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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Slavoj Žižek, 『시차적 관점』(Parallax View) 1부 1장 1절~4절


* 이는 영미문학연구회의 근대문학분과 발제문으로 작성되었음


 

Parallax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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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The Stellar Parallax: The Traps of Ontological Difference

1장 The Subject, This “Inwardly Circumcised Jew”


1절 The Tickling Object


* 번역 : ticklish 간지럼 잘 타는 (예민한)


간지럼 타는 주체를 간질이는 것은 객체(대상)이다.

주체와 객체 사이에 능동과 수동의 역할이 바뀐 경우의 객체가 바로 시차적 객체이다.


라깡의 ‘대상 a’(objet petit a)는 순수한 시차적 객체로 정의될 수 있다. 미지의 X의 발생. 단순한 대상들 사이의 차이와 반대로 순수한 차이는 그 자체가 대상이다. 시차적 간극의 또 다른 이름은 ‘순수한’ 차이, 극소한 차이(minimal difference)이다.


헨리 제임스의 “The Real Thing”의 예

―진짜 귀족들보다 천한 출신의 사람들이 귀족을 그리기 위한 모델로서 더 잘 기능한다. 


피츠제럴드의 Tender Is the Night의 예

―두 실패한 판본 사이의 환원 불가능한 간극. 이는 사회적 현실 자체에 있는 간극이다. 여기서 간질이는 객체는 모든 서사적 해결을 무너뜨리는 부재하는 원인, 측정할 수 없는 X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유혹’을 칸트적 선험적 X로, 구조적으로 필연적인 선험적 환상으로 보는 Laplanche.



2절 The Kantian Parallax


가라타니 고진 : 칸트의 입장은 차이를 통해 드러나는 실재를 직시하는 것

(이는 라깡의 실재적인 것을 순순한 적대로서, 그 항들에 선행하는 불가능한 차이로서 주장하는 가라타니 고유의 방식은 아닌가?) 이것이 칸트의 ‘물 자체’에 대한 가라타니의 독해이다. ‘물 자체’는 실재에 대한 우리의 경험의 환원 불가능하게 이율배반적인(antinomic) 성격을 통해서만 식별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noumenal

 본체적

transcendental

 선험적

phenomenal

 현상적


칸트는 경험주의와 합리주의의 이율배반을 선험적인 것으로 해결한다. 이는 양자 중 하나를 택하거나 양자를 제3의 포괄적인 것으로 종합하지 않고 양자 사이의 환원 불가능한 간극 자체를 나타낸다. 선험적인 것이란 이 간극에 있는 어떤 것, 양쪽 항 중 그 어느 쪽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새로운 차원이다.


가라타니는 선험적 주체는 곧 선험적 환상(illusion)으로 보지만 지젝의 견해는 이와 다르다. 선험적 ‘나’는 순전히 형식적인 기능으로서 본체적이지도 현상적이지도 않다(neither noumenal nor phenomenal). 그것은 비어있으며, 그 어떤 현상적 직관도 그것에 상응하지 않는다. 만일 그것이 스스로에게 나타난다면 그 자기현시는 ‘물 자체’ 즉 본체의 직접적인 자기투명성(the direct self-transparency of a noumenon)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선험적 주체와 선험적 객체의 유사성은 여기서 우리를 오도할 수 있다. 선험적 객체는 현상적 외관 너머의 진공(void)인 반면에, 선험적 주체는 이미 진공으로서 나타난다.  

칸트의 ‘inhuman’ 개념. 이는 인간이 아닌 어떤 것이 아니라(not human), 인간 속에 있는 인간을 초과(excess)하는 어떤 것이다. 철학사에서 칸트 및 독일 관념론에 와서야 초과가 절대적으로 내재적인 것으로, 주체성 자체의 핵심으로 사유된다. 「변신」에서 그레고르 잠자(Gregor Samsa)는 ‘비동물’(Untier)이라고 불린다.


