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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Slavoj Žižek, 『시차적 관점』(Parallax View) 1부 1장 5절~7절(1장 끝)


* 이는 영미문학연구회의 근대문학분과 발제문으로 작성되었음


 

Parallax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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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 Soave sia il vento ... [각주:1]


스피노자에게 실체(substance)는 일자이고, 정신과 몸의 차이는 시차적 차이이다. 정신과 몸은 동일한 신체가 서로 다른 양태로 파악된 것이다. 그런데 스피노자와 헤겔 사이에 결정적 차이가 있다. 스피노자의 시차는 대칭적인데 반해서 헤겔에서의 시차는 비대칭적이다. 헤겔에서는 두 수준들 중 하나는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다른 하나는 이동 그 자체를, 양자 사이의 간극을 나타낸다. 양태들을 담는 중립적 매체(용기)로서의 일자(스피노자)에서 내재하는 간극으로서의 일자로의 이행이 바로 실체에서 주체로의 이행(passage from Substance to Subject)[각주:2]이다.


지젝은 인간의 본질을 주체성의 도메인 외부에서 보는 요즘의 풍조를 비판한다. 그리고 니체의 말을 빌어서, 문제는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것이라고 한다. 그는 나치도  너무나도 인간적인 것의 사례로 본다.


희극의 사례

희극의 고유한 절차는 일상적 실재의 침입을 통하여 위엄있는 마스크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구조적 단락(structural short circuit)을 실행하는 것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둘 사이에 장소들을 교환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위엄있는 마스크가 애처로운 특이성으로서, 전적으로 인간적인 약점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인간을 구성하는 간극(비인간적인 것)이 나타나는 세 수준

1) <자연>과 <문화> 사이의 ‘소멸하는 매개자’(vanishing mediator)로서. 즉 문화를 통하여 훈육되어야 할, 자유의 ‘비인간적’ 초과로서. 지젝은 이를 ‘인간화’의 영도(零度)라고도 부르고, 헤겔의 용어를 빌어서 인간-동물((Mensch-Tier)의 동물-인간(Tier-Mensch)으로의 반성적 전도라고도 부른다. 즉 동물성을 왜곡하는 인간의 과잉 → 인간성의 영도로.

2) 적대의 <실재>(the Real of antagonism)로서. 즉 역설적이게도 두 항들의 차이에 선행하는 차이로서(여기서 두 항들은 이 차이에 대한 두 양태의 반응이다).

3) 극소한 차이로서. 이로 인해서 특수한 개인(an individual)은 자신이 온전하게 되지 못하고 항상 자신을 닮을 뿐이다. 이는 인간에 대한 실증적-실체적 결정(positive-substantial determination of man)은 없음을 의미한다. 인간은 결여인데, 이 결여를 채우기 위해서 자신을 어떤 무엇인가로서 인식한다. 


이 세 수준은 보편, 개별, 특수(Universal-Particular-Individual)에 상응한다.

1) 인류라는 보편성을 구성하는 <소멸하는 매개자>

2) 보편성을 잘라들어가는 종들로의 개별적 나뉨(성차이, 계급차이)

3) 특수한 개인을 구성하는 극소한 차이, 자신과의 비일치


그림 Mona Lisa의 사례

힛치콕의 North by Northwest의 경우

주체와 환경 사이의 이 환원 불가능한 간극, 주체는 환경에 완전히 맞는 경우가 없다는, 환경 속에 완전히 심어지는 경우가 없다는 사실이 주체를 정의한다.


라깡 : 주체의 사라짐(aphanasis of the subject)이 없는 주체란 없다.


헤겔의 주체는 ‘ecstatic’하다(자신의 바깥으로 나가-있다).[각주:3] 그 매개가 주체를 타자로, 이동으로, 자기동일성의 상실로 열어젖힌다. 그런데 여기서 달성되어야 할 결정적인 단계가 더 있다. 주체는 항상 이미 박탈되어 나가 있을 뿐만이 아니다. 이 나가-있음(ecstasy)이 바로 주체이다. 즉 주체는 나가-있음을 통해서 실체가 ‘박탈될’ 때 출현하는 진공 $이다. 헤겔의 주체는 스스로를 거세한다. 자기거세(self-castration). 이 ‘자기’는 거세의 결과로서만 출현한다. 그래서 변증법적 과정에서 핵심적 계기는 ‘탈실체화’(transubstantiation)이다.


헤겔에서의 정신(Spirit, Geist)

정신은 자연에 대한 대항세력이 아니다. 즉 관성적인 자연적 소재를 점점 파괴하고 그것을 통해 빛나는 상이한 실체가 아니다. 자연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이러한 과정일 뿐이다. 정신은 실증적 행위자가 아니다.

