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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자본가 계급을 불필요하게 만들고 있는 자본가 세력--슘페터의 한 대목

슘페터(Joseph A. Schumpeter)는 경제학을 잘 모르는 사람도 들어본 적이 있는 경제학자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슘페터의 추종자들은 슘페터의 이론을 정보혁명 이후의 경제에서 자본의 전략을 짜는 데 이용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중요한 점이 있다. 실제 슘페터는 자기 나름으로 자본의 몰락을 추론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의 자기논리에 의한 사망은 맑스의 자본 연구의 핵심이 되는 주제인데, 이른바 주류경제학자인 슘페터가 마찬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아래는 네그리와 하트가 공통체에서도 원용한 바 있는, 슘페터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 1943)12, 1기업가 기능의 노후화의 내용 거의 전부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슘페터의 예측은 가장 조악한 형태의 신자유주의 세력에 의해 시대에 뒤떨어지게 지배당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잘 들어맞는다. 물론 이보다 더 크고 깊게 생각할 가치가 있는 대목이다. (밑줄 강조는 나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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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상품을 생산하는 데 혹은 옛 상품을 새로운 방식으로 생산하는 데 발명을 이용하거나 더 일반적으로는 예전에는 시도하지 않았던 테크놀로지의 가능성을 이용함으로써, 원료의 새로운 공급원이나 생산물의 새로운 판로를 개척함으로써, 산업을 재조직함으로써, 등등의 방식으로 생산의 패턴을 개혁하거나 혁신하는 것이 기업가의 기능임을 우리는 보았다. 초기 단계의 철로 건설, 1차 대전 이전의 전력 생산, 증기와 철강, 자동차, 식민지 개척은 (특별한 종류의 소시지나 칫솔을 만드는 데 성공하는 것에 이르는 수많은 군소재능들을 포함하는) 거대한 재능이 발휘된 웅대한 사례들을 제공한다. 주로 이러한 종류의 활동으로 인해서, 경제적 조직체를 혁신하는 번영이 되풀이되며, 새로운 생산물이나 방법이 준 충격이 균형을 무너뜨린 결과로 생기는 경기 후퇴가 되풀이된다. 그렇게 새로운 것들에 착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뚜렷하게 변별되는 경제적 기능을 구성한다. 첫째로 새로운 것들이란 모두가 이해하는 일상적인 과업들의 외부에 있기 때문이며, 둘째로 금융지원이 거부되거나 구매가 거부되는 단순한 장애에서부터 새로운 것을 생산하려는 사람에 대한 물리적 공격에 이르는 (사회적 조건에 따라 다른) 각종의 저항들이 환경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익숙한 지침이 가리키는 범위를 넘어서 확신을 가지고 행동하며 저항을 극복하는 것은 인구 중에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있는 적성을 필요로 하는데, 이 적성이 기업가 기능과 기업가 유형을 정의한다. 이 기능은 반드시 무언가를 발명하거나 기업이 이용하는 조건들을 창출하는 데에 그 본령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일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 그 본령이 있다.

그런데 이 사회적 기능이 이미 중요성을 잃고 있으며 미래에는 가속적으로 잃게 되어 있다. 기업가정신이 주된 동력인 경제적 과정 자체가 약화되지 않은 채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그렇다. 그 이유는 이렇다. 한편으로, 지금은 익숙한 상투적 일의 외부에 있는 일들을 하기가 과거에서보다 훨씬 더 쉽다. 혁신 자체가 상투적인 일들로 환원되고 있는 것이다. 테크놀로지 발전은 점점 더 훈련된 전문가집단의 일이 되고 있다. 이 전문가들이 필요로 되는 것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예측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만든다. 이전의 상업적 모험이라는 낭만적 이야기는 급속하게 시들어가고 있다. 예전에는 번득이는 재능으로 포착되었던 아주 많은 것들이 이제는 엄밀하게 계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개성과 의지력은 경제적 변화에 익숙해진 환경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새로운 소비재와 생산재가 가장 좋은 사례이다그리고 이 변화에 저항하기보다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환경에서는 덜 중요하게 마련이다. 생산과정에서 일어난 혁신에 의해 위협을 받는 세력이 벌이는 저항은 자본주의적 질서가 존속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예를 들어 값싼 주택의 대량생산은 철저한 기계화와 현장에서의 불필요한 작업방법의 대대적인 제거를 전제로 하는데, 예의 저항은 이러한 주책의 대량생산으로 가는 길에 큰 장애가 된다. 그러나 모든 다른 종류의 저항은특히 소비자나 생산자가 어떤 새로운 종류의 것을 그것이 새롭다는 이유로 저항하는 것은이미 거의 사라졌다

 

따라서 경제적 진보는 탈인격화되고 자동화되는 경향이 있다. 부서와 위원회 업무가 개인들의 개별적 작업을 대체하는 경향이 있다. 다시 한 번, 군사적 비유를 드는 것이 본질적 요점을 부각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예전에는 대체로 나폴레옹전쟁 시기까지, 그리고 그 시기를 포함하여, 장군의 지위는 지도자의 지위를 의미했으며 성공은 명령권자의 개인적 성공을 의미했고 명령권자는 사회적 위신의 형태로 그에 상응하는 이익을 얻었다. 그 당시의 전쟁 기술과 군대의 구조에 상응하여, 개인적 결정과 지도자의 추진력이심지어는 화려한 말을 타고 전쟁터에 실제로 나와 있는 것조차도전략·전술적 상황에서 본질적인 요소들이었다. 나폴레옹의 존재는 전쟁터에서 실제로 느껴졌고 그랬어야 했다. 그런데 이제는 이것이 더 이상 해당되지 않는다. 합리화되고 전문화된 사무실 업무가 결국에는 개성을 지워버릴 것이고, 계산될 수 있는 결과가 비전을 지워버릴 것이다. 지도자는 치열한 전장에 뛰어들 기회를 더 이상 갖지 않는다. 그는 그저 또 한 사람의 사무실 직원, 즉 대체하기가 늘 어렵지만은 아닌 사람이 되고 있다.