간극 자체에서 출현하는 이 새로운 차원이 바로 선험적 자아의, 그 창발성의 차원이다. 궁극적 시차이며, 현상과 본체 자체 사이의 제3의 공간인 이것은 주체의 자유/창발성이다.

What, then, is this new dimension that emerges in the gap itself? It is that of the transcendental I itself, of its “spontaneity”: the ultimate parallax, the third space between phenomena and the noumenon itself, is the subject’s freedom/spontaneity.


본체의 도메인에의 직접적 접근은 우리로부터, 선험적 자유의 핵을 형성하는 ‘창발성’을 앗아간다. 우리를 활력없는 자동기계로 만든다. ‘사유하는 기계’로 만든다. 그 피할 수 없는 귀결은 현상의 수준에서나 본체의 수준에서나 우리는 자율성도 자유도 없는 ‘단순한 기계론적 구조들’이다. (the inescapable conclusion is that, at the level of phenomena as well as at the noumenal level, we—-humans—-are “mere mechanisms” with no autonomy and no freedom)


본체적 지식을 가진 사람은 즐거움과 고통의 계산에 의하여 행동이 결정되는 공리주의적 주체와 유사하다.


“우리의 자유는 현상적인 것과 본체적인 것 사이의 공간에서만 존속한다.”(Our freedom persists only in a space in between the phenomenal and the noumenal)


칸트적 시차의 귀결은 하이데거의 사유 전체의 초점인 존재론적 차이(ontological difference)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에 관한 이중적 견해(doxa)가 있다.

① 존재자들의 본질(Whatness)과 존재자들이 존재한다는 단순한 사실(Thatness)의 차이. 이것이 존재자들을 ‘근거, 아르케, 목표’로부터 해방시켜준다.

② 존재자들 사이의 차이일 뿐 아니라 실재의 전부와 어떤 다른 것(실재와의 관련에서는 ‘무’로서밖에는 나타날 수 없는 것)과의 차이이다.

이 doxa는 우리를 오도한다.


전자는 <본질>로부터 해방시킨다고 하지만 (things simply are, they just occur.) 싸르트르 또한 『구토』에서 존재자의 어리석고 의미없는 관성을 서술함으로써 존재론적 차이를 개관한다. 싸르트르와는 달리 하이데거에게 ‘존재론적 차이’는 실체들의 어리석은 거기 있음, 그 무의미한 실재과 그 의미의 지평의 차이이다.


존재론적 차이란 존재자들 전체와 그 외부의 차이가 아니다. <존재>란 우리가 존재자들을 그 <전부>의 측면에서 파악할 수 없게 하는 유한성의 지평이다. 존재론적 차이란 존재자들 전체와 그보다 더 근본적인 어떤 것의 ‘메가 차이’가 아니라 항상 존재자들의 도메인 자체를 “전부는 아닌 것”(non-all)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In this precise sense, ontological difference is linked to finitude (Heidegger’s original insight and link to Kant), which means that Being is the horizon of finitude which prevents us from conceiving beings in their All. Being cuts from within beings: ontological difference is not the “mega-difference” between the All of beings and something more fundamental, it is always also that which makes the domain of beings itself “non-all.”)

telling all the truth vs. telling of non-all truth


존재론적 차이는 '극대'적(maximal)이지 않고 '극소'적(minimal)이다.

존재자와 존재의 차이는 동시에 존재자들 내에서의 차이이다. 즉 존재자들/실체들과 그것들의 <열림>, 그 <의미>의 지평 사이의 차이는 항상 존재자들  자체의 장(場)을 잘라들어가서 그것을 불완전하고 유한하게 만든다.


칸트와 하이데거의 유사성 : 간극(현상적/본체적, 존재적/존재론적)은 현상적-존재적 도메인 자체의 ‘non-All’로 돌려진다.


칸트의 한계 : 이 유한성의 역설을 존재론적 지평을 구성하는 것으로 온전하게 파악하지를 못했다. 궁극적으로 그는 선험적 지평을 실재가 유한한 존재(인간)에게 나타나는 방식으로 환원하였다.