표준적인 헤겔이해에서의 정신

정신은 스스로를 스스로로부터 외화시킨 다음 타자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고 다시 그 내용을 재전유한다. 이는 우리를 크게 오도한다. 정신이 그리로 회귀하는 ‘자아’(Self)는 이 회귀의 순간에 산출된다. 혹은 회귀의 과정이 도달하는 바의 것은 바로 그 회귀의 과정에 의하여 산출된다.


  정신에 대한 표준적 이해


칸트와 헤겔의 관계

우리는 칸트의 ‘윤리적 나르시시즘’과 윤리적 실체에 대한 헤겔의 믿음을 단순히 대립시키는 데로 환원하면 안된다. 전자는 칸트가 의도에 중점을 둔다고 보는 것이고, 후자는 결과에 중점을 둔다고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윌리엄즈(Bernard Williams)는 세 번째 입장을 정식화하였다. 그는 앞의 두 입장이 어떤 ‘공통통화’(common currency)라는 생각을 공유하는 것으로 본다. 즉 도덕적 법이 되었든 효용이 되었든 모든 도덕적 경험들을 판단하게 하는 어떤 보편적인 매체를 공유한다고 본다. 윌리엄즈의 근본적인 비판은 우리가 시간의 경과와 관계없이 하나의 인격(one person)으로서 우리 자신에게 책임을 진다는 생각에 가해진다. 이에 반대하는 윌리엄즈의 논의는 엄밀하게 헤겔적 의미에서 변증법적이다. 그는 그러한 입장은 이전의 선택에 의하여 나중의 자아가 산출된다는 점을 무시함을 보여준다. 도덕적 판단에서는 시간성이 (따라서 우연성이) 환원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현재의 행동들이 우리의 미래의 회고적 견해에 무슨 영향을 미칠지 미리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자율성 자체에 대한 칸트의 강조도 ‘윤리적 나르시시즘’의 표현으로 읽기보다 우리의 극복할 수 없는 한계의 인정으로서 읽어야 한다. 실제적 결과를 무시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일종의 ‘신념의 도약’을 해야 한다. 실재의 우호적 구조를 근본적으로 믿어야 하는 것이다. ★ 여기서 지젝은 이 절의 제목이 된 시(“Soave sia il vento” trio from Mozart’s Così fan tutte)를 인용한다.


Gentle be the breeze, / calm be the waves, / and may every element / respond benignly/ to our desires


주체의 던져져 있음/책임질 수 없음(unaccountability)이 바로 칸트가 말하는 자율성의 조건이다. 여기서  라깡의 ‘non-All’의 논리를 참조해야 한다고 지젝은 말한다. 진정한 자율성의 입장은 ‘나는 모든 것에 책임이 있다’(“I am responsible for everything)가 아니라 ‘내가 책임이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there is nothing for which I am not responsible)이다. 이것의 반대는 ‘나는 모든 것에 책임이 없다’(“I am not responsible for All)이다. 내가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기 때문에 내가 나 자신을 책임으로부터 방면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도덕적 행동에서 우연성이 환원 불가능하다는 주장의 또 다른 측면은 ‘must’와 ‘ought’의 분리이다. Ought is related to must as best is related to only.말하자면 우리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했을 때 ‘그것밖에는 할 수 없다’는 말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떤 것은 할 수 없고 어떤 것은 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 속에 우리의 성격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 라깡의 행동 개념 : 행동 속에서 나는 내가 할 수 없는 것과 해야 하는 것의 좌표를 재정의한다.


라깡이 윤리는 <실재>에 속한다고 말할 때, 이는 존재의 실증적 질서의 외부에 있는 윤리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증성이 생성하는 것으로서의 윤리, 실증적인 것에 존재하는 간극으로서의 윤리이다.



6절 The Parallax of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따라서 헤겔이 칸트를 교정한 기본적인 사항은 이성의 세 도메인들(이론적, 실천적, 미적)이 주체의 태도의 변환을 통하여 즉 괄호치기(bracketing)를 통하여 드러난다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이러한 시차적 독해를 맑스에 적용하였다. 상품형식에 대한 맑스의 분석(『자본론』)을 세밀하게 읽으면서 가라타니는 생산물이 상품이 되기 위해서 수행하게 되는 ‘생명을 건 도약’(salto mortale)[각주:4]에서 시차적 간극의 극복할 수 없는 존속의 근거를 찾았다.


