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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들뢰즈·가따리에서 기계에 관한 대목들


 
들뢰즈·가따리에서 기계에 관한 대목들


from Chaosmosis by Guattari


“여기서 우리는 기계주의(machinism)를 기계론(mechanism)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기계주의는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이중적 과정 즉 자기창조적=창조적 과정과 윤리적-존재론적 과정(‘선택물’의 실존)을 함축한다. 이는 기계론에는 전적으로 생소한 것이다. 바로 이로 인하여 엄청난 기계적 상호연관성―이는 세상이 오늘날 일관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이다―은 스스로 생겨났다는 자기토대적 입장에 있게 된다. 존재가 기계적 본질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이 존재의 이질적 생성에 선행하는 것이다.”(「미적 패러다임」, 108)


▣ 기계

“우리는 기술공학적 기계만을 참조하는 데서 벗어나서 그것이 비물질적 참조 우주들(incorporeal Universes of Reference)에 인접하게 위치하도록 기계의 개념을 확대해야 한다.” (「주체성의 생산에 관하여」, 31)


기계와 구조의 차이 (“Machinic heterogenesis” 37)


기계

구조

자기창조(auto-poietic)이다.

피드백 고리를 가진다. 영원한 회귀의 방식에 의한 총체화를 작동시킨다.

폐지에 대한 욕망. 죽음의 위협.

영원에 대한 욕망.

타자성(alterity)의 차원을 가진다.

유사형상성(homeomorphism)의 원리에 기반을 둔다.

비평형(disequilibrum)에 기반을 둔다.

평형(equilibrum)에 기반을 둔다.

항상 외부 요소들에 의존한다.

 

비인간적 언표(a "non-human" enunciation)이며 원-주체적 다이어그램(a proto-subjective diagram)이다.

 



from "Orality"


◆ 라깡은 그의 ‘대상 a’(object small a) 이론을 통하여 욕망대상이라는 개념을 탈영토화하였다. 프로이트를 따르는 사람들이 귀속시켰던 곳으로부터 욕망을 끌고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는 프로이트적 결정론과의 결별의 귀결을 깨닫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가 처음 도입한 ”욕망하는 기계“를 잠재성의 비물질적 영역에 위치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95)


◆ 탈영토화된 자본주의적 <배치들>은 초기의 영토화된 <배치들>과 마찬가지로 확연한 역사 시기를 잘 구성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충동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중국 제국들의 심장부에서 발견되며 그 다음에는 고전 고대 전체에 걸쳐서 발견된다.) 세 번째 유형의 과정적 <배치>는 그 경계를 짓기가 훨씬 더 어렵다. 여기서는 오늘날 발현하는 흔적들과 징후들로부터 전망하는 식으로 제시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배치>는 미적 패러다임을 주변으로 밀어내기보다는 그것에 다른 가치의 <우주들>과 관련한 가로지르기의 핵심적 지위를 부여한다. 이로부터 이 배치는 자기 나름으로 자기창조적 공재의 창조적 핵을 강화한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가치의 <우주들>의 자립화와 사막(砂漠)화의 종말은 초기 <배치들>의 영토화된 집합체로 돌아가는 것과 동의어가 아니다. 환원주의적 초월의 체제로부터 물러나는 것이 무한한 운동이 유한한 양상 속에 재영토화되는 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다양한 가치의 <우주들>이 일반적으로 (그리고 상대적으로) 미적 대상으로 되는 것은 주체화의 표현적 양상들에 다른 유형으로 마법에 거는 데로 이른다. 마술, 신비, 그리고 악마적인 것은 이제 더 이상 예전처럼 동일한 토템적 아우라에서 발산하지는 않을 것이다. 실존적 <영토들>은 다양화되며 이질화된다. 사건은 더 이상 신화에 갇히지 않는다. 과정적 연계의 핵이 되는 것이다. (106) ① 기존의 경계들(이는 르네쌍스에 이미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현대에 존재한다)에 예술의 운동이 끊임없이 부딪치는 것, ② 표현소재들을 갱신하는 예술의 성향, ③ 예술이 증진하는 퍼쎕트(percept)[각주:1]와 어펙트(affect)[각주:2]섞임에는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종류의 신체들에 영향을 미치는 끌림과 밀어냄, 공감과 반감, 교체, 융합, 침입, 확대가 포함된다. 신체들의 의무적, 필연적 혹운 허용된 섞임을 조정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음식(영양)체제와 성적 체제이다.