이렇듯 자유의 장소가 본체적인 것에서 현상적인 것과 본체적인 것 사이의 간극으로 이행한 것이 결정적이다. 바로 이것이 칸트에서 헤겔로의 이행이 아닌가? 내재와 초월 사이의 긴장에서 내재 자체의 극소한 차이/간극으로의 이행이 아닌가? 따라서 헤겔은 칸트에 외적이지 않다. 칸트의 문제는 이 이행을 창출하였으나 그것을 명시적으로 정식화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유의 장소가 본체적이지(noumenal) 않고 본체적인 것과 현상적인 것의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을 명시적으로 표현하지는 못했다. 만일 그랬다면 그의 선험적 철학구조물(his transcendental edifice)이 붕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함축된 “앎”이 없다면 그의 선험적 차원은 없었을 것이니, 우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 칸트의 ‘선험적’ 차원은 말해진 것과 말해지지 않은 것 사이의 깨지기 쉬운 균형의 상태에서만, 우리가 그 완전한 귀결을 표현하기(“그 자체로 정립하기”)를 거부하는 어떤 것을 산출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다.


이는 칸트와 헤겔을 대립시킨 가라타니가 틀렸음을 의미한다. 헤겔은 가라타니의 견해처럼 시차적 논리를 극복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칸트의 ‘즉자’에서 ‘대자’로 가져간 것이다. 시차적인 것을 철저하게 사유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하여 초월적인/불가능한 <사물>의 다양한/실패한 반영보다 내적 적대가 우선적이라고 본 것은 오직 헤겔이었다.


레비스트로스의 부족촌락 분석 사례

부족을 이루는 두 집단이 집들의 배열을 다르게 그린 사례. 한 쪽은 두 동심원의 모양으로 그리고, 다른 쪽은 하나의 원이 선에 의하여 잘린 모양으로 그린다.

여기서 보는 것은 ‘실재적인 것’(the Real)이 어떤 의미에서 왜상(歪像, anamorphosis)을 통해 개입하는가이다. 여기서 ‘실재적인 것’은 현실적(actual) 배열이 아니라 촌락의 집들의  현실적 배열에 대한 부족민들의 시각을 왜곡하는 어떤 사회적 적대의 외상(trauma)적 핵이다.


‘실재적인 것’은

1) 실재를 보는 우리의 시각이 왜상을 통해 왜곡되는 데 원인이 되는 ‘부인된 X'(the disavowed X)이며,

2) 직접적 접근이 불가능한 <사물>이자 직접적 접근을 막는 장애이고

3) 우리의 파악을 피하는 <사물>이며 그 <사물>을 놓치게 만드는 왜곡하는 막이고

4)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시점에서 다른 시점으로의 관점 전환이다.


사회의 적대적 성격에 대한 아도르노의 분석 사례


<시차적 실재>(The parallax Real)는 이렇듯 “항상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으로서 파악된 표준적인 라깡적 <실재>와 반대된다. <시차적 실재>는 동일한 심층의 <실재>의 외관들의 다양성 바로 그것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처음 보기엔 불가능한 딱딱한 핵이었으나 나중에 이 핵은 순전히 버추얼하게, 실제적으로 실존하지 않게 된다. X가 된다.


시차라는 주제는 칸트에서 헤겔로의 이행이라는 핵심문제를 대면하게 해준다. 이 이행을 보는 두 견해가 있다.

1) 칸트는 유한의 간극, 선험적 도식, 본체적인 것에 대한 (숭고한 것을 통한) 부정적 접근을 유일하게 가능한 것으로 주장했다. 반면에 헤겔의 절대적 관념론은 칸트의 간극을 봉쇄하고 비판 이전의 형이상학으로 되돌아간다.