가라타니의 핵심적 칸트적/반(反)헤겔적 논점 : 상품이 팔리게 되어 상품으로 실현되는 도약은 가치의 내재적인 자기발전의 결과가 아니라 키엘케골의 ‘신념의 도약’에 맞먹는 ‘생명을 건 도약’이며, 칸트의 감수성과 오성의 종합에 맞먹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일시적인 불안정한 종합이라는 것이다. 양자의 경우 환원 불가능하게 외적인 두 수준들이 결합된다. 바로 이 때문에 맑스는 교환가치와 사용가치의 분리를 가치의 개념으로부터 도출하려는 원래의 기획을 버렸다. 『자본론』에서는 이 두 차원의 분리 즉 상품의 이중적 성격이 출발점이다.

자본의 자기운동은 헤겔의 개념 혹은 정신의 원환적 운동과는 매우 다르다. 맑스의 논점은, 이 운동이 스스로를 결코 따라잡지 못한다는 것, 결코 신용을 회복하지 못한다는 것, 해결이 영원히 지연된다는 것, 위기는 가장 내적인 구성요소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 운동은 ‘거짓 무한’(spurious infinity) 중 하나이다.


가라타니 인용: 헤겔적 서술양식에도 불구하고 『자본론』은 헤겔의 철학과는 그 동기에서 다르다. 『자본론』의 끝은 절대정신이 아니다. 자본은 영원히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모두가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고 치는 ‘신념의 도약’ 없이는 언어가 없다. 이 전제, 이 ‘신념의 도약’은 이상(ideal)이 아니라 허구, ‘as if...’이다. 이는 지식의 전진과정에서 계속적으로 무너뜨려져야 한다. 그래서 이 미리 전제된 ‘as if...’는 심오하게 반(反)규범적이다.

이에 대해 하버마스는 언어에 새겨진 이상 혹은 규범에서는 이 허구가 더 이상 허구가 아니라고 답할 수도 있다. 주체들이 사실상 동일한 것을 의미하리라는 것이다.

하버마스의 이러한 응답의 문제점 : 요점을 놓치고 있다. 요점은 허구가 더 이상 허구가 아닌 상태는 접근 불가능하다는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뿐만이 아니라, 주체들이 자신들이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고 간주하는 ‘신념의 도약’이 규범적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규범을 더 다듬어내는 것도 봉쇄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뭐 하러 만들려고 노력하는가?').

신념의 도약의 ‘진실 효과’는 그것이 진실하지 않다는 데, 허구로 도약한다는 데 달려 있다.


생산과 유통 사이의 긴장도 시차적이다. 가치의 생산과 실현 사이의 시차적 간극이 결정적이다. 생산과정에서 창출된 즉자적 가치(in itself)가 유통과정에서 대자적 가치(for itself)가 된다. 양자 사이의 이러한 간극으로 인해서 자본주의는 형식적 민주주의와 평등을 필요로 한다.


시차적 상황의 궁극적 경우 : 노동자-생산자의 입장과 소비자의 입장은 그 분기 속에서 환원 불가능한 것으로, 즉 한 쪽에 더 특권을 부여함이 없이 유지되어야 한다. 국가사회주의는 소비에 비해 생산에 특권을 부여하여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그래서 가라타니는 금융적-투기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을 생산적 활동에 종사하는 실물경제 자본가들에 대립시키는 것을 전적으로 거부해야 한다고 본다.


가라타니가 보는 가치에 대한 맑스의 접근

가치는 상품에 내재하지 않는다. 한 상품이 모든 다른 상품들과 관계하는 방식을 표현한다. →맑스의 구조적-형식적 접근. 이는 대상과 그것이 차지하는 구조적 장소 사이의 간극을 강조한다. 왕의 내적 속성 때문에 왕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대하기 때문에 왕이다.(맑스 자신의 든 예) 하나의 상품이 화폐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리카도와 그의 좌파 추종자들[각주:5]과는 달리 맑스의 기본적인 움직임은 형식 자체의 비밀로 돌아가는 것이다. 함정은 형식에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 형식을 ‘단순한 형식’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비밀스런 본질이 이 형식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를, 형식이 얼마나 본질적인지를 간과하는 것이다.[각주:6]


맑스의 궁극적 시차는 경제와 정치 사이에 있다. 양자 사이의 관계는 매우 꼬여있어서, 그 어떤 직접적 접촉도 방해한다. 정치적 투쟁을 경제적 이해관계들의 단순한 반영으로 직접 옮겨놓는 것은 실패하게 되어있다. 경제적 생산의 영역을 심층적이고 토대적인 정치적 과정의 이차적인 ‘사물화된’ 침전으로 환원하는 것도 실패하게 되어있다.


