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오 소년 표류기’
―‘삶정치적 지성’에 관하여
『십오 소년 표류기』
어린 시절에 푹 몰입해서 읽은 책은 상당히 오래 영향을 미친다. 물론 디테일이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디테일은 기억으로 희미할지라도 다른 방식으로 정신(혹은 영혼?)과 몸에 지속적으로 그리고 심지어는 점증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내가 맛있게 먹은 음식에 대한 상세한 기억은 사라지더라도 그 음식이 소화가 되어 나의 몸의 일부가 되거나 나의 행동의 일부가 되고 그 몸과 그 행동이 차후의 나의 존재의 생성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과 유사하다.
그에게 이와 같은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 작품 가운데 하나가 『15소년 표류기』이다. 1 이 소설의 디테일에 대해서 지금 그에게 기억나는 것은 별로 없다. (필시 각색했을 것이므로 실제 원작과 다를지도 모른다.) 이 당시 이 소설을 읽고 받은 감동은 내용에 대한 자세한 기억으로서보다는 그 이후의 그의 습성, 행동, 지향, 추구에 미친 영향에 준거하는 것이 더 이해하기 쉽다. 물론 이러한 영향에 대한 그의 자기이해가 항상 뚜렷했던 것은 아니다. 이는 그동안 공부를 해오면서 도달한 현재의 그의 사유에 비추어 볼 때 비로소 뚜렷해진 것이다.
『15소년 표류기』의 어떤 측면이 그에게 영향을 미친 것일까? 기존의 삶으로의 복귀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자신의 삶을 자신이 구성하게 된 것, 바로 이것이다. 사실 그의 (틀릴지도 모르는) 기억에 따르면 무리 가운데 한 소년의 실수로 배가 표류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섬에서의 소년들의 새로운 삶은 그들이 ‘목적의식’에 따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상황에 의해 강요된 것이다. 2 그렇지만 그러한 조건에서 그들이 자신들의 삶을 자신들의 힘으로 만들었다는 점, 그것이 그의 뇌리에 새겨진 것이다. 사실 지금의 그에게라면 소년들이 무인도에서 살았던 삶의 내용이 상투적인 것으로 다가올 수 있다. 따라서 자신들의 힘으로 만들었다는 점의 중요성이 크게 약화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 세상을 몇 년 살아보지 못한 초등학생(당시의 단어로는 ‘국민학생’)인 당시의 그에게는 소년들의 삶의 내용이 흥미진진한 모험이었을 것이고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들의 삶을,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 나간다는 점이 놀라웠을 것이다.
상상된 삶의 세계
아마 그 당시에 그는 ‘상상된 삶’, 즉 실제 현실에서 보는 것과는 다른 삶에 대한 강렬한 욕구를 가졌던 듯하다. 그는 당시 어린이 명작소설 50권 세트, 100권 세트, 기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을 닥치는 대로 다 읽었다. 친척 집에 놀러갔을 때 우연히 발견한 굴러다니는 ‘성인’소설조차 잘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마구 읽었다. 3 이러한 욕구는 그가 처해있는 실제 현실(그의 초등·중학생 시절은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에 걸쳐있다)이 그의 욕망을 전혀 끌어당기지 못한다는 점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그는 실제 현실에서 그의 위치를 상승시켜야겠다는, 즉 성공해야겠다는 생각을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는 그의 욕망을 끌어당기는 삶, 미지의 삶이 필요했다. 딱 한 번 사는 그의 삶이 의미 있기 위해서는(이것은 현재의 그의 해석이다).