2) 칸트는 형이상학의 파괴에서 중간쯤만 갔다. 아직 <물 자체>에 대한 준거를 유지한다. 헤겔은 단순히 급진화된 칸트이다. 절대적인 것에 대한 부정적 접근에서 부정성으로서의 절대적인 것으로 나아갔을 뿐이다. 헤겔이 칸트를 존재론화한 것이 아니다. 간극을 단순히 인식론적으로 파악한 한에서 외부에 존재하는 온전하게 구성된 본체적 영역을 계속 전제하는 것은 칸트이다. 헤겔은 실재의 짜임새 자체에 간극을 도입하여 칸트를 탈존재론화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헤겔은 칸트적 구분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칸트의 한계는 유한한 대립들의 경계에 남아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 유한한 대립 너머의 선험적 도메인을 추구한 데 있다. 칸트는 무한한 것에 도달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가 찾고 있는 것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 이 전도가 ‘Hegelian triad’를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한다.


디킨즈의 『위대한 유산』의 예. 이것을 지젝은 헤겔의 반성성(Hegelian reflexivity)의 사례로 본다. ‘커대란 기대’의 두 의미. 소설의 진행과정에서 주인공의 성격만이 아니라 그 성격을 재는 윤리적 기준이 변한 것.

1996년 올림픽에서 무하마드 알리가 성화에 불을 붙인 사례. “the Greatest”의 두 의미. 즉 부정의 부정은 실패를 성공으로 만드는 관점의 전환이다.


헤겔의 현재성을 주장하는 주된(주류적?) 방식은 그의 사상을 우리의 인식적, 윤리적 주장들의 규범적 조건들 혹은 전제들을 수립하려는 시도로서 읽는 것이다. 여기서 상실되는 것은 인식론적 측면과 존재론적 측면의 교차이다. 우리가 실재를 아는 운동에 실재 자체가 잡히는(포착되는) 것. 혹은 반대로 실재에 대한 우리의 앎이 실재 자체에 심어지는 것.



3절 The Birth of (Hegelian) Concrete Universality out of the Spirit of (Kantian) Antinomies


한국의 비무장지대


2001년 12월 아르헨티나의 경제 장관 Cavallo의 도피 경우


헤겔의 교훈은 핵심적인 존재론적 문제는 실재의 문제가 아니라 외관의 문제라는 것.

시차의 극소 존재론 : 뫼비우스의 띠

The minimal ontology of parallax is therefore that of the Moebius strip, of the curved space that is bent onto itself. That is to say, the minimal parallax constellation is that of a simple frame: all that has to intervene in the Real is an empty frame, so that the same things we saw “directly” before are now seen through the frame.


두 관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관점과 그것을 피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다른 관점은 우리가 첫째 관점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의 이 진공을  채운다.


모더니즘 회화에서 <프레임>(frame)의 기능

보이는 프레임과 보이지 않는 프레임이 있다. 이는 그림의 구조에 의해 암시된다. 이는 그림의 구조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프레임을 부여한다. 이 두 프레임들은 정의상 겹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간극이 양자를 분리한다.


두 프레임 사이에 어떤 차원이 존재하고, 이 차원을 보게 되면 실재 자체가 외관(현상)으로 바뀐다. (once we get a glimpse, through the Frame, of the Other Dimension, reality itself turns into appearance. In other words, things do not simply appear, they appear to appear. This is why the negation of a negation does not bring us to a simple flat affirmation:)


헤겔의 중심적인 범주인 ‘구체적 보편성’에 열쇠를 제공하는 것은, 이 ‘극소한 차이’의 논리, 사물의 자신과의 구성적 비(非)일치이다.

It is this logic of the “minimal difference,” of the constitutive noncoincidence of a thing with itself, which provides the key to the central Hegelian category of “concrete universality.”


보편성은 개별자들을 담는 중립적 용기[그릇]가 아니라 개별자들의 투쟁 자체이다.

Universality is not the neutral container of particular formations, their common measure, the passive (back)ground on which the particulars fight their battles, but this battle itself, the struggle leading from one particular formation to another.