바디우, 랑시에르, 발리바르의 ‘순수 정치학’은 영미권의 문화연구와 함께 경제영역을 폄하한다. 즉 경제(물질적 생산)의 영역을 ‘존재론적’(ontological) 위엄이 박탈된 ‘존재적’(ontic) 영역으로 환원한다. 맑스의 『자본론』에서 상품들의 세계는 그냥 한정된 경험적 영역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선험적 아프리오리(socio-transcendental a priori)이며 사회적, 정치적 관계들의 총체를 생성하는 모태이다. 경제와 정치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잘 알려진 착시 “두 얼굴 혹은 꽃병”의 관계이다. 둘 중 하나만 보이지 둘 다 보이지는 않는다.


경제 영역은 바로 그 형식에 있어서 정치로 환원 불가능하다. 이 경제의 형식(사회적인 것을 결정하는 형식으로서의 경제)이라는 수준이 프랑스의 ‘정치적  포스트맑스주의자들’이 경제를 실증적 사회영역들 중 하나로 환원할 때 놓치고 있는 것이다. 바디우에 있어서 순순한 ‘정치’―이는 역사, 사회, 경제, 국가, 심지어 당과의 관계에서도 근본적으로 자율적이다―라는 생각의 뿌리는 <존재>와 <사건>의 대립이다. 이 점에서 바디우는 ‘관념론자’로 남아있다. 유물론적 입장에서 볼 때 <사건>은 <존재>의 특수한 성좌 내에서 “아무 곳도 아닌 곳으로부터”(out of nowhere) 출현한다. <사건>의 공간은 두 사물들 사이의 극소한 ‘빈’ 거리, 이 간극을 통하여 빛나는 ‘다른’ 차원이다.


시차는 괄호치기 자체가 그 대상을 산출함을 의미한다. 형식으로서의 ‘민주주의’는 우리가 정치적 국가장치의 내적 논리와 경제적 관계들의 짜임새를 괄호칠 때에만 출현한다. 여기서 피해야할 함정은 총체를 정식화하려는 것이다. 전부 다 보려고 하면, 아무 것도 못 보게 된다. 윤곽이 사라진다. 이러한 괄호치기는 인식론적일 뿐만 아니라 맑스가 ‘실재적 추상’(real abstraction)이라고 한 것과도 관여된다. 권력 및 경제적 관계들로부터의 추상은 민주적 과정의 현실태(actuality) 속에 새겨진다.


가라타니에 대한 몇 가지 비판

1) LETS(Local Exchange Trading System)에 대한 그의 옹호에 관하여

이 모델은 더 이상 물신이 아니라 ‘노동화폐’로서 기능할 화폐라는 함정을 피하기 어렵다.[각주:7]

2) 잉여가치 및 착취에 관한 맑스의 견해에 대한 가라타니의 설명은 부적절하다. 표준적인 노동가치론에 대한 맑스의 비판―노동자들의 노동력의 가치대로 임금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사용가치가 독특하게도 자신의 가치보다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하고 이것을 자본가들이 전유한다―을 전적으로 무시하기 때문이다. 가라타니는 착취를 가치 체계들 사이의 가격 차이의 또 하나의 사례로 환원한다. 계속적인 기술적 혁신으로 인해서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지불하는 것보다 생산물을 팖으로서 버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이다.

아마 가라타니의 이러한 한계의 뿌리는 그의 칸트주의에 있는 것 같다. 가라타니의 여러 제안들(57)은, 권력의 빈 장소를 선발된 대표들이 일시적으로 채우는 정치적 질서로 민주주의를 보는 르포르(Lefort)의 이론에 잘 맞지 않는가?


부르주아 독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가라타니의 ‘미친 것처럼 들리는 정의’(a crazy-sounding definition) : 비밀선거에 의한 보통선거(권), 즉 의회민주주의가 부르주아의 독재라면, 추첨의 도입이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중심이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각주:8] 그러나 ‘권력의 물신’을 무너뜨리는 데 이것으로 충분한가? 이런 것은 칸트의 해결들의 일반적인 모형에 맞지 않는가? 즉 형이상학적인 명제들이 ‘지워진 상태로’(under erasure) 공리들(postulates)로서 주장되는 것이 아닌가? 결과적으로 진정한 과제는 <권력>의 ‘장소’라는 신비를 제거해야 하는 것 아닌가?



7절 “. . . ce seul objet dont le Néant s’ honore”


C-M-C(상품-화폐-상품)에서 M-C-M으로의 전도의 핵심 효과는 순환의 영속화이다. 자본으로서의 화폐의 순환이 목적 그 자체가 되는 것. 돈을 축장하는 구두쇠와 자본가는 이런 의미에서 다르다. 그런데 경제적 위기의 때에는 구두쇠가 승리의 순간을 맞는다. 일반적인 상품이 가치를 잃는다. 살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위기의 시기에는 화폐만이 상품이다. 이렇듯 위기에는 심층에 있는 믿음, 부인되고 그냥 실행만 되던 믿음이 직접적으로 주장된다.

