교류가 그와 그녀 사이에 진행되어 더 이상 그가 그녀와 자고 싶지 않아 하는 이 시기에 그들 모두를 온전하게 할지 어떻게 그가 아는가? 그리고 그녀도 모든 것이 끝났다고,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한다고, 이혼을 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며 말하는 대신에 잠깐 멈추어서 그녀의 영혼 속에 있는 새로운 리듬을 듣고 남성에게서 새로운 움직임을 왜 찾지 않는가? 모든 변화와 함께 새로운 존재가 발생하고 새로운 리듬이 수립된다. 우리는 늙어가면서 우리의 삶을 갱신한다. 그리고 진정한 평화가 존재한다. 왜, 왜 우리는 서로가 항상 동일하기를, 변하지 않는 메뉴표처럼 고정되어 있기를 원하는가?


우리가 더 분별력이 있기만 하다면. 그러나 우리는 성, 돈, 어떤 사람이 “해야” 할 일 등등의 몇 가지 고정된 생각들에 잡혀있다. 그리고 우리는 삶의 전체를 놓친다. 성은 변하는 것이며 때로는 살아있고 때로는 조용하며 때로는 불같고 때로는 겉으로 보기에 정말 없어진 듯, 사라진 듯하다. 그러나 보통의 남성과 여성은 성을 그 모든 변화 속에서 받아들일 적극성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조야하고 조악한 성욕을 요구한다. 항상 요구한다. 그게 나오지 않으면 쇼 전체를 후려쳐버린다. 이혼! 이혼! [각주:7]


인류가 야만인들의 상태로 돌아가기를 내가 원한다는 말을 듣는 것에 나는 넌더리가 난다. 마치 현대의 도시 사람들이 남성과 여성의 관계로 말한다면 대체로 가장 조야하고 야비하며 가장 조악하게 야만적인 원숭이들이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우리의 뽐내는 문명에서 내가 보는 것은 오직 남성들과 여성들이 서로를 정서적이고 심리적으로 분쇄하는 것뿐이며 내가 청하는 것은 오직 멈추어서 생각해 보라는 것뿐이다.


나에게 성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의 전체를 의미한다. 이제 이 관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 우리는 몇 개의 조야한 형태들―정부, 아내, 어머니, 애인―만을 안다. 여성은 이러저러한 역할을 행하도록 항상 강요받는 우상이나 꼭두각시와 같다. 애인, 정부, 아내, 어머니. 우리가 이런 고정성을 깰 수만 있다면. 그리고 진정한 여성의 파악할 수 없는 질(quality)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여성은 흐름이며 남성의 삶(의 활력)의 강과는 매우 상이한 삶(의 활력)의 강이라는 것을, 모든 강은 그 경계를 깨지는 않아도 자기 나름으로 흘러야 한다는 것을, 남성의 여성에 대한 관계는 두 강이 때로는 섞이지만 다시 갈라지면서 계속 여행하는, 나란한 흐름이라는 것을. 관계는 평생의 변화이며 평생의 여행이다. 그것이 성이다. 때로 성욕 자체가 완전히 떠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관계의 거대한 흐름은 죽지 않고 계속 진행된다. 이것이 평생 계속되는 살아있는 성의 흐름,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이다. 성욕은 이 중에서 단지 하나의 생생한, 가장 생생한 발현일 뿐이다. ♠


 


  1. Saint Simeon Stylites or Symeon the Stylite (c. 390 – 2 September 459) was a Christian ascetic saint who achieved fame because he lived for 37 years on a small platform on top of a pillar near Aleppo in Syria. Several other stylites later followed his model (the Greek word style means pillar). He is known formally as Saint Simeon Stylites the Elder to distinguish him from Simeon Stylites the Younger and Simeon Stylites III. (from Wikipedia) [본문으로]
  2. 곤충으로서 그 소리를 죽음의 전조로 믿었다. [본문으로]
  3. 「요한복음」 12장 32절 (개역개정판 번역) [본문으로]
  4. Paul Ludwig Hans Anton von Beneckendorff und von Hindenburg, known universally as Paul von Hindenburg (2 October 1847 – 2 August 1934) was a German field marshal(육군 원수) and statesman. 그가 1차대전(1914)에 재소집되었을 때 나이가 66세였다. 1932년 선거에서 84살의 그는 히틀러와 경쟁할 수 있는 유일한 후보였다. [본문으로]
  5. ‘나는 스스로 존재한다’(I AM)는 원래 스스로 실존하는 야훼를 지칭하는 말이다. ‘I am who I am’(ego sum qui sum)이 줄어든 형태이다. 「창세기」 3장 14절 : “God said to Moses: I am the eternal God. So tell them that the LORD, whose name is "I Am," has sent you. This is my name forever, and it is the name that people must use from now on.” [본문으로]
  6. 여성의 여성에 대한 관계가 여기서 누락되었다고 해서 로렌스를 남성주의자로 보면 곤란하다. 「토머스 하디 연구」에서 로렌스는 여성운동을 가장 용감한 운동 중 하나로 보며, 다만 만일 그것이 법적 권리를 위한 투쟁에 그친다면 한계를 갖는다고 지적할 뿐이다. [본문으로]
  7. 이 대목에서 로렌스를 이혼반대주의자, 즉 결혼을 무조건 깨져서는 신성한 것으로 보는 사람으로 오해하면 안된다. 로렌스는 여기서 평균적인 사람들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로렌스 자신은 이미 결혼을 한 연상의 여성 프리다(Freeda Weekly)와 도망쳤으며 나중에 프리다가 이혼을 얻어내고 나서 둘은 결혼하였다. 로렌스가 말하는 핵심은 남성과 여성이 살아있는 관계를 맺는 것이며, 그것이 결혼이라는 틀의 안에서냐 바깥에서냐는 조건의 문제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