이런 태도는 상상하는 습관을 키운다. 그런데 이른바 실용성(practicality)이 매우 중요해지는 시대, 즉 산업화가 한창 진행 중인 시대에 상상하는 습관은 실용적이지 않다고 판정된다. 영국 산업화의 전성기를 다룬 디킨즈의 소설 『어려운 시절』은 공리주의자, 국가 공무원, 자본가 모두가 ‘실용’을 숭배하고 상상하기(혹은 궁금해 하기)를 억압하는 것으로 제시한다. 산업화란 사실상 사회의 특정 형태를 (비록 그것이 다소 추상적일지라도) 전제하고 현실을 그 틀에 맞추어 바꾸어나가는 움직임이다. 따라서 이 틀을 비판하거나 이와는 다른 틀을 상상하는 태도는 시대에 역행하는 태도이고, 시대에 역행하는 태도는 항상 비실용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공부하는 학생으로 가장 실용적인 것은 학교공부이고, 학교에서의 성적이며, 학교의 성적은 머릿속에 축적된 사실의 양에 비례하고 상상은 여기에 방해만 된다.
그러면 그는 공상만 하다가 (실제로 지금까지도 공상하는 삶을 살고 있다) 성적이 떨어져 산업화의 역군이 되는 행복을 놓쳤을까? 아니다. 그는 산업화의 역군이 되기를 전혀 바라지 않았고 사실 크게 보면 거부하는 쪽이지만, 이는 성적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그는 문학과 철학 공부를 하면서 새로운 삶의 형태를 상상하는 유형의 지적 능력이 가진 힘을 깨닫게 되었다. 이 글은 바로 이 힘이 어떤 것인지를 말하는 글이다.
근대적 유형의 총체
근대 사회에 널리 퍼진 속류 지식관은 경험적 차원을 사실들(법칙들도 여기 속한다)로 환원하고 기록하는 것에 기반을 둔다. 이 지식관은 경험의 양적 총체에의 접근을 지향한다. 물론 현실이 계속 바뀌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총체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접근하려는 끊임없는 노력만 있을 뿐이다. 개인들의 지적 능력은 이 사실들을 지식으로서 얼마나 알고 있느냐로 가늠된다. 그리고 이 가늠된 결과가 성적이 되고 이 성적에 따라 노동시장에서의 가치가 결정된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의 평면 위에서의 무한한 양적 확장과 유한한 개별적 성취들의 경쟁으로 나타난다.
매우 단순화하였지만, 자본주의 국가들의 개발 경쟁이나, 한국에서의 지역들 사이의 개발유치 경쟁이나, 모든 자본주의적 경쟁은 이와 같은 형태를 띤다. 그것은 양적으로는 무한하다고 가정되지만 결국 겨우 하나의 평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척도에의 종속’이다.
‘척도에의 종속’이란 특정의 단일한 척도 단위에 종속시킨다는 말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차원에 국한된다는 말이다. 척도의 단위와 내적 배열은 바뀔 수 있으며(5점 만점, 10점 만점, 100점 만점, 수·우·미·양·가, A·B·C·D·F 등), 심지어는 모호해질 수도 있다. 자본의 경우를 보면 이러한 변화를 잘 알 수 있다. 고전적 자본주의에서 자본 가치의 척도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었지만 (이것이 그 유명한 ‘가치법칙’이다) 이제는 이것이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은 그 자체가 여전히 가치평가의 척도로서 사회 전체에 부과되며, 금융의 형태로 미래를 현재로 당겨서 같은 평면에 놓음으로써 양적 무한에 대한 지향을 이어가고 있다. 금융자본의 관점에서는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이 서로 ‘동등’하다(equal). 그리하여 한 차원에 놓여서 합산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근대에 등장하고 지금까지 우리를 지배하는, 척도에 종속된 총체이다.
대안근대적 유형의 다양체
새로운 삶형태를 상상하는 것은 척도에 종속된 총체와는 전혀 다른 매트릭스와 연관된다. 이는 실제 현실, 경험적 현실을 얼마나 많이 아느냐와 무관하게 그것을 하나의 전체로서 취급하고 이 전체에 다른 전체들을, 즉 상상된 삶형태들을 대비시키는 매트릭스이다. 열다섯 명의 소년들이 뜻하지 않게 표류를 하게 되었을 때, 기존의 사회에 대한 경험은 많지 못했을 터이고 따라서 앞으로 그 사회에서 하고 싶은 일도 많았을 터이지만, 어쨌든 자신들이 속했던 형태의 삶을 없는 것으로 치고 새로운 삶을 스스로의 힘으로 새롭게 개척해야 했던 것을 생각해보라!