키에슬로프스키에서 일어난 다큐에서 허구로의 이행의 사례

허구를 통해서만 접근해야 하는 도메인이 있다.

구체적 보편성은 허구가 안으로부터 다큐를 폭파하는 이 과정을 부르는 이름이다. 허구 영화의 출현이 다큐 영화의 내재적 교착상태를 해결하는 방식을 부르는 이름이다.

철학에서는 영원을 시간과 대립되지 않고 시간 속에서 출현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

“Concrete universality” is a name for this process through which fiction explodes documentary from within—for the way the emergence of fiction cinema resolves the inherent deadlock of documentary cinema. (Or, in philosophy, the point is not to conceive eternity as opposed to temporality, but eternity as it emerges from within our temporal experience—or, in an even more radical way, as Schelling did it, to conceive time itself as a subspecies of eternity, as the resolution of a deadlock of eternity.)


구체적 보편성의 핵심

구체적 보편성은 단순히 현상의 일련의 개별적 형식들을 활성화시키는 보편적 핵이 아니라 이 서로 다른 수준들 사이의 환원 불가능한 긴장, 비일치에서 존속한다. (the very heart of the concept of concrete universality: concrete universality is not merely the universal core that animates a series of its particular forms of appearance; it persists in the very irreducible tension, noncoincidence, between these different levels)

이런 의미에서 헤겔은 ‘본질주의적 역사주의자’가 아니다.


칸트, 헤겔, 프랑스 혁명(* 생략)


한 단계 더!

보편적 본질은 그것이 현상하는 개별적 형식들 사이의 불일치에서 스스로를 발현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 불일치는 보편적 본질 자체의 핵심부에 속하는 간극에 의하여 추동된다. (it is not only that the universal Essence articulates itself in the discord between its particular forms of appearance; this discord is propelled by a gap that pertains to the very core of the universal Essence itself)


재머슨(Fredric Jameson)의 대안적 근대들 비판

근대를 여럿으로 보는 관점의 잘못은 근대의 개념으로부터 그 적대를 제거하는 데 있다.

대안적 근대들의 개념에 대한 재머슨의 비판은 <보편>과 <개별> 사이의 진정한 변증법적 관계의 모델을 제공한다. 차이는 개별적 내용의 측에 있지 않고(이른바 종차) 보편적인 것의 측에 있다. 보편적인 것은 개별적 내용을 담는 용기, 개별자들의 갈등의 평화로운 매체-배경이 아니다. 보편적인 것 그 자체가 견딜 수 없는 적대와 자기모순의 장소이며, 그 개별적인 종들은 궁극적으로 이 적대를 흐리게 하고/화해시키고/정복하려는 시도들에 다름 아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보편적인 것은 문제-교착의 장소, 화급한 물음의 장소에 붙여진 이름이며, 개별적인 것들은 이 문제에 대해 시도된, 그러나 실패한 대답들이다. 예를 들어, 국가 개념은 한 사회의 계급 적대를 어떻게 봉쇄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붙여진 이름이며, 개별 국가들은 이 문제들에 해답을 제시하려는 (실패한) 시도들이다.


기독교 보편주의

기독교 보편주의는 일부 주체들을 배제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배제된 자들의 입장에서, 기존의 질서에 속하지만, 자신의 고유한 자리가 없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정식화된다. 보편성은 엄밀하게 이 특수한 장소/결정의 결여와 상호의존적이다.

사도 바울이 연 기독교 보편주의는 “그리스인도 유태인도 아니고 기독교인들”―이는 함축적으로 비기독교인들을 배제한다―이 아니다. 오히려 차이로서 보편적인 것은 기독교인/비기독교인의 차이이다. 즉 사회적 신체 전체를 가로지르는 차이이다.