▣ 추상기계와 고유명사

추상기계는 항상 특이하여 집단이나 개인의 고유명사에 의하여 지칭된다. 언표의 배치는 개인에게서나 집단에서나 항상 집단적이다. 레닌의 추상기계와 볼세비끼의 집단적 배치....문학이나 음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개인적인 것의 우선성은 없다. 그 대신에 특이한 <추상태>와 집단적 <구체태>의 분리불가능성(indissolubility)이 있을 뿐이다. 배치가 추상기계와 별도로 기능하지 않듯이 추상기계도 배치와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 연속적 변이 속에서는 표현의 형식과 내용의 형식 사이의 구분이 적절하지 않으며 상호전제하는 두 분리불가능한 평면들의 구분만이 적절하다. 이 구분의 상대성은 공재의 평면 위에서 온전하게 실현되는데, 여기서 배치는 이제 절대적 탈영토화에 휩쓸린다. 그러나 절대적이라는 말은 차이생성의 부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차이들―이제는 “무한히 작은 것들”―이 단일한 물질 속에 구성되어 비신체적 힘으로서 표현에도 봉사하고 한계 없는 신체성(corporeality)으로서 내용에도 봉사한다. 내용과 표현의 변수들 사이의 상호전제하는 관계는 이제 더 이상 각각 별도의 형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변수를 변이시키기가 두 형식을 서로 끌어 모아서 양쪽의 탈영토화의 점들의 결합을 이루어낸다. 이는 해방된 단일한 물질의 평면 위에서 일어나는데, 이 물질은 형상을 포함하지 않으며 의도적으로 비(非)형식화되어 있고 내용과 표현에 있어서 오직 [탈영토화의] 점들과 텐서들과 텐션들을 가질 뿐이다. 제스처들과 사물들, 목소리들, 소리들은 동일한 “오페라”에 사로잡히며, 더듬거림, 비브라토, 트레몰로와 흘러넘침이 번갈아 나타나는 효과에 휩쓸린다. 씬세싸이저는 모든 매개변수들을 연속적으로 변이하게 하며, 점진적으로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요소들로 하여금 어떤 식으로든 서로 다른 것으로 전화하도록 한다.” 이 결합이 일어나는 순간 공통의 물질이 존재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만 우리는 추상기계 혹은 배치의 다이어그램에 도달한다.


11장 「1837년 : 리토르넬로에 관하여」에서


▣ 공재는 필연적으로 이질적으로 다양한 요소들 사이에 일어난다. 차이생성의 탄생이어서가 아니라, 이전에는 공존하거나 순차적으로 뒤를 잇는데 만족했던 이질적 요소들이 공존과 순차적 연속의 ‘공고화’를 통하여 서로 긴밀하게 결합되기 때문이다. 간격들, 삽입들, 그리고 구성적 동기들과 대위점들의 마디결합은 (이들은 표현의 등급에 속하는 부류이다) 다른 등급의 성질들을 혹은 동일한 등급이지만 성이 다르거나 종이 다른 부류의 성질들을 감싼다. 색이 소리에 반응하게 된다. 만일 어떤 성질이 동기들과 대위점들을 가졌다면, 만일 일정한 순서로 리듬적 성격들과 멜로디적 풍경들이 존재한다면, 그렇다면 부류들, 종들, 이질적 성질들을 한데 묶는 진실한 기계적 오페라(machinic opera)의 구성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우리가 ‘기계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이질적인 것들의 종합 그 자체이다. 이질적으로 다양한 요소들이 표현물들인 한에서 우리는 그들의 종합 그 자체, 그들의 공재가 본격적으로 기계적인 “진술” 혹은 “언표”를 형성한다고 말한다. 동일한 종들에서, 그리고 상이한 종들에서 색, 소리, 몸짓, 움직임, 위치 등이 맺게 되는 가변적 관계들은 모두가 다 기계적 언표들인 것이다.


영토적 배치가 (자연적 조건에서든, 인위적 조건에서든) 그것을 탈영토화하는 움직임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기계가 시동되었다(se déclenche)고 말한다. 이것이 우리가 제안하고픈 기계배치의 개념상의 차이이다. 기계는 탈영토화를 겪는 배치에 삽입되어 배치의 변이와 변전(變轉)을 그리는 일단의 점들과 같다. 기계론적(mécanique, mechanical) 효과란 없다. 효과들은 항상 기계적(machinique, machinic)이다. 즉 배치에 플러그인되고 탈영토화를 통해서 시동되는 기계에 의존한다. 우리가 기계적 진술이라고 부르는 것은 공재를 정의하거나 표현의 물질들에 진입하는 기계적 효과들이다. 이런 종류의 효과들은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결코 상징적이거나 상상적이지는 않다. 항상 이행 혹은 연계(relay)의 실재적 가치를 갖는다.


 

▣. 기계가 하는 일

① 일반적으로 기계는 어떤 종류의 영토적 배치에 플러그인되어 그것을 다른 배치들을 향해 열고 그 종(種)의 사이배치들을 통과하게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새의 영토적 배치가 구애 혹은 군집의 사이배치들로 열려서 짝 혹은 ‘사회체’(socius)의 방향으로 움직인다. .

② 기계는 영토적 배치를 종간 배치들을 향해 열 수도 있다. 다른 새들의 노래들을 채택하는 새들, 기생관계.

③ 모든 배치들을 넘어서 <우주>를 향해 열 수도 있다.

④ 반대로, 탈영토화된 배치를 다른 것을 향해 열지 못하고 봉쇄의 효과를 산출할 수도 있다. 마치 집성체가 일종의 블랙홀로 떨어져 계속 돌고 있는 것처럼. 이는 때이르거나 극히 갑작스런 탈영토화의 조건에서, 그리고 종내의, 종간의, 우주로 향하는 경로들이 봉쇄될 때 일어난다. 이때 기계는 원 모양으로 도는 ‘개별적인’ 집단효과들을 산출한다. 예) 너무 일찍 고립된 되새(chaffinch)는 그 노래가 궁핍화되고 단순화되어 자신들이 갇힌 블랙홀들의 반향만을 표현한다.