상품

기독교도

일반적인 상품을 버리고 돈만을 다루는 것

외적인 실제적 할례

일반적인 상품들의 진정한 실체가 화폐임을 아는 것

내적인 할례

지젝은 여기서 맑스가 기독교도를 ‘내적으로 할례받은 유태인들‘로 정의하는 바울에 의지한다고 한다.(위의 표 참조) 이보다 훨씬 더 결정적인 것은, 맑스가 화폐에서 자본으로의 이행을 다름 아닌 헤겔적 용어로 실체에서 주체로의 이행으로 서술하는 방식이다.


★ 여기서 지젝은 맑스를 인용하는 데 그중 다음 대목이 핵심적이다.

It differentiates itself as original value from itself as surplus-value; as the father differentiates himself from himself qua the son, yet both are one and of one age: for only by the surplus-value of 10 pounds does the 100 pounds originally advanced become capital, and so on as this takes place, so soon as the son, and by the son, the father is begotten, so soon does their difference vanish, and they again become one, 110 pounds. [각주:9]


자기정립의 비밀스런 원환운동이 기독교의 삼위일체설과 동일시된다.


그렇다면 자본이 진정한 주체/실체인가? 네, 와 동시에 아니오이다. 맑스에게 이 운동은 프로이트의 말로 하자면 자본주의적 “무의식적 판타지‘이다. 이 판타지는 ’순수한 실체없는 주체성‘으로서 프롤레타리아에 기생한다. 실제로 자본은 자신을 생성하지 못하고 노동자의 잉여가치를 착취한다. 따라서 자본의 세 수준은 다음과 같다.

1)과 2) 주관적 경험(욕구를 충족하는 단순한 수단으로서의 자본)과 객관적 사회현실(착취)의 단순한 대립.

3) 객관적 기만, 부인되는 ‘무의식적’ 판타지(자본의 신비한 자기생성적 운동).  이는 자본주의적 과정의 실재는 아니지만 진실이다. 진실은 허구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라깡) 자본의 진실을 정식화하는 유일한 방식은 자기생성의 운동의 이 허구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럴 떼 우리는 맑스의 자본주의 분석을 해체론적으로 읽는 것의 약점을 알게 된다. 해체론적 ‘다시 말하기’는 여전히 자본의 판타지를 서술할 뿐이다.


결여(lack)와 구멍(hole)의 차이 : 자끄 알랭 밀러(Jacques-Alain Miller)의 구분

결여는 공간적이며 공간 내의 진공을 지칭한다.

구멍은 더 근본적이다. (블랙홀처럼) 이 공간적 질서 자체가 무너지는 점을 지칭한다.


욕망(desire)과 충동(drive)의 차이

욕망은 그것을 구성하는 결여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충동은 구멍 즉 존재의 질서에 있는 간극의 주위를 순환한다.

충동은 더 근본적인 수준에서 자본주의에 내재한다. 충동이 자본주의적 기계를 추동하는 바의 것이다. 확대된 자기재생산의 끝없는 원환운동에 관여하고자 하는 비인격적 강박. 자본으로서의 화폐의 순환이 목적 그 자체가 될 때 우리는 이 충동의 양태에 들어선다.[각주:10]


라깡의 잘 알려진 목적aim과 목표goal의 구분

목표‘goal’는 충동이 그 둘레를 순환하는 대상이다. 그 목적‘aim’은 이 순환의 끝없는 연속 그 자체이다.


밀러가 제안한 ‘구성된 불안’(constituted anxiety)과 ‘구성하는 불안’(constituent anxiety)의 구분.

전자가 일반적인 의미의 불안이라면, 후자는 상실된 가운데 구성되는 것으로서의 ‘대상  a’와의 ‘순수한’ 대면을 나타낸다. 전자는 대상이 판타지 내에 거하고, 후자는 주체가 판타지를 가로질러, 판타지적 대상이 채우는 진공, 간극과 대면할 때에만 생긴다. (as Mallarmé put it in the famous bracketed last two lines of his “Sonnet en -yx,” objet petit a is “ce seul objet dont le Néant s’honore [this sole object with which Nothing is honored].”)


밀러의 한계와 욕망에서 충동으로의 이행

그는 욕망의 지평에 머문다. 욕망의 진정한 대상-원인(object-cause)은 진공이다. 반면에 라깡이 강조하듯, ‘대상 a’는 또한 충동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 관계는 전적으로 다르다. ‘대상 a’가 욕망의 대상-원인일 때에는 대상은 원래 상실된 것이다. 충동의 대상으로서의 ‘대상 a’의 경우에는 ‘대상’이 직접적으로 상실 자체이다. 욕망에서 충동으로 이행하면서 우리는 상실된 대상에서 대상으로서의 상실로 이행한다. 상실이란 바로 지젝이 지금까지 말하던 간극, 절단(cut), 거리이다.