진정한 보편성과 부분성은 서로 배제하지 않는다. 보편적 진실은 부분적인 관여된 주체적 입장으로부터만 접근 가능하다.(true universality and partiality do not exclude each other, but universal Truth is accessible only from a partial engaged subjective position)


사회적 신체 전체를 가로지르는 이것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은 적대(antagonism)이다. 최근에 라클라우(Ernesto Laclau)가 헤겔의 구체적 보편성과는 대조적으로 환원 불가능한 적대의 논리를 발전시킨 바 있다. 그러나 라클라우는 적대의 관계에 놓인 것을 두 외적으로 대립되는 극들로 본다. (The philosophical/notional limitation of Laclau’s coupling of two logics, that of difference and that of antagonism, is that he treats them as two externally opposed poles.)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이 외적 대립(혹은 상호 의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직접적으로 내화된 중첩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한 쪽 극이 다른 쪽으로부터 추상되어 극단화되면 반대쪽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애초에 극들의 ‘원초적’ 이원성이란 것이 없고 일자의 내재적 간극만이 있다는 것이다.(What we need to do is to take a step further from this external opposition (or mutual reliance) into direct internalized overlapping, which means: not only does one pole, when abstracted from the other and thus brought to the extreme, coincide with its opposite, but there is no “primordial” duality of poles in the first place, only the inherent gap of the One.)


내재와 초월 사이의 긴장도 내재 자체 내에 있는 간극과의 관계에서 이차적이다. 초월이란 일종의 관점착각이며 우리가 내재 자체에 내재하는 간극/불일치를 (잘못)이해하는 방식이다. 마찬가지로 동일자와 타자 사이의 긴장도 동일자의 자신과의 비일치와의 관계에서 이차적이다. (The tension between immanence and transcendence is thus also secondary with regard to the gap within immanence itself: “transcendence” is a kind of perspective illusion, the way we (mis)perceive the gap/discord that inheres to immanence itself. In the same way, the tension between the Same and the Other is secondary with regard to the noncoincidence of the Same with itself.)


적대의 논리와 차이의 논리는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용어인, 내재하는 ‘순수한’ 차이, 일자의 자신과의 비일치를 표시하는 극소한 차이를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달려있다. 이 비일치 혹은 ‘순수한 차이’가 차이적 총체를 이루는 많은 실체들로 풀어질 수도 있고, 두 항들의 적대적 대립으로 나뉠 수도 있다. (This noncoincidence, this “pure difference,” can either unravel into a multitude of entities forming a differential totality, or split into the antagonistic opposition of two terms) 이 이중성은 다시 라깡의 ‘formulas of sexuation’을 따른다.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차이적 다수(the differential multitude)가 ‘남성적’(masculine)이고, 적대가 ‘여성적’(feminine)이다. 원초적 간극은 따라서 두 원리들(남성과 여성, 빛과 어둠, 열림과 닫힘...)의 사이의 분극적 대립(the polar opposition)이 아니라 어떤 요소와 그 요소 자신 사이의 극소한 간극(the minimal gap between an element and itself)이며. 그 자신이 각인되는 장소인 <진공>(the Void of its own place of inscription)이다.

셸링이 실존(existence)과 침투할 수 없는 근거(Ground)를 구분할 때 그가 겨냥한 것은 바로 이 간극이었다. 이 때문에 그가 이원론의 비난을 거부한 것은 옳다. 셸링은 일원론자로 남아있다. 일자만이 존재하며, 간극은 이 일자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다. 두 대립하는 측면들 사이의 간극으로서가 아니라 <일자>와 <진공> 사이의 간극으로서.(there is only One, the gap is inherent to this One itself—not as the gap between its two opposite aspects, but as the gap between One and the Void)



4절 The Master-Signifier and Its Vicissitudes


라깡식으로 말하자면 라클라우의 헤게모니 논리가 작동하는 공간은 빈 ‘마스터 기표’(Master-Signifier)와 이 빈곳을 채우려고 다투는 일련의 ‘보통’ 기표들 사이의 긴장의 공간이다.