▶ 블랙홀 기능은 금지의 현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높일 수 있고 너무 협소한 금지자-시동자(inhibitor-releaser)라는 이원론와 결별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기능을 다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앞에서 사이배치가 블랙홀로 이끄는 빈곤화와 고착화의 선들을 포함할 수 있으나, 여전히 탈영토화의 더 풍부하고 긍정적인 선으로 이끌 수 있음을 보았다(오스트레일리아 풀푸리새들‘grass finch’에서 풀줄기가 블랙홀로 빠지지만 ‘리토르넬로’ 요소가 되는 사례[각주:3]. 이렇듯 블랙홀은 배치 속의 기계 효과이며 다른 효과들과 복잡한 관계를 가진다.

① 혁신적 과정들의 시동을 위해서는 그 과정들이 우선 블랙홀에 빠지는 것이 필요할 수 있다. 금지로 인한 울혈(stases)이 교차로 행위(crossroads[각주:4] behaviors)의 시동과 결합된다.

② 반면에, 블랙홀들이 서로 공명할 때 혹은 금지들이 서로 연결되어 반향할 때에는 공재로의 열림이 일어나지 않고 배치의 봉쇄가 일어난다. 진공 속에 탈영토화되는 것과 같다. 되새의 예. 기계들은 항상, 배치를, 영토를 열거나 닫는 특이한 열쇠들이다. 더욱이 기계가 일정한 영토적 배치 속에서 작동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기계는 표현물질들의 출현에 이미 작동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배치의 구성과 배치를 처음부터 분주하게 가로지르는 탈영토화의 벡터들에 이미 작동하고 있다.


▣ 분자화되고 무언가 우주적인 것에 열리기 위해서 미시물질은 충분히 탈영토화되어야 한다. 통계학적 더미가 되어서는 안된다. 비획일적인 미시물질에 어떤 단순성이 있어야만 이 조건이 충족된다. 다시 말해서 이종적 요소들 및 매개변수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계산된 소박함(sobriety)의 최대치가 필요하다. 배치들의 소박함이 <기계>의 효과들의 풍성함에 기여하는 것이다.

▶ 사람들은 종종 아이들, 광인, 소음에 지나치게 재영토화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된다면, 이는 퍼지한 집성체를 공재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탈영토화된 미시물질에 우주의 힘을 담는 것이 아니고, 퍼지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클레의 그림들의 ‘어린아이 같음’에 대해서 사람들이 말할 때 클레가 강하게 화를 내는 이유이며, 음향효과 등에 대해서 사람들이 말할 때 바레스가 화를 내는 이유이다.

▶ 클레에 따르면, “보이게 하기” 위해서 혹은 <우주>의 힘을 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대상에 대한 하나의 생각을 동반하는 순수하고도 단순한 선이다.[각주:5] 선들을 증식시키고 대상 전체를 취하면 뒤범벅만을, 가시적 음향효과만을 얻는다.

▶ 바레스에 따르면, 투사(projection)가 고도로 복합적인 형식을 낳으려면, 우주적 분포를 얻으려면 필요한 것은 움직이는 단순한 형상이며 그 자체로 움직이는 평면이다. 그렇지 않으면 음향효과를 얻는다.

▶ 소박함!! 소박함!!  이것이 물질의 탈영토화의 전제조건, 미시물질의 분자화의 전제조건, 힘들의 우주화의 전제조건이다. 어린아이는 이것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이야기되는 소박함은 어린아이-되기(devenir-enfant)의 소박함이지 반드시 어린 아이 되기(devenir de enfant)인 것은 아니다. 광인되기도 반드시 광인의 되기인 것은 아니며 그 반대이다.


생성은 기계와 같다. 모든 배치 속에 상이한 방식으로 현존하며, 하나의 배치에서 다른 배치로 이행하고, 하나의 배치를 다른 배치로 열며, 모든 결정된 순차적 연속의 고정된 질서의 외부에 있다.


▣ 우리가 보여주어야 할 것은 음악가에게 첫째 유형의 리토르넬로 즉 영토와 배치의 리토르넬로가 있어야 하며, 그 다음에 이것을 안으로부터 변형하고 탈영토화하여 둘째 유형의 리토르넬로, 즉 음 기계의 우주적 리토르넬로를 음악의 최종 목적으로서 산출한다는 점이다.


13장 「70000 BC.: 포획의 장치」에서


▣ 종속과 기계화의 공존―불변자본의 비중이 커진 자본주의[각주:6]

자본주의는 탈코드화된 흐름의 공리체계를 구성함에 의한 주체화(subjectification)라는 전세계적 기획으로 생겨난다. 주체화의 상관물인 사회적 종속은 공리체계 자체보다는 그 실현모델 속에서 훨씬 더 많이 나타난다. 주체화의 과정과 그에 상응하는 종속이 발현되는 것은 민족국가 혹은 민족적 주체의 틀 내에서이다. 국가를 실현모델로 하는 공리체계 자체는 기계적 노예화의 전체 체계를 새로운, 이제는 기술적인 형태로 복원하거나 재창안한다. [고대의] 제국기계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제 초월적인 형식적 ‘통일성’(formal Unity)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공리체계의 내재성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종속된 노동자나 사용자들 대신에, 인간이 구성요소가 되는 기계를 재창안한다. 동력기계가 기술적 기계의 두 번째 단계였다면 인공두뇌적, 정보적 기계는 세 번째 단계를 구성한다. 이 단계는 일반화된 종속의 체제를 재구성한다. 회귀적이고 가역적인 ‘인간-기계 체제’가 옛날에 속하는, 두 요소 사이의 비반복적이고 비가역적인 종속관계를 대체한다. 인단과 기계의 관계는 사용이나 행동이 아니라 내적인 상호소통에 기반을 둔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에서 가변자본은 노동자의 종속(인간적 잉여가치)의 체제를 정의하는데, 그 주요한 틀은 사업 혹은 공장이다. 그러나 자동화와 함께 불변자본의 비율이 점차로 증가한다. 이 때 우리는 새로운 종류의 노예화를 본다. 동시에 노동체제가 변하고 잉여가치는 기계적(machinic)이 되며 그 틀은 전 사회로 확대된다. 소량의 주체화가 기계적 노예화로부터 벗어나게 했지만 다량의 주체화가 다시 그리로 되돌린다고 말할 수도 있다.