물론 『십오 소년 표류기』를 너무 일반화하면 안 될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작품은 실마리일 뿐이지, 그 내용이 이 글의 취지를 온전히 대표하지는 못한다. 핵심은 현재의 삶을 그것에 대한 지식의 양과 관계없이 전체로 놓고 파악하며, 그리고 그 전체를 그것과 불연속적인 다른 미지의 삶형태에 의해 대체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태도이다. 그런데 이 미지의 삶형태란 오직 상상될 수 있을 뿐 다른 방법은 없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두 삶형태의 불연속성 혹은 동등하지 않음(unequal-ness)은 어디까지나 삶형태의 차원에서 그런 것이지 다른 차원에서도 그런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기존의 사회가 이룬 성취는 새로운 삶형태의 재료로서 쓰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예술가가 재료를 이용하여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과 원리적으로 같다. 그런데 세상의 어떤 예술가가 자신의 재료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겠는가! 그래서 새로운 삶형태의 상상은 만일 그것이 진정으로 절실한 것이라면 기존의 사회가 이룬 성취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연구하는 것―그것이 새로운 삶형태의 재료로서, 혹은 여기저기 삽입되어 쓰일 모듈로서 얼마나 유용한지를 따지는 것―을 필수적으로 포함하게 되어 있다. 이러한 검토와 연구를 통틀어 ‘삶정치적 비판’(biopolitical critique)이라고 부르고 이것이 상상력과 결합된 것을 ‘삶정치적 지성’(biopolitical intelligence)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삶정치적 지성’이야말로 최상승의 지성이다. 지적 능력의 핵심이 추상능력에 있다고 볼 때, 기존의 것을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과 연결시키는 능력이야말로 최고형태의 추상능력이기 때문이다. 금융이 현재 자본의 주도적 형태가 될 수 있는 이유도 추상의 정도가 가장 높은 차원에서 자신의 힘을 발휘하는 데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금융의 추상은 ‘사이비’ 추상이다. 4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금융의 추상은 현재를 미래에 투사하는 식으로, 미래를 현재와 동등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즉 양적으로는 무한을 지양하더라도 1차원적 추상인 것이다. 이와 달리 삶정치적 지성이 행하는 예술가적 추상은 미지의 삶형태에서 끌어와서 현재에 삽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차원이 무한대인 추상이다. 이는 두 개의 근본적으로 대조적인 추상화 방식이다. 금융의 추상의 경우에는 동일한 것의 영속적 회귀이고 예술가적 추상의 경우에는 차이의 영속적 회귀이다.
차원의 무한대가 바로 탈근대적 유형의 다양체이다.
자기계몽
그러면 삶정치적 지성은 어떻게 양육되는가? 오로지 자기 스스로에 의해 양육된다. 모든 계몽의 진정한 형태는 자기계몽이다. 5 따라서 이른바 교육기관에서 (현재의 상태를 감안할 때) 제도적으로 양육될 수는 없다. 현재 대한민국의 교육처럼 교사가 정답을 머리에 주입하는 식의 교육, 입시위주의 교육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삶정치적 이성을 양육할 수 없다.