프로이트의 죽음 충동

자기절멸과는 관계없다. 죽음과는 반대의 것이다. ‘죽지 않은’(undead) 영속적인 삶 자체에 붙여진 이름이다. 죄와 고통 속에서 헤매는 끝없는 반복적 순환에 갇히는 것에 붙여진 이름이다. 모든 충동에는 ‘죽음’의 차원이 있으며 이는 대상에 고착되는 것이다. 충동의 기본적인 모형은 개별적인 사물들을 넘어서 진공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리비도가 개별 사물에 고착되는 것, 영원히 그 주위를 순환하도록 저주받는 것이다.


원래는 단순한 부산물이었던 것이 자율적인 목적으로 고양될 때 특수하게 인간적 차원이 발생한다. 우리는 같은 제스처를 반복하고 거기서 만족을 찾는 폐쇄된 자기추동적 고리에 빠질 때 ‘인간들’이 된다(We become “humans” when we get caught into a closed, self-propelling loop of repeating the same gesture and finding satisfaction in it). ★ 다시 말해서 ‘충동’(drive)의 작용으로 동물에서 인간이 된다는 것.


시간의 선형의 진행이 반복적 고리로 정지되는 것이 가장 기초적인 수준의 충동이다. 이것이 인간화의 영도이다. 욕망에서 충동으로의 이러한 이행을 통해 우리는 극소한 차이의 핵심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근본적 수준의 극소한 차이란 보통의 대상을 욕망의 대상으로 고양시키는 측정할 수 없는 X가 아니라, 리비도의 공간을 곡선으로 진행하고 그리하여 본능을 충동으로 바꾸는 내적 비틀림(the inner torsion which curves the libidinal space, and thus transforms instinct into drive)이다.


충동에서는 ‘물 자체’가 진공의 둘레를 도는 운동이다. 충동은 모든 연속성을 깨고 근본적 불균형을 도입한다. 욕망과 충동의 차이는, 욕망에서는 부분적 대상에의 이 고착이 ‘선험화’된다는 것, 즉 <사물>의 <진공>에 대한 대역으로 전환된다는 것이다(in desire, this cut, this fixation on a partial object, is as it were “transcendentalized,” transposed into a stand-in for the Void of the Thing). ★ 여기서 우리는 지젝이 말하는 칸트와 헤겔의 차이, 즉 선험론과 변증법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


지젝에 대한 부스텔의 비판과 지젝의 재비판 (*생략)


바디우의 이름 붙일 수 없는 <실재>와 라깡의 <이름붙일 수 없는 것>의 차이

바디우의 경우 이름 붙일 수 없는 <실재>는 진실의 과정에 대한 측정할 수 없는 외적 배경이다. 라깡에게서는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 절대적으로 내재하며 이름붙이기를 초과하는 <행동> 그 자체이다. 바디우의 합리주의는 이성과 <이름붙일 수 없는 것>의 외적 대립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성 자체의 핵심으로서의 광기라는 생각은 없다.


셸링의 Entscheidung(원초적 결정-차이화)(the primordial decision-differentiation, Ent-Scheidung)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는, 이름붙일 수 없는 <무의식>이 <로고스>의 외부에 있지 않다. 불명료한 배경이 아니라 이름붙이는 행동 자체이며 로고스를 창립하는 제스처이다. 최대의 우연, 심연적 광기의 궁극적 행동이 바로 합리적 <필연성>을 <실재>의 전(前)합리적 혼돈에 부과하는 행동이다.(The greatest contingency, the ultimate act of abyssal madness, is the very act of imposing a rational Necessity onto the prerational chaos of the Real.)


여기서 지젝은 자신이 독일 관념론을 다루고 있으므로, 용기를 내어 역설적인 동일시를 제산해야겠다고 하면서 “충동의 이 곡선적 구조가 바로 헤겔이 ”자기의식“으로 의미했던 것이라면 어떤가?”라고 말한다. 피해야 할 결정적인 잘못 : 헤겔의 자기의식을 일종의 메타주체, 개별적 인간 정신보다도 훨씬 더 큰 <정신>이 스스로를 깨닫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지젝은 헤겔에게서는 유한한 의식으로부터 정신의 본질을 아는 과정이 일어남을 지적한다. “유한성의 거품이는 들끓음으로부터 정신이 향기롭게 일어난다.”(헤겔, 『종교철학강의』 3권)


헤겔의 자기의식에 있는 또 다른 차원 : 자신이 하는 일을 반성적으로(reflexively) 기록하는 비심리적 작업. 라깡이 ‘대타자’(big Other)라 불렀던 것. 이는 헤겔과 정신분석학의 연결고리이다. 이 엄밀한 비심리적 의미에서 ‘자기의식’은 정신분석학에서는 하나의 대상이다. 예를 들면 안면경련.