   최근에 관심이 집중된 것: 현대적 권력은 ‘억압이냐 이데올로기냐’라는 고전적 이분법으로 환원될 수 없고 표준화, 조정, 모델화 및 정보의 과정을 함축한다. 이 과정은 언어, 인식, 욕망, 운동 등에 관련하며 미시적 배치를 통하여 움직인다. 

  기계적 노예화에서는 정보의 변형들과 교환들밖에는 없다. 이중 일부는 기계론적(mechanical)이며, 다른 일부는 인간적이다. 물론 ‘종속’이라는 말은 민족적 측면에 국한되고, 노예화는 국제적이고 세계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정보테크놀로지 또한 인간-기계 체제로 스스로를 정립하는 ‘국가들’의 재산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이런 일은 (→ 459) 공리체계 및 실현모델들이 항상 서로 침투하고 서로 소통하는 정도로만 일어난다. 사회적 종속은 실현모델에 비례하며, 기계적 노예화는 공리체계의 차원에 부합한다. 우리는 동일한 사물 동일한 사건에 관하여 두 가지를 동시에 겪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 따라서 종속과 노예화는 단계라기보다는 공존하는 두 개의 극을 구성한다. (459)

『천 개의 고원』 결론 부분 [추상 기계](다이어그램과 파일럼)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의미에서의, 초월적이고 보편적이며 영원한  추상 기계 혹은 기계들(abstract machine, or machines)이란 없다. 추상 기계는 구체적 배치([불어] agencement) 안에서 작동한다. 그것은 배치의 네 가지 측면에 의하여 바꾸어 말하면 탈코드화와 탈영토화의 점들에 의하여 정의된다. 그것이 이 점들을 만든다. 따라서 추상 기계들은 영토적 배치를 다른 어떤 것으로, 다른 유형의 즉 분자적이고 우주적인 배치들로 열어 놓는다. 추상 기계들이 생성을 구성한다. 따라서 추상 기계들은 항상 특이하고 내재적이다. 지층들(strata)과는 달리 그리고 다른 측면에서 본 배치들과는 달리 추상 기계들은 형식과 물질을 알지 못한다. 이것이 그것들을 추상적으로 만드는 것이고 또한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계를 정의하는 것이다. 추상 기계들은 그 어떤 종류의 기계학(역학, mechanics)도 넘어서 있다. 추상 기계들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추상적인 것과 대립된다. 추상 기계들은 형성되지 않은 물질(unformed matters)과 무형식적 기능들(nonformal functions)로 구성된다. 모든 추상 기계는 물질-기능(파일럼phymun과 다이어그램)의 공고화된 집합이다. 이는 테크놀로지의 “평면”(plane)에서 명백하다. 그러한 평면은 단순히 형성된 물질들(알루미늄, 플라스틱, 전선 등)로 혹은 조직화하는 형식들(프로그램, 원형 등)로 구성되지 않는다. 강도intensity(저항, 전도성, 가열, 신장, 속도 혹은 지체, 유도, 변환)의 정도만을 표시하는 형성되지 않은 물질과 미분방정식만을 혹은 더 일반적으로는 “텐서”(tensor)만을 표시하는 다이어그램적 기능들의 복합체로 구성된다. 물론 배치의 차원들 내에서는 추상 기계 혹은 기계들이 형식과 물질로, 다양한 자유의 상태들로 발효된다. 그러나 추상 기계는 우선 그 자신을 구성해야 하며 동시에 공재의 평면(plane of consistency)을 구성해 가지고 있어야 한다. 추상적이고, 특이하며, 창조적이고, 지금 여기에 있으며, 실재적이지만 구체적이지는 않고, 현실적이지만 발효되지는 않은 것(actual yet noneffectuated)―이것이 바로 추상 기계들에 날짜와 이름이 붙여진 이유다(아인슈타인 추상 기계, 웨번 추상 기계, 갈릴레오 추상 기계, 바하, 베토벤 등등).  그것들이 사람이나 혹은 실현되는 순간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바로 이름과 날짜가 기계의 특이성들을 지시하고 그 기계가 발효하는 것을 지시한다.