자기계몽은 지식의 주입이 아니라 지적·정동적·신체적 활력의 양성을 핵심으로 한다. 활력의 상승은 문턱을 넘어가는 것으로 표시된다. 다시 말해서 앞에 말했듯이 어떤 차원에서의 양적 확대가 아니라 그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단순화를 무릅쓰고 비유하자면, 더하기·빼기·곱하기·나누기를 숫자의 크기를 무한히 늘리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10자리 → 100자리 →1000자리, 10000자리 , 100000 자리 → ···· → n자리)이 아니라 음수와 양수, 유리수와 무리수, 허수와 실수 등등으로 새로운 차원의 수 개념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문턱을 넘어가는 것은 기술(테크닉)에 의해 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기술을 미리 선점한 것으로 되어 있는 교육자들―현대 교육의 대부분이 교육자들은 이런 유형이다―은 그 교육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문턱을 넘어가게 해줄 수 없다. 6 (니체는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에서 ‘해방자로서의 교육자’라는 상을 제시하는데, 과연 몇 명이나 이러한 상에 해당할지 모르겠다. 몇 명이라도 있기를!) ‘문턱 넘기’는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발생하는 ‘사건’의 형태로 일어난다. 기존의 상태를 끊임없이 비판하면서 미지를 향해 자신을 열어놓는 것이 사건을 기다리는 자세의 핵심이다. 문턱을 넘어가는 것은 갑작스런 깨달음에 의한 것이고 이 깨달음은 다시 계속적인 훈련(수련)을 통해 정착된다. 돈오점수! 이것을 사회에 적용하자면, 사건에 의해 사회가 하나의 문턱을 넘어가고 이것이 그 사건을 이어받는 새로운 제도화를 통해 정착된다.
(그런데 깨달은 것을 정착시키는 것―이는 동일한 차원에서의 수평적 확대를 필수적으로 포함한다―에는 기술이 포함된다. 수평적 확대는 이미 그 장소에 형성된 지층과의 충돌을 낳게 되어 있으며 이러한 충돌의 상황에서는 전략과 전술이, 기술이, 방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측면에서는 그 전략과 전술, 기술, 방법을 미리 터득한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모든 학습과정에서는 학습자가 우선이고 교육자는 단지 조언자로서 관계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교육자는 갑이고 학습자는 을이다. 다만 돈이 많은 부모를 둔 학습자의 경우에는 학습자가 갑이다. 둘 다 문제다. 교육자와 학습자의 관계가 권력관계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관계에서는 그 어떤 좋은 일도 일어날 수 없다.)
차원을 넘어가는 것에는 기술이 포함되지 않듯이 ‘완벽성’ 또한 포함되지 않는다. 어떤 차원에 도달하는 순간 새로운 미지의 차원이 다시 열리기 때문이며, 정착의 과정 내내 새로운 탈정착 또한 준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완벽성에 의해 고정되는 것을 피하는 특이한 기술만이 포함된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척도에 종속된 총체의 경우에만 ‘완벽성’이 적용될 수 있고, ‘만점’(滿點)이라는 사고방식이 통용될 수 있다. 지적 노예에게만 만점이 가능한 것이다.
입시공부
자기계몽의 대척점에 이른바 입시공부, 즉 경쟁에서의 성공을 목표로 하는 공부가 존재한다. 입시공부란 공부의 내용을 삶과 분리시켜서 사물화된 지식으로 바꾸고 이 지식을 얼마나 습득했나를 기준으로 사람의 능력을 위계화 하는 데 (즉 등수매기는 데) 복무하는 공부이다. 이는 새로운 삶의 형태에 활용하기 위해 삶의 재료를 탐구한다는 의미의 공부와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척도에 종속된 1차원적인 공부인 것이다. 따라서 입시경쟁에서라면 모를까 실제 삶에서는 거의 쓰이기 어려운, 사실상 비실용적인 공부이다. 이 비실용적인 공부가 입시에서의 성공을 가져온다는 이유로 실용적인 공부로 탈바꿈해 있는 것이다.