 

또 다른 군사적 비유를 들어보자. 중세의 전쟁은 매우 개인적 차원의 것이었다. 무장한 기사들이 평생 동안의 훈련을 필요로 하는 기술을 발휘했으며, 모두가 개인이 가진 숙련과 용맹 덕택에 개별적으로 중요했다. 이런 기술적 능력이 어떻게 가장 온전하고 풍부한 의미에서의 사회계층의 토대가 되었는지는 쉽게 이해된다. 그런데 사회적·테크놀로지적 변화가 그 계층의 기능과 지위를 모두 침식하고 결국에는 파괴했다. 그렇다고 해서 전쟁 자체가 종식된 것은 아니다. 단지 더 기계화되었을 뿐이다. 결국에는 기계화가 매우 고도화되어서 현재에는 단지 전문업일 뿐인 것에서의 성공이 개인적 성취그 사람의 지위를 올려줄 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집단을 사회적 지도층의 지위로 올려주는 성취라는 함축을 더 이상 갖지 않게 되었다.

 

이제 이와 유사한 사회적 과정결국은 동일한 사회적 과정이 자본주의적 기업가의 역할과 사회적 지위를 침식한다. 그의 역할은 중세의 군지도자들(높든 낮든)의 역할보다는 덜 매력적이지만, 그것은 성공을 향한 개인적 힘과 개인적 책임감에 의거하여 행동하는 개인적 지도력의 또 다른 형태이다(혹은 형태였다). 사회적 과정에서 발휘되는 이 기능이 중요성을 잃자마자 그의 지위는 전쟁을 수행하는 계층의 지위처럼 위협을 받게 되는데, 이는 이 계층이 충족시키는 사회적 욕구를 다른 더 비개인적인 방법들이 충족시키든, 아니면 그 사회적 욕구 자체가 종식되었든 마찬가지로 그렇다.

 

그런데 이것은 부르주아 계급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비록 기업가들이 처음부터 그 계급의 필연적 요소이거나 심지어는 전형적인 요소인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가들은 성공하는 경우에 부르주아 계급에 진입한다. 그래서 기업가들이 그 자체로 사회계층을 형성하지는 않지만, 부르주아 계급이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 및 친척들을 흡수하고, 그럼으로써 그때그때 새로운 인원을 충원하여 계급을 갱신한다. 다른 한편 사업과의 활동적 관계를 끊은 가족들은 한두 세대 후에 부르주아 계급으로부터 빠져나간다. 그 중간에 우리가 산업가들, 상인들, 금융업자들, 은행가들이라고 부르는 층이 있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기업가적 모험을 행하는 부문과 다른 한편으로는 물려받은 영역의 단순한 일상적 관리를 담당하는 부문 사이의 중간 단계에 존재한다. 부르주아 계급의 삶의 토대가 되는 수익은 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활동적인 부문(이는 이 나라에서 그렇듯이 부르주아 계층의 90%를 차지할 수도 있다)과 이 부문으로 올라가고 있는 개인들의 성공에 의해 창출되고 또 그 사회적 지위가 이 성공에 의존한다. 따라서 부르주아지는 경제적·사회학적으로, ·간접적으로 기업가에 의존하며 하나의 계급으로서 기업가와 함께 살고 기업가와 함께 죽는다. 물론 다소 오래 지속되는 이행단계는 있을 수 있다. 봉건 문명의 경우에 실제로 그랬듯이 말이다. 그런데 이 이행단계는 궁극적으로는 부르주아지가 죽을 능력도 없고 살 능력도 없다고 느끼는 단계가 될 것이다.

 

이 부분에서의 우리의 논의를 요약해보자. 만일 자본주의의 진화발전가 멈추거나 완전히 자동적이 된다면, 산업부르주아지의 경제적 토대는 궁극적으로 일상적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지불되는 임금으로 축소될 것이다. (한동안 남아있으리라고 예상되는, 지대 및 독점 이익 같은 것에 해당되는 것들의 잔존물은 예외로 하자.) 자본주의적 기업은 바로 그 성취에 의해서 진보를 자동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자신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고, 자신의 성공의 압력 아래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경향이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완벽하게 관료화된 거대한 산업체는 중소기업을 추방하고 자신의 소유주들을 수탈할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기업가도 추방하며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지를 수탈한다. 부르주아지는 그 과정에서 자신의 소득을 잃을 뿐만이 아니다. 엄청나게 중요한 것은, 부르주아지가 그 기능도 잃는다는 점이다. 사회주의의 진정한 페이스메이커들은 사회주의를 설교하는 지식인들이나 선동가들이 아니라 반데어빌트들, 카네기들, 록펠러들이다. 이 결과는 맑스의 통찰을 따르는 사회주의자들의 취향에 모든 면에서 맞지 않을 수 있을 것이며, (맑스가 속류라고 말했을) 더 통속적인 종류의 사회주의자들의 취향에는 더욱 맞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측에 관한 한, 이 결과가 그들이 예측하는 결과와 다르지는 않다.

======인용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