  만일 추상 기계가 형식과 물질을 알지 못한다면, 지층의 다른 결정 심지어는 배치의 다른 결정 즉 내용과 표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어떤 의미에서 이 구분은 추상 기계에는 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 구분이 필요로 하는 형식과 물질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공재의 평면은 연속적 변이의 평면이다. 각 추상 기계는 내용과 표현의 변수들을 연속적으로 만드는 변이의 “고원”으로 간주된다. 그리하여 내용과 표현은 “동일한 기능의 기능소들(functives)”이 되거나 동일한 물질(matter)의 미시물질(material)이 되어서 최고 수준의 상대성을 얻는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이 구분은 존속한다고, 심지어는 특성들(traits)의 차원에서 재창조된다고 말할 수 있다. 내용의 특성들(형성되지 않은 물질들 혹은 강도들intensities)이 있고 표현의 특성들(무형식적 기능들 혹은 텐서들)이 있다. 여기서 그 구분은 전적으로 치환되거나 심지어는 다른 구분이 된다. 이제는 탈영토화의 점과 연관이 되기 때문이다. 절대적 탈영토화는 “탈영토화하는 요소”와 “탈영토화되는 요소”를 함축하는데, 각 경우에 이 중 하나는 표현에 할당되고 다른 하나는 내용에 할당된다(혹은 그 반대다). 그러나 항상 양자 사이의 상대적 구분을 전달하는 식으로 그렇다. 그리하여 내용과 표현 양자는 연속적 변이에 의하여 반드시 영향을 받지만, 단일한 생성의 요소들로서 혹은 단일한 흐름의 양자들(quanta)로서 두 비대칭적인 역할들이 양자에 할당된다. 바로 이 때문에 연속적 변이를 정의할 때에는 반드시 내용과 표현을 모두  받아들여서 식별불가능하게 만들고 동시에 그 중 하나에 의하여 진행하여 식별불가능하게 된 것의 두 유동적이고 상대적인 극들을 결정하게 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내용의 특성들 혹은 강도들을 정의하고 또한 표현의 특성들 혹은 강도들을 정의해야 한다(부정관사, 고유명사, 부정사, 날짜). 이러한 특성들 혹은 강도들은 공재의 평면에서 번갈아 가며 서로를 이끈다. 형식을 아직 부여받지 않은 물질인 파일럼은 죽어있고 투박하고 동질적인 물질이 아니라 특이성들 혹은 헥씨어티들(haecceities), 질들 심지어는 작용들(순회적인 공학적 계통들)을 담지하고 있는 물질-운동이다. 무형식적 기능 즉 다이어그램은 통사를 결한 비표현적 메타언어가 아니라 항상 각 언어 내에 외국어를 담지하고 있고 전체로서의 언어 내에 비언어적 범주들(유목적인 시적 계보들들)을 담지하고 있는 표현성-운동(expressivity-movement)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형식을 부여받지 못한 물질로 이루어진 실재적인 것과 동일한 수준에서 글을 쓰고 있는 것이며, 동시에 그 물질은 무형식적 언어 전부를 가로지르고 확대한다 : 카프카의 쥐, 호프만슈탈의 쥐들, 모리츠의 송아지들과 같은 동물로의 생성? 실재적이기에 더 추상적인 혁명적 기계. 더 이상 기표 혹은 주체적인 것에 의하여 작동하지 않는 체제.

  지금까지는 특이하고 내재적인 추상 기계들의 경우였다. 우리가 말한 것은 아주 특별한 조건에서 초월적 모범으로 작용하는 가장 주된 추상 기계의 가능성을 미리 배제하지는 않는다. 이번에는 구체적 배치들이 <기계>에 대한 추상적 생각과 연관되며, 배치들이 <기계>를 어떻게 발효하는가에 따라서 배치들에게는 그 잠재력과 창조성을 고려하여 계수들이 할당된다. 배치들을 “양화하는” 계수들은 배치의 변화하는 구성요소들(영토, 탈영토화, 재영토화, 대지, 우주), 배치의 지도를 구성하는 다양한 얽힌 선들(그램분자적 선들, 분자적 선들, 탈주선들), 그리고 배치와 공재의 평면의 서로 다른 관계들(파일럼과 다이어그램)과 관련된다. 예를 들어서 “풀줄기”라는 구성요소는 동물 종의 배치들에서 서로 다른 계수를 가질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배치들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배치는 사물들 사이를 오가는 윤곽없는 선들을 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그리고 물질-기능에 상응하는 변신(변형과 실체변환trans-substantiation)의 힘을 더 누리면 누릴수록 추상 기계에 더 가깝다.