입시공부는 최악의 경우에는 문제집을 가지고 하는 공부로 완전히 전락한다. 최악의 평가형태가 공부형태의 자리를 찬탈하는 것이다. 사유능력은 ‘문제의 장’(the problematic field)(들뢰즈)에서 양육되고 발휘된다. 문제의 현실화로서 해답들이 존재하지만, 문제의 문제적 성격, 잠재적 성격은 그대로 남는다. 요컨대 해답 즉 명제가 문제에 종속되며, 따라서 명제는 절대적이지 않고 언제나 바뀔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학생들의 ‘친구보다 더한’ 동반자인 문제집(최근에 등장한 신예로서 ‘기출문제집’이 있다)을 구성하는 문제들의 경우에는 이와 정반대이다. 다시 말해서 해답(명제)에 철저하게 종속된 문제들이다. 따라서 문제집으로 하는 공부는 문제해결 능력을 양성하기는커녕 명제들 즉 해답을 기계적으로 외우는 공부, 지적·정신적 노예들을 양성하는 공부가 될 수밖에 없다. 기계적으로 외우는 것은 사람의 뇌를 컴퓨터의 하드디스크로 만드는 것과 같은데, 하드디스크는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얼마나 저장했느냐를 재는 것은 하드디스크의 경우에는 도구의 능력을 재는 것이지만 사람의 경우에는 얼마나 노예인가를 재는 것이다.
삶정치적 지성 즉 기존의 현실을 새로운 삶형태의 재료로 보는 사유는 철저하게 문제적 장에서 움직인다. 새로운 삶형태란 명제처럼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고 앞으로 구성되어야 할 미지의 것이기 때문이며, 현실의 어느 부분에 대해서든 ‘과연 이것이 어떤 새로운 삶형태에 어떻게 쓰일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 붙여지기 때문이다. 현실의 모든 부분은 미지로 열린 실재가 된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실재는 뫼비우스의 띠와도 같다. 확실한 것으로 간주되는 실재와 미지로 열린 불확실한 실재가 앞면과 뒷면으로 결합되어 있는데, 이 두면은 사실상 하나의 연속된 면을 이룬다. 한 면에서 시작하여 움직이면 불연속점에서의 도약 없이 다른 면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불연속적인 차원이 연속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 이것이 바로 현실을 새로운 삶형태의 재료로 보는 사유, 즉 삶정치적 지성이 보는 실재의 짜임새이다.
확실한 실재를 다루는 것으로 생각되는 과학의 일면성은 현실을 새로운 삶형태의 재료로 보는 사유와 결합할 때 비로소 보완되게 된다. 입시공부, 즉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저급한 공부형태는 과학적 지식을 이 방향으로 활용하는 지혜를 가르치는 일은 완전히 망각하고 있으며, 과학 지식을 삶과의 연관을 상실한 사물화된 지식으로 만들어 오직 입시경쟁의 도구로만 쓰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교육은 현재 엄청난 역설을 산출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공식적인’ 공부(교육부 승인 ‘공식’ 공부)는 모두 입시공부다. 입시공부는 지적 능력이 형성되는 시기(고등교육 이전까지를 말함)의 지성을 손상시키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학생들은 (‘덕후’로서 스스로를 계몽해온 학생이 아니라면) 대학에 들어가서도 그 지적 능력을 대학에 걸맞은 수준으로 발휘하기 힘들게 된다. 이런 현실을 마치 배려나 한다는 듯이, 교육부는 대학에 ‘취업 공부’를 시키라고 강요 아닌 강요를 한다. ‘취업 공부’는 또 한 번의 입시공부이다. 그래서 대학에 오기 전까지 만신창이가 된 지성이 대학에 와서 ‘확인 사살’ 비슷한 것을 당하는 것이다.
이것이 역설인 이유는 자본은 이런 지성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흥미롭게도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의 존속이 삶정치적 지성과 같은 고도의 지성을 장악하여 상품화하는 데 달려있는 시대로 점점 진입하고 있다. 이것을 자본주의를 벗어나는 과정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자본주의 자체가 달라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7 어쨌든 문제는 전지구적으로는 사실상 힘을 다한 신자유주의가 (그것도 매우 무도한 형태의 신자유주의가) 여전히 우세한 대한민국에서는 공교육이든 사교육이든 입시공부에 완전히 매몰되어 이러한 달라지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준비를 하나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준비를 안 하는 정도가 아니라 준비의 토대를 몽땅 갉아먹고 있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이것이 여러 세력(교육부 관리들, 대학 운영자들, 학부모들, 입시교육으로 맹목적으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의 합작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든다.