헤겔에서 자기의식으로서의 국가. 국가의 자기의식은 반성적인 관행들의 존재(the existence of reflective practices, such as, but not limited to, educational ones.)이다. 국가의 자기의식은 객관적 측면(국가의 의례와 선언들에서의 자기기록)과 주관적 측면(국가에 개별적 의지의 형식을 제공하는 군왕의 인격)으로 쪼개져 있다.


[1장 끝]



<부록>

『그룬트릿세』에서 노동화폐를 비판하는 부분

(모든 상품들의 가치는 그 생산비용 즉 생산하는 데 든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 The value (the real exchange value) of all commodities (labour included) is determined by their cost of production, in other words by the labour time required to produce them. (상품들의 가격은 그 교환가치가 화폐로 표현된 것이다.) Their price is this exchange value of theirs, expressed in money. (따라서 일반화폐를 노동시간을 표시한 노동화폐로 대체하면 양자를 같게 할 수 있을 지로 모른다.) The replacement of metal money (and of paper or fiat money denominated in metal money) by labour money denominated in labour time would therefore equate the real value (exchange value) of commodities with their nominal value, price, money value. Equation of real value and nominal value, of value and price. (그러나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But such is by no means the case. (노동시간으로 결정되는 가치는 그 평균적인 가치일 뿐이다. 외적 추상으로서의 평균과 추동력으로서의 평균) The value of commodities as determined by labour time is only their average value. This average appears as an external abstraction if it is calculated out as the average figure of an epoch, e.g. 1 lb. of coffee = 1s. if the average price of coffee is taken over 25 years; but it is very real if it is at the same time recognized as the driving force and the moving principle of the oscillations which commodity prices run through during a given epoch. This reality is not merely of theoretical importance: it forms the basis of mercantile speculation, whose calculus of probabilities depends both on the median price averages which figure as the centre of oscillation, and on the average peaks and average troughs of oscillation above or below this centre. The market value is always different, is always below or above this average value of a commodity. (진동에 의한 균등화) Market value equates itself with real value by means of its constant oscillations, never by means of an equation with real value as if the latter were a third party, but rather by means of constant non-equation of itself (as Hegel would say, not by way of abstract identity, but by constant negation of the negation, i.e. of itself as negation of real value). (실재가치 ① 진동의 법칙 ② 항상적인 자기부정) In my pamphlet against Proudhon I showed that real value itself ― independent!y of its rule over the oscillations of the market price (seen apart from its role as the law of these oscillations) ― in turn negates itself and constantly posits the real value of commodities in contradiction with its own character, that it constantly depreciates or appreciates the real value of already produced commodities; this is not the place to discuss it in greater detail. Price therefore is distinguished from value not only as the nominal from the real; not only by way of the denomination in gold and silver, (가치는 가격이 거쳐가는 움직임들의 법칙으로 나타난다. 상품의 가치는 가격의 고저 운동 속에서만 존재한다) but because the latter appears as the law of the motions which the former runs through. But the two are constantly different and never balance out, or balance only coincidentally and exceptionally. The price of a commodity constantly stands above → 138 or below the value of the commodity, and the value of the commodity itself exists only in this up-and-down movement of commodity prices. Supply and demand constantly determine the prices of commodities; never balance, or only coincidentally; but the cost of production, for its part, determines the oscillations of supply and demand. The gold or silver in which the price of a commodity, its market value, is expressed is itself a certain quantity of accumulated labour, a certain measure of materialized labour time. On the assumption that the production costs of a commodity and the production costs of gold and silver remain constant, the rise or fall of its market price means nothing more than that a commodity, = x labour time, constantly commands >or <x labour time on the market, that it stands above or beneath its average value as determined by labour time. (시간전표제주의자들은 가치를 노동시간으로 표현함으로써 실재가치와 시장가치의 명목적 차이를 줄이는 가운데 가치와 가격의 실재적 차이와 모순을 제거한다.) The first basic illusion of the time-chitters consists in this, that by annulling the nominal difference between real value and market value, between exchange value and price -- that is, by expressing value in units of labour time itself instead of in a given objectification of labour time, say gold and silver -- that in so doing they also remove the real difference and contradiction between price and value. Given this illusory assumption it is self-evident that the mere introduction of the time-chit does away with all crises, all faults of bourgeois production. The money price of commodities = their real value; demand = supply; production = consumption; money is simultaneously abolished and preserved; the labour time of which the commodity is the product, which is materialized in the commodity, would need only to be measured in order to create a corresponding mirror-image in the form of a value-symbol, money, time-chits. In this way every commodity would be directly transformed into money; and gold and silver, for their part, would be demoted to the rank of all other commodities.