  우리는 특히 두 거대한 이형성형적(alloplastic) 혹은 인간형상적(anthropomorphic) 배치들 즉 전쟁 기계와 국가기구를 살펴보았다. 이 두 배치들은 성격이 다를 뿐만 아니라 가장 주된 추상 기계와의 관계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양화될 수 있다(quantifiable). 이들은 파일럼 및 다이어그램과 동일한 관계를 갖지 않는다. 동일한 선과 동일한 구성요소들을 갖지 않는다. 이 두 배치들과 그 계수들에 대한 분석은, 전쟁 기계가 원래 전쟁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나 국가기구에 의하여 전유되는 것을 허락할 때에는 필연적으로 전쟁을 목적으로 택함을 입증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탈주선과 그것이 실현하는 추상적인 활력선(abstract vital line)은 죽음과 파괴의 선으로 바뀐다. 그래서 전쟁“기계”라는 이름이 나온 것인데, 이는 전쟁기계로부터 그 변신의 힘을 뺏는 국가기구에 가깝기보다 추상 기계에 더 가깝다. 글과 음악은 전쟁기계가 될 수 있다. 어떤 배치가 연관을 더 많이 개시하고 증식할수록 그리고 공재의 평면을 더 많이 그릴수록 그것은 살아있는 추상 기계에 더 가깝다. 그러나 그 배치가 창조적 연관의 봉쇄를 야기하는 봉합(공리체계)으로, 지층을 형성하는 조직화(stratometer)로, 블랙홀을 형성하는 재영토화(segmentometer)로, 죽음의 선으로의 전환(deleometer)으로 대체하는 만큼 그것은 살아있는 추상 기계로부터 벗어난다. 그리하여 점증하는 수의 연관을 가지고 공재의 평면을 구성하는 능력에 따라서 배치들을 선별하는 한 바탕의 과정이 있다. 분열(스키조)분석은 추상 기계를 배치들과의 관계 속에서 질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일 뿐만 아니라 배치들을 아마도 순전한 추상 기계와의 관계 속에서 양적으로 분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마지막 한 가지 즉 유형론적 분석의 관점이 있다. 추상 기계의 일반적 유형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추상 기계 혹은 공재의 평면의 기계는 지층들을 그리고 심지어는 배치들을 구성하는 작용들의 전체를 충족하거나 지배하지는 못한다. 지층은 그 자체가 공재의 평면을 “띠며” 다른 평면의 축들(물질-형식, 내용-표현)을 따라서 조직되고 발전하는 각질화, 응결, 띠를 형성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각 지층이, 무엇보다도 물질적 요소들과 형식적 특성들과 연관되어 있으며 이 다른 평면을 주재하는 고유하게 지층적인 추상 기계의 존재를 입증하는, 공재의 통일성 혹은 구성의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세 번째 유형이 있다. 배치들에 특히 유리한 이형성형적 지층들에서는 재영토화를 수반하는 탈영토화를 보상하거나, 특히 덧코드화 혹은 덧코드화하는 등가물들을 수반하는 탈코드화를 보상하는 추상 기계가 생겨난다. 우리는 특히, 만일 추상 기계들이 배치들을 열면 또한 닫기도 한다는 것을 보았다. 명령어 기계는 언어를 덧코드화하며, 얼굴성(faciality) 기계는 몸 그리고 심지어는 머리도 덧코드화하고, 노예화의 기계는 대지를 덧코드화하거나 혹은 공리화한다. 이는 결코 환상이 아니고 실재적 기계 효과들이다. 우리는 더 이상 배치들을 양적인 스케일 위에 놓고 공재의 평면으로부터 얼마나 멀고 가까운지를 잴 수 가 없다. 그 작용에 있어서 중첩되고 배치들을 질화하는 서로 다른 종류의 추상 기계들이 있다. 1) 특이하고 변이적이며 증식된 연관들을 갖는 공재의 추상 기계들, 2) 공재의 평면을 다른 평면으로 둘러싸는 지층화의 추상 기계들, 3) 총체화, 동질화, 봉합을 수행하는 공리적인 혹은 덧코드화하는 추상 기계들. 모든 추상 기계는 다른 추상 기계들에 연결되어 있다. 그것들이 불가분하게 정치적, 과학적, 예술적, 생태적, 우주적―인식적, 정동적affective, 능동적, 사유적, 물리적, 기호적―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다양한 유형들이 그 작용들이 수렴하는 만큼이나 서로 엮여 있기 때문이다. 기계계(機械界, Mechanosphere). (p.510-514) ♠

 

  1. 재현적 사유의 양태. [본문으로]
  2. [/footnote]의 존재론적 짜임새는 다른 도메인들을 직접적으로 감염시키지는 않을지라도 적어도 모든 도메인들을 가로지르는 창조적 차원들의 부각 혹은 재평가를 낳는다. 분명히 예술이 창조를 독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술은 변이적 좌표들을 창안하는 능력을 극한까지 밀어붙인다. 예술은 전례없는, 예상치 못하고 생각하지 못한 존재의 질을 생성한다. 이 새로운 미적 패러다임을 구성하는 결정적 문턱은 이 창조과정들이 실존적 핵으로서, 자기창조적 기계로서 스스로를 자기긍정하는 데 적합하다는 데 있다. 우리는 이미, 공재의 원리를 보장받기 위하여 초월적 진리에 준거하는 것으로 구성되는 족쇄가 과학으로부터 제거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는 내재적 경험주의를 가능한 한 밀접하게 고수하는 작업적 모델화와 연관되는 정도가 점점 더 커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떻든 <역사>의 우회가 어떠하든, 사회적 창조성은 옛날의 경직된 이데올로기적 구조들을―특히 국가권력의 우월성의 보장물로서 기능했던 것들과 자본주의적 시장을 여전히 그야말로 종교로 만드는 것들을―몰수하도록 요청받은 것처럼 보인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 과학적이라고 주장했던 정신분석학 같은 학문을 잠시 보자면, 정신분석학은 이 새로운 유형의 미적, 과정적 패러다임의 후원 아래 놓임으로써 잃는 것은 없고 얻는 것만 있음이 점차로 분명해질 것이다. 이러한 식으로만 정신분석학은 야생적이었던 시기(세기 전환기)의 창조성을 다시 획득할 것이다. 정신분석학의 소명은 (이는 도구들과, 갱신된 절차들과 변화 가능한 참조들에 의존한다) 순응적 모델화로부터 자유로운, 현 시기의 특이한 개별성들과 변이들과 결합할 수 있는 주체성을 생성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례들을 늘릴 수 있다. 모든 도메인에서 우리는 세 경향들의 동일한 상호얽힘을 발견할 수 있다. (107) ① 내가 무한의 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에 걸쳐서 배열되어 있는 참조의 <우주들>의 존재론적 이질화 ② 이 <우주들>을 동일한 하이퍼텍스트 혹은 공재의 평면(plane of consistency)에서 발현하는 유한한 인터페이스들의 무리들을 마디결합하는 추상적인 기계적 가로지름 ③ 자기창조적 공재의 핵들(실존적 영토들)의 증식과 특이화. 이 과정적 미적 패러다임은 과학적, 윤리적 패러다임들과 함께 작업한다(그리고 그것들에 의하여 가공된다). 그것은 가로질러서 기술-과학에 설치된다. 기술-과학의 기계적 <파일럼phylum>들은 본질적으로 창조적이기 때문이며, 이 창조성은 예술적 과정의 창조성과 결합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교량을 세우기 위해서 우리는 기계에 대한 기계론적 관점을 버리고, 그 모든 측면들―테크놀로지적, 생물학적, 정보학적, 사회적, 이론적, 미적 측면들―을 포괄하는 개념을 세우도록 해야 한다. 다시 한 번 말하건대, 종종 인식되지 않지만 핵심적인 차원들―그 삶과 죽음에 상대적인 유한성, 그 환경의 레지스터(영역)에서의 타자성의 원형의 생산, 그 다양한 함축(연루)과 비물질적 방식의 유전적 전래의 산출―을 드러내는 데 가장 적합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미적 기계이다.