자본과의 관계가 어떻든, 현실을 새로운 삶형태의 재료로서 접근하고 연구하는 지적 능력은 언제나 삶에 있어서 필수적인 능력이다. 그런데 이제 이 능력을 학교에서 배양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에 다름 아니게 되었으니 어쩌면 우리는 ‘탈학교’라는 기획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점에 온 것인지도 모른다.
문학과 철학
삶정치적 지성이라는 말은 정치철학적 성격이 강한 용어이지만, 사실 이 용어가 가리키는 바는 결코 반드시 철학을 통과해야 한다거나 아니면 이론 공부를 통과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는 반드시 책을 통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책을 통하든 아니든 자신의 삶 속에서 자기계몽의 길을 꾸준히 간다면 삶정치적 지성의 양성이 가능한 것이다. 8
사실 나는 이 글을 문학작품을 실마리로 시작했다. 그러나 글 자체는 철학적인 편이니 문학은 양념이라고 독자들이 느낄지도 모른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십오 소년 표류기』가 작품으로서 대작의 반열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이로써 글을 시작한 데는 의미가 있다. 문학공부는 제대로 이루어진 경우라면 글의 이치(문리文理)를 두루두루 몸에 새기는 훈련을 하게 해주며, 이것이 더 확대되면 기호의 의미를 읽어내는 훈련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만물은 잠재성과 현실성의 마디결합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모두가 기호에 다름 아니기 때문에 이 훈련은 곧 세상을 읽는 훈련이 된다.
문학(예술)공부는 다양체(이 세계 자체)가 다양한 형태로 제시된 형상들을 작품에서 접하는 공부이기 때문에 앞에서 말한 근대적 유형의 총체에 쉽게 종속되지 않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공부가 잘못되면 원자화(파편들로의 분산)의 위험 혹은 블랙홀(특정 형태의 절대화 9)의 위험에 빠진다. 철학은 이와 달리 다양체를 다양화하는 ‘개념’을 포착한다. 그래서 원자화나 블랙홀의 위험은 없지만 반대로 개념들의 체계(근대적 유형의 총체)가 될 위험이 있다. 10
삶정치적 지성은 문학과 철학을 (그리고 과학을) 관통하고 가로지른다. 로렌스는 한 글에서 원래 철학과 문학은 하나였는데 마치 서로 다투는 부부처럼 이혼했다고 말한바 있는데, 이렇게 문학과 철학이 서로 하나였던 것은 그것이 모두 삶정치적 지성의 발로였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문학작품은 어디를 보든 삶형태들로 가득 차 있다. 과거의 삶형태라고 해서 그 시효가 무조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작품의 세계 즉 잠재적 세계는 시계의 시간(크로노스의 시간)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11 문학의 세계는 삶정치적 지성의 발휘를 통해 기존의 것들을 재료로 새로운 삶형태를 이렇게 저렇게 구체화해보는 실험 즉 시뮬레이션의 장소인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은? ‘국가철학’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철학은? 과학처럼 철학도 삶형태와의 관계가 불투명해 보이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사회적으로 널리 퍼진 어떤 철학관은 이런 생각을 충분히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말이다.) 문학이 새로운 삶형태를 이렇게 저렇게 구체화해보는 시뮬레이션의 장소라면 철학은 새로운 삶형태의 근간을 이룰 재료에 붙은 불순물을 제거하고 그 재료를 순수하게 만드는 대장간이다. (다만 이 대장간에서 벼려내는 물건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머를 들고 철학하기’라는 니체의 말은 이런 의미에서 실로 의미심장하다.