‘마스터 기표’란 : 새로운 적극적 내용을 추가하지는 않고, 단지 기표를 추가할 뿐인데 이 기표가 갑자기 무질서를 질서로, “새로운 조화”로 바꾼다. 나치에 있어서 ‘반유태주의’의 사례. 라깡이 ‘le point de caption’[각주:1]를 설명하면서 든 라신(Racine)의 Athalie의 한 구절―신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다른 아무 것도 두렵지 않다는 내용―처럼 하나를 두려워하게 만듦으로써 다른 모든 두려움을 잊게 만든다.


바디우가 네, 아니오로 환원된 단순한 선택으로서 ‘점’ 개념을 제안할 때에 그는 암묵적으로 라깡의 ‘le point de caption’을 참조한다. 이는 언어의 외부에 존재하는 ‘세계’는 없음을 암시하지 않느냐고, 그 의미의 지평이 상징적 질서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 세계는 없음을 암시하지 않느냐고 지젝은 묻는다. 따라서 진실로의 이행은 언어에서, 다수의 세계들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문자로의, “수학소들”(mathemes)[각주:2] a는 프로이트적-라깡적 의미에서의 판타지를 가리키는 수학소이다.(위키피디아 참조) " valign="top">로의 이행이다. 탈근대적 상대주의는 바로 환원될 수 없는 세계의 다수성에 기반을 둔 사유이다.


라깡에게서 “원초적으로 억압된 것”(primordially repressed)은 이원적 기표이다. 상징적 질서는 음-양처럼 짝을 이루는 마스터기표들의 완전히 조화로운 존재를 미리부터 배제한다. 두 번째 기표(여성적인 것의 기표)가 “원초적으로 억압되”며 그 간극을 채우는 것은 다수의 “억압된 것의 귀환들”, 일련의 “보통의” 기표들이다. 우디 앨런의 똘스또이 패러디 Love and Death.


다수적인 것(the multiple)은 빠진(missing) 이원적 기표를 메우려는 일련의 시도들로서 출현한다. S1과 S2 사이의 차이는 동일한 장(場)에서의 두 대립되는 극들 사이의 차이가 아니라 하나의 항에 내재하는 절단, 자신과의 비일치이다. 원래의 짝이 두 기표들의 짝이 아니라 기표와 그 ‘reduplicatio’의 차이, 즉 기표와 그 각인의 장소 사이의(between a signifier and the place of its inscription), 1과 영(零) 사이의 극소한 차이이다.


지젝은 ‘시선’(gaze)의 경우에도 이러한 자기반성성(self-reflexivity)이 결정적이라고 하고 이를 설명한다.(*생략) 상징적 질서의 반성성이란 이 질서가 어떤 요소와 그 구조적 장소 사이의 극소한 차이를 포함함을 의미한다. 이것을 지젝은 윤리에 적용한다. 윤리적 선택은 즐거움과 의무 사이의 선택이 아니라 다음의 선택들에 의하여 배가된다.

1) 즐거움은 나의 의무이다 : 즐거움을 지고의 의무로 끌어올리는 경우..

2) 의무는 나의 즐거움이다 : 의무를 즐겁게 행하는 경우.


이것을 법에 적용한 데리다의 사례도 든다. 법은 금지할 뿐 아니라, 자신이 다시 금지된다는. 법이 금역이 되므로 법과는 관계를 맺지 못하고 해석만이 가능하다는 말.


카프카도 법은 존재하지 않음을 지적했다고 하고 지젝은 이를 대타자의 비실존(the nonexistence of the big Other)이라고 라깡이 부르는 것의 또 다른 경우라고 한다. 이 비실존은 법을 단순히 빈 상상적 키메라로 만들 뿐만 아니라 법을 불가능한 실재(an impossible Real)로, 상징적 공간에서 곡선을 그리며 작용하는 진공(void)으로 만든다고 한다.


라깡이 ‘마스터 기표’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기표의 결여를 채우는 반성적 기표이다. 지젝은 스피노자의 신(神) 개념도 이러한 ‘마스터 기표’의 사례로 본다.[각주:3] 과학사의 사례는 많으며 맑스의 ‘아시아적 생산양식’―맑스의 표준적 범주화에 안 맞는 것들을 부정적으로 부르는 이름―도 그 사례들 중 하나로 본다. 