    from Soft Subversion by Guattari


      “질 들뢰즈와 나에게 욕망은 주체와 객체의 대립 이전에, 재현과 생산 이전에 존재하는 모든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과 정동들(affects)이 우리의 외부에서 우리도 모르게 우리는 구성하는 데 드는 모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로부터 흘러나오는 모든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흐름이라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이 맥락 안에서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욕망이 일종의 무차별적인 마그마가 되어서 위험하거나 수상하거나 근친상간적이 되지 않는 방식을 상세히 밝히기 위하여 새로운 개념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계들에 대하여, ‘욕망하는 기계들’에 대하여 말합니다. 여기에는 ‘구조’의 문제는 아직 없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하여, 어떤 주체적 입장이나 객체적 잉여나 참조의 좌표의 문제는 아직 없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죠. 기계들은 흐름을 배열하고 연결합니다. 기계들은 인격들, 기관, 물질적 흐름들, 기호적 흐름들(semiotic flows) 사이의 구분을 인식하지 않습니다.”(가따리)



    from Anti-Oedipus by Deleuze and Guattari

    (들뢰즈․가따리 공저)


    기계는 무의식에 존재한다. 무의식은 여기서 물리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즉 물질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기계는 가로막음 혹은 단절(coupures)의 체계로 정의될 수 있다.

    A machine may be defined as a system of interruptions or breaks (coupures).

    Anti-Oedipus, 36


    [욕망하는 기계] p. 283~


    기계로부터 기계론(mechanism)은 그 구조적 통일성을 추상하여 유기체의 기능방식을 설명한다. 생기론(vitalism)은 모든 기계가 유기적인 연속성에 종속된 한에서, 그리고 그 연속성을 외부에서 확대하는 한에서 기계가 전제하는, 살아있는 존재의 개별적이고 특수한 통일성을 불러낸다. 양자의 경우 모두 기계와 욕망은 외적인 관계 속에 남아있게 된다. 욕망이 기계론적 원인들의 체계에 의하여 결정되는 효과로서 나타나거나 기계 자체가 욕망의 목표의 관점에서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양자 사이의 연결은 이차적이고 간접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욕망에 의해 전유된 새로운 수단에서, 그리고 기계에 의해 산출된 도출된 욕망에서.


    Samuel Butler의 심오한 텍스트 “The Book of the Machines”(Erewhon)는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관점들을 넘어서게 해준다. 버틀러는 기계와 욕망이 서로 대립되지 않는 극단적 지점―비(非)차이 혹은 이산(dispersion)의 지점―까지 자신의 논의를 끌고 간다. 버틀러는 기계가 유기체를 확장한다고 말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 실제로 기계들은 한 사회의 기관 없는 몸에 달린 사지들이며 기관들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유기체들이 기계들이라고 말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 유기체들 또한 기계들이 다른 기계들과 연결되는 상이한 부분들과 같은 부분들을 매우 풍부하게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버틀러는 유기체의 특수한, 혹은 인격적인 통일성을 문제삼음으로써 생기론적 주장을 논파하고, 더 결정적으로는 기계의 구조적 통일성을 문제삼음으로써 기계론적 주장을 논파한다. 사람들은 기계는 스스로를 재생산하지 않는다고, 혹은 인간의 도움으로만 재생산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뒝벌(bumblebee)의 도움을 받아야만 재생산(생식)을 하는 붉은 클로버에 재생산 씨스템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은가. 이런 이유로 버틀러는 기계에도 재생산 씨스템이 있다고 본다.