앞으로 문학과 철학이, 그리고 과학이 함께 모이는 것이 실로 필요하며 이는 자본과 국가를 기반으로 해서가 아니라 삶정치적 지성을 기반으로, 즉 새로운 삶형태의 창출을 위해 이루어져 할 것이다. 12
경험의 차원을 넘어가기
< 「‘십오 소년 표류기’2」에서 계속>
- 원제는 ‘Deux ans de vacances’(2년 동안의 휴가)이다. [본문으로]
- 미리 말해두지만 이 글은 「15소년 표류기」에 대한 비평으로 의도된 것이 아니고 이 작품을 실마리로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소설의 내용과의 정밀한 적합성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만일 그것이 중요하다면 그 작품을 다시 읽고 상세히 검토했겠지만, 그런 수고를 애써 하지는 않았다. [본문으로]
-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는 어떤 손님이 집에 가져왔다 놓고 간 『고금소총』도 읽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 못하면서······ [본문으로]
- 들뢰즈·가따리의 말로는 ‘불충분한’ 추상, 재영토화에 종속된 추상이다. [본문으로]
- 니체,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본문으로]
- 한 가수가 광고에서 ‘토익은 기술’이라고 유혹한다. 토익은 그렇다. 그러나 영어실력은 절대로 기술이 아니라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토익이 문제인 것이다. [본문으로]
- 미국의 유명한 경영 전문가 크리스토퍼 마이어(Christopher Meyer)는 최근에 낸 책 Standing on the Sun에서 자본주의가 새롭게 변모하고 있다고 지적하는데, 이 새롭게 출현하는 자본주의에서는 과거 자본주의 경제의 공리들이었던 경쟁, 이윤추구, 지적 재산의 사유화 등이 협동, 가치추구, 지적 재산의 공유로 바뀌고 있으며 이것이 혁신과 성장을 낳고 있다고 한다. 한국의 ‘기업 친화적’ 교육은 이에 대한 대비는커녕 오히려 대비의 싹을 다 말려죽이고 있는 것이다. [본문으로]
- 책에 의존하는 것이 사람을 ‘반작용적’(reactive)으로 만드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이미 니체가 지적한 바 있다. 니체는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장점을 책에 의존하기보다 상인인 아버지와 함께 유럽 전역을 다니면 많은 사람을 만난 데서 찾고 있다. 6조 혜능은 글을 읽을 줄 몰랐다고 한다. 그런데 책을 읽다가 모르는 부분을 가지고 가서 혜능에게 물어보면 물어본 사람에게 읽어보라고 하고 듣고 나서 그 의미를 설명해주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 문학주의는 문학 자체를 절대화한 것이다. 진정한 문학공부는 문학주의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본문으로]
- 헤겔의 경우가 가장 대표적일 것이지만, 넓게 보면 네그리가 ‘국가철학’이라고 부른 것이 이에 속하고, 들뢰즈가 『차이의 반복』에서 ‘사유의 이미지’라고 부른 것에 종속된 철학이 이에 속한다. [본문으로]
- 삶정치적 지성의 관점에서는 지난 것도 적절한 변경을 가하면 미래의 새로운 삶형태의 재료로 쓰일 수 있다. 건강한 선별이 중요할 뿐이다. 니체의 ‘eternal recurrence’가 가진 적극적 의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건강한 선별에 있다. [본문으로]
- 이런 의미에서 인문학과의 결합을 그리는 자연과학자들의 생각도 경청해야 할 것이다. lya Prigogine, From Being to Becoming: Time and Complexity in the Physical Sciences (San Francisco: W. H. Freeman and Company, 1980) “‘두 문화’의 존재는 서로에 대한 관심의 결여에 기인할 뿐만 아니라 과학적 접근이 문학과 예술에 속하는 시간이나 변화와 같은 문제들에 대하여 할 말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도 적어도 부분적으로 기인한다. (...) 흥미롭게도 유럽과 미국 모두에 철학적 주제들과 과학적 주제들을 더 가까이 접근시키려는 강한 흐름이 있음이 주목된다.”(xvi)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시간의 문제와 변화의 법칙에 이러저러한 식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고, 반대로 시간의 문제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우리 시대의 문화적ㆍ사회적 변화에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xvii)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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