지금까지 두 버전이 존재한다.

1) S1의 대칭적 짝인 이원적 기표가 “원초적으로 억압되며” 이 억압의 진공을 메우기 위해서 S2의 연쇄가 출현한다.

2) 불완전한 기표의 연쇄인 S2가 원초적이며, 그 불완전함의 진공을 메우기 위해 S1이 개입한다.

 

지젝은 물음의 형태로 이 둘의 가리키는 바는 라깡의 ‘성 구분 공식’(“formulas of sexuation)의 논리라고 한다. 위의 1)이 ‘여성’(다수화, non-All)이며 2)가 ‘남성’(총체화, All)이다.


이렇게 해서 담론의 네 구성요소를 생성해냈다고 한다 : S1, S2, $, a.


마스터 기표와 일련의 보통의 기표들 사이의 긴장에서 ‘대상 a’(objet petit a)의 기능

라클라우는 이를 헤게모니에 국한했는데 이는 온전하게 포착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대상 a’는 판타지의 대상이다. 즉 칸트의 말로 하자면 ‘선험적 도식’(transcendental scheme)의 역할을 한다. 판타지는 우리의 욕망을 구성하고, 그 좌표를 제공한다. 말 그대로 “욕망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판타지는 형식적인 상징적 구조와 우리가 실재에서 마주치는 대상들의 실증성 사이를 매개한다. 형식적인 상징적 구조가 열어놓은 빈 장소들을 채우면서, 실재 속에 있는 어떤 실증적인 대상들이 욕망의 대상들로서 기능할 수 있는 ‘도식’을 제공해준다. ‘숭고한 이데올로기의 대상’으로서의 ‘대상 a.’ 이데올로기적 주장들의 판타지적 지주(支柱)로서 기능한다.


지젝은 헤게모니 모델―모든 이데올로기적 보편자가 빈 기표로 기능하고, 개별적 내용에 의해 채워지는 모델―을 넘어서 더 나아간다. 이제 빈 기표의 진공이 어떻게 생기는가를 묻는다. 이 빈 보편성의 공간은 개별자의 자신과의 근본적 부적합성(비일치, 내적 간극)에서 생긴다(This empty space of universality arises from the radical inadequacy (noncoincidence, inherent gap) of a Particular with itself). 바꾸어 말하자면, 모든 보편성의 구조적 결여/진공은 개별적 내용, 즉 대역(代役)에+ 의하여 채워져야 할 뿐만 아니라, 이 빈 보편성 자체가 개별자의 자신과의 근본적인 비일치의 대역, 빠진 개별자(이것이 추가되면 개별자가 온전하게 되는 요소)의 대역이다.
 

 


 

  1. 영어로는 "quilting point"; 때로는 "nodal point" or "anchoring point." 우리말로는 고정점, 정박점, 누빔점 등으로 옮겨진다. 『시차적 관점』의 한국어본 번역자는 ‘누비땀’으로 옮겼다. “Whether it be a sacred text, a novel, a play, a monologue, or any conversation whatsoever, allow me to represent the function of the signifier by a spatializing device…This point around which all concrete analysis of discourse must operate I shall call a quilting point…This is the point at which the signified and the signifier are knotted together, between the still floating mass of meanings that are actually circulating…Everything radiates out from and is organized around this signifier, similar to these little lines of force that an upholstery button forms on the surface of a material. It's the point of convergence that enables everything that happens in this discourse to be situated retroactively and prospectively.” Lacan, Seminar III, 267-8 ★유동적인 것을 연결시키는 점이라는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오히려 ‘혈(穴)’이 더 적절할 듯하다. [본문으로]
  2. "mathemes [본문으로]
  3. 신을 ‘강력한 인격’(a mighty person)으로 본다는 점에서 지젝의 스피노자 파악은 좀 이상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