    기계의 구조적 통일성이 일단 폐기되면, 살아있는 존재의 인격적이고 특수한 통일성이 일단 매장되면 기계와 욕망 사이에 직접적 연결이 인식되고 기계가 욕망의 심장부로 옮겨간다. 기계가 욕망하며 욕망은 기계화된다(machined). 한 마디로, 실재적 차이는 살아있는 존재와 기계 사이에, 생기론과 기계론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계의 두 상태들―이는 또한 살아있는 존재의 두 상태들이다―사이에 있다. 구조적 통일성의 측면에서 파악된 기계와 특수하고 인격적인 통일성의 측면에서 파악된 살아있는 존재는 더미현상(mass phenomena)이거나 그램분자적(molar) 덩어리들(molar aggregate)이다. 이런 이유로 어느 한쪽은 다른 쪽의 외재적(extrinsic) 실존을 가리키게 되어있다. 여기서 양자가 차이지어지고 서로 대립되더라도 그것은 단시 동일한 통계학적 방향으로 가는 두 경로들로서일 뿐이다. 그러나 다양체들의 더 심오한 혹은 내재적인(intrinsic) 방향의 경우에선 분자적 현상과 살아있는 것의 특이성들 사이에―즉 모든 기계에 흩어져 있는 작은 기계들과 모든 유기체에 이산되어 있는 작은 형성체들 사이에―상호침투, 직접적인 소통이 존재한다. 미시물리적인 것과 생물학적인 것 사이의 비(非)차이의 도메인이다. 살아있는 존재들에게 기계들이 있는 만큼이나 기계들에도 살아있는 존재들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실재적 차이는 그램분자적 기계들(사회적이든 기술적이든 유기적이든)과 욕망하는 기계들(이는 분자적 수준의 것이다) 사이에 있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다음과 같다.

    1) 형성하는 기계들이다. 그 불발들(실패들)도 기능을 하며, 그 기능은 곧 형성이다.

    2) 위치를 확정할 수 없는 상호소통과 이산된 위치들에 의해 작동하면서 요소들을 합성한다. 시간화(temporalization) 과정들, 단편화된 형성들, 분리된 부분들을 코드의 잉여가치(코드의 포획)로써 작동시키며 여기서는 부분들과 함께 전체 자체도 산출된다.

    3) 엄밀한 의미의 기계들이다. 차단과 흐름들에 의하여, 연합한 파동들과 입자들에 의하여, 연합한 흐름들과 부분적 대상들(partial objects)에 의하여 진행하기 때문이다. 횡단적 연접들(transverse connections)과 포함적 이접들(inclusive disjunctions) 그리고 다성적 통접들(polyvocal conjunctions)을 (항상 멀리서) 유도하고 그럼으로써 선별들, 분리들, 잔존들을 산출한다. 일반화된 스키조생성(그 요소들은 스키조흐름들이다)에서 개체성의 전송을 낳는다.


    분자적 수준

    그램분자적 수준

    욕망하는 기계들(desiring machines)

    유기적, 기술적, 사회적 기계들

    다양체

    단일체

    포함적 이접

    배제적 이접

    횡단적 연접

    전반적이고 특수한(global and specific) 연접

    다성적 통접

    일대일 대응적 통접

    초현미경적 특이성들이 더미현상을 종속시킴

    더미현상(mass phenomenon), 통계적 결정


    양자는 동일한 기계가 특정의 결정된 조건에서 나타난 것이다. 동일한 기계이지만, 동일한 체제(regine)는 아니며 관계의 규모가 동일하지 않고 혹은 종합의 사용이 동일하지 않다. 기능주의(functionalism)―기계적 배치, 욕망의 엔지니어링―가 존재하는 것은 욕망하는 기계의 초현미경적 수준에서이다. 이 수준에서만 기능하기와 형성, 사용과 조립(assembly), 생산물과 생산이 융합하기 때문이다. 모든 그램분자적 기능주의는 거짓이다. 유기적 혹은 사회적 기계들은 그것이 기능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형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기술적 기계들은 그것이 사용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조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생산을 생산물로부터 분리하는 특수한 조건을 함축한다. 기능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생산되지 않는 것만이 의미를 가지며, 또한 목적과 의도를 가진다. 이에 반해서 욕망하는 기계들은 아무 것도 재현하지 않으며, 아무 의미작용(signification)도 하지 않는다.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누군가 그것들을 가지고 만든 바의 것이며, 그것들로 만들어진 바의 것이고, 그것들이 스스로의 속에서 만든 바의 것이다.



    from A Thousand Plateaus by Deleuze and Guattari

    ★개념은 『안티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에서 사이에 기계 개념의 강조에 조금 차이가 있다. 전자의 저작에서는 ‘흐름’이나 ‘욕망’과의 연관이 매우 강조되는데, 『천 개의 고원』에서는 그 잠재성 혹은 버추얼한 성격이 더 강조된다. 이는 앞으로 이 글에서 특히 ‘추상 기계’의 개념을 통해 살펴보게 될 것이다. 일단은 보통 ‘체계’(system)라고 고정화하여 포착할 것을 그 잠재성의 측면, 그 변이의 측면을 중심으로 하여 포착한 것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세포를 비롯한 모든 몸들을 다 ‘체계’라고 할 수 있듯이 또한 모두 다 ‘기계’라고 할 수 있다.


    4장 「1923년 11월 20일 ― 언어학의 전제들」에서


    배치의 물질적 혹은 기계적 측면은 생산보다는 신체들의 사회 속에서의 섞임의 상태와 연관된다.[footnote]‘욕망하는 생산’을 생각나게 하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와 다른 점이 눈에 뜨인다. [본문으로]

  3. 수컷이 둥지를 만들지 않고 재료를 나르기만 하거나 둥지를 짓는 흉내만 내는 경우였다. 앞의 3주차 강의자료 참조. [본문으로]
  4. A point at which two or more courses of action diverge; a critical turning-point. [본문으로]
  5. 고졸함! [본문으로]
  6. 기계에 관한 단상에서 맑스가 말한 단계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