▷ 시간전표들의 전환불가능성은 가치와 시장가치 사이, 교환가치와 가격 사이의 전환불가능성의 또 다른 표현이다.

This inconvertibility of the time-chits which we are now discussing is nothing more than another expression for the inconvertibility between real value and market value, between exchange value and price. 139


▷ 가격은 가치와 같지 않기 때문에 가치결정요소인 노동시간은 가격을 표현하는 요소가 될 수 없다. 가치척도로서의 노동시간은 이념적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가격비교를 위한 것으로 쓰일 수 없다. 가치관계는 화폐에서 독립적인 물질적 실존을 얻는다. 가격과 가치의 차이로 인해 가치가 자신의 것과는 다른 기준(화폐)에서 가격으로서 측정될 것이 요구된다.

Because price is not equal to value, therefore the value-determining element ― labour time ― cannot be the element in which prices are expressed, because labour time would then have to express itself simultaneously as the determining and the non-determining element, as the equivalent and non-equivalent of itself. Because labour time as the measure of value exists only as an ideal, it cannot serve as the matter of price-comparisons. (Here at the same time it becomes clear how and why the value relation obtains a separate material existence in the form of money. This to be developed further.) The difference between price and value calls for values to be measured as prices on a different standard from their own. Price as distinct from value is necessarily money price. It can here be seen that the nominal difference between price and value is conditioned by their real difference. 140


<부록2> from Women in Love, Ch. 17.

  But they submitted to it all. The joy went out of their lives, the hope seemed to perish as they became more and more mechanized. And yet they accepted the new conditions. They even got a further satisfaction out of them. At first they hated Gerald Crich, they swore to do something to him, to murder him. But as time went on, they accepted everything with some fatal satisfaction. Gerald was their high priest, he represented the religion they really felt. His was forgotten already. There was a new world, a new order, strict, terrible, inhuman, but satisfying in its very destructiveness. The men were satisfied to belong to the great and wonderful machine, even whilst it destroyed them. It was what they wanted. It was the highest that man had produced, the most wonderful and superhuman. They were exalted by belonging to this great and superhuman system which was beyond feeling or reason, something really godlike. Their hearts died within them, but their souls were satisfied. It was what they wanted. Otherwise Gerald could never have done what he did. He was just ahead of them in giving them what they wanted, this participation in a great and perfect system that subjected life to pure mathematical principles. This was a sort of freedom, the sort they really wanted. It was the first great step in undoing, the first great phase of chaos, the substitution of the mechanical principle for the organic, the destruction of the organic purpose, the organic unity, and the subordination of every organic unit to the great mechanical purpose. It was pure organic disintegration and pure mechanical organization. This is the first and finest state of chaos. (p. 259-260)



  1. May the breeze be gentle... [본문으로]
  2. 이는 전부터 헤겔 철학의 야심적 측면을 특징지었던 어구이다. [본문으로]
  3. ‘황홀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ek+stasis’ 즉 자신의 바깥으로 나가 존재의 빛 속에 있다는 말로 하이데거가 사용한 바 있다. ‘existence’의 형용사인 셈이다. “존재의 빛 속에 서 있는 것을 나는 인간의 실존이라고 부른다.”(Das Stehen in der Lichtung des Seins nenne ich die Ek-sistenz des Menschen)(하이데거, 『휴머니즘에 관한 편지』) [본문으로]
  4. 상품으로서 팔리지 않으면 생산과정에서 추출된 잉여가치가 유실된다. 즉 자본으로서는 사망한다. [본문으로]
  5. 초기 사회주의자들과 프루동 같은 이들처럼 노동의 양이 곧 교환가치라고 실체론적으로 본 사람들을 말한다. [본문으로]
  6. 이 점에서 ‘dream-work’를 강조한 프로이트와 맑스는 유사성을 가진다고 한다. [본문으로]
  7. 지젝이 알고 있듯이, 맑스는 이러한 화폐는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뒤의 부록 참조. [본문으로]
  8. 바로 이런 식을 논리를 지젝이 ‘칸트적’이라고 부른다. [본문으로]
  9. 즉 C + ∆C = C' [본문으로]
  10. 로렌스는 『연애하는 여인들』의 17장에서 이 충동의 훌륭한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뒤 부록 참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