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오 소년 표류기’2
경험의 차원을 넘어가기
아마 문학은 경험의 차원과 연관되고 철학은 경험을 넘어서는 차원(‘구름 잡는 이야기’의 차원?)과 연관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문학 활동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문학이 경험을 원천으로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을 것으로 안다. 사실 비교적 긴 문학비평의 역사에서는 이미 판정이 나있다. 예컨대 개인이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말하는 데 그친 소설을 ‘사(私)소설’이라고 한다. 더 넓히면 ‘사문학’이다. 물론 정신세계의 크기가 자신의 개인적 삶의 좁은 틀을 아직 넘어가지 못한 작가들이 낳은 열등한 부류의 문학이다. 저널리즘이 어떤 소설의 어떤 등장인물은 작가의 몇 번째 애인이었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식으로, 사문학적 측면에 (지저분하게도) 관심이 많든 아니든 말이다. 1
사문학에 결여되어 있는 것은 개인적 경험을 넘어서는 어떤 차원이다. 이 차원은 그 작가의 것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개인적 경험들로 이동한다고 해서 도달되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개인적 경험들을 자신의 것에 추가하여 아무리 쌓아도 이것이 개인적 경험의 차원을 벗어나는 것을 보장해주지는 않는 것이다. 이는 돈을 자기 소유로 아무리 많이 쌓아도 자본을 구성하는 가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삶의 의미심장함을 구성하는 가치들로 한 발자국도 옮겨가지 못하는 것과 같다. 사실 경험의 차원을 넘어가는 것은 굳이 다른 사람들의 경험에 눈을 돌리지 않고 자신의 경험에 집중해서도 가능하다. 이것은 ‘형상화’, ‘승화’, ‘비인격화’(impersonalization) 2, 탈인격화(dépersonnalisation) 3 등의 이름으로 불려왔다. 이 이외에도 내가 알지 못하는 여러 사람이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렀을 것이다.
자신의 경험에 머물면서도 경험의 차원을 넘어가는 것은 달리 말하자면 자신의 경험을 기호로 보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기호’라는 말을 최고의 의미에서 사용했지만, 사람들은 최저의 의미에서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특히 들뢰즈가 ‘acculturation’(문화보급)이라고 말한 현상이 진행된 사회일수록 그렇다 4. 따라서 경험을 기호로 본다는 말을 더 설명해야 할 것이다.
만물은 감각의 대상인 측면(현실성의 차원)만큼이나 감각을 넘어가는 측면(잠재적 차원)을 가지고 있고, 이 두 측면을 가로질러서 이미 알려진 측면만큼이나 미지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물에 대해 아무리 많이 알아도 이 네 측면은 항상 존재한다. 미지(未知)의 측면을 전제로 할 뿐만 아니라 더 우선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만물을 최고의 의미에서의 기호로 보는 태도이다. 왜냐하면 모든 새로운 것은 결국 미지의 측면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미지의 측면을 배제하고 감각 가능한 측면과 감각을 넘어선 측면 모두에서 이미 알려진 것의 반복으로만 만물을 보는 것이 최저의 의미에서의 기호의 관점이다. 5
따라서 자신이 어떤 경험을 했을 때 그것을 최고의 의미에서의 기호로 본다는 것은 그 경험에서 경험을 넘어선 차원, 저 앞에서 이야기한 무한한 탐구와 모험의 차원으로 열리는 창문, 혹은 웜홀(wormhole)을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차원에서 경험과 관련한 경험자의 특이한 활력이 발휘되게 된다. 바로 이 차원에서 새로운 삶형태의 상상이 이루어지고 자신을 어떤 식으로든 속박했던 기존의 현실은 이제 새로운 삶형태의 재료로서 갈무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자신의 경험을 최저의 의미에서의 기호로 볼 때, 그 개인은 이미 존재하는 삶형태에 갇히며 자신을 그 삶형태 안에서, 그것에 적응하며 혹은 성공의 형태로 혹은 실패의 형태로 살아갈 존재로밖에는 생각하지 못하게 된다. 이 경우 새로운 사유는 발생하지 못하며 모든 인식론적 행동은 이미 존재하는 인식의 반복으로서만 즉 소통으로서만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경험과 관련된 두 가지 차이나는 행동방식을, 경험을 타고 경험 너머로 가는 것과 그렇게 넘어가지 못하고 경험의 (근대적 총체 유형의) 양적 확대로 향하는 것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 3장 「사유의 이미지」에서 전자를 “능력들의 탁월한 혹은 초경험적 발휘”(exercice supérieur ou transcendant des facultés)라고 불렀고 이러한 사유방식을 “탁월한 경험론”(un empirisme supérieur)이라고 불렀다. 6 후자는 “경험적 발휘”(un exercice empirique)라고 불렀다. 앞으로 이 글에서 우리는 (편의를 위해서) 경험을 최저의 의미에서의 기호로 보는 후자의 차원을 ‘경험적 차원’이라고 부르고, 경험을 최고의 의미에서의 기호로 보는 전자의 차원을 ‘초경험적 차원’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초경험적 차원’이 바로―그것이 양적인 관점에서는 아무리 미미하게 보이더라도―삶정치적 지성이 활동하는 차원이며, 이는 문학에서든 철학에서든 일상적 사유에서든 마찬가지이다. 앞에서 나는 삶정치적 지성의 관점이란, 기존의 삶을 재료로 새로운 삶형태를 지으려는 예술가적 관점이라고 말한 바 있다. 로렌스는 「토머스 하디 연구」에서 예술 형식이 생겨나는 원리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험’이나 ‘초경험’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는다.)
예술 형식은 ‘사랑’(Love)과 ‘법칙’(Law)이라는 두 원리들이 갈등하면서도 묘합(妙合)된 상태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순수 운동이 정신(Spirit)에게 대항하면서도 화해한 상태이며, 능동적인 힘이 불활성 7과 만나서 그것을 극복하면서도 극복하지 않은 상태이다. 형식을 이루는 것은 바로 이 둘의 결합이다. 이 둘은 항상 새로운 조건에서 만나야 하므로, 형식은 항상 다르게 마련이다. 모든 예술작품은 고유한 형식을 가지며 이는 다른 형식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젊은 화가가 나이든 대가를 공부할 때 그는 존재하지 않는 추상물인 형식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나이든 위대한 대가의 방법을 공부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이 공부는 주로, 어떻게 그 노대가가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사랑’과 ‘법칙’의 갈등을 겪고 그것이 묘합에 이르도록 하였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루어진다. 예술 방법을 별개로 하면, 젊은이가 공부하는 것은 ‘예술’(Art)이 아니라 노대가의 ‘영혼의 상태’이며, 그렇게 해서 젊은 예술가는 자신의 영혼을 이해하게 되고 열망과 그 열망에 저항하는 것 사이에 묘합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8
여기서 ‘사랑’ 즉 “운동에의 순수 의지”(pure will to motion)는 앞에서 말한 무한대의 차원으로 향하는 열망을 나타낸다. 만일 인간에게 이것만이 존재한다면 사실 그 결과는 죽음이다. (아니면 신선이 되거나···) 모든 정신은 몸과 함께 하듯이, 인간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어떤 물질적, 신체적 차원이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법칙’이다. 로렌스는 이를 “운동에의 순수 의지와는 다른, 삶의 다른 반쪽인, 살아있는 긍정적인 불활성”(the living, positive inertia which is the other half of life, other than the pure will to motion)이라고도 부른다. 9 ‘사랑’이 ‘법칙’없이 존재할 때, 그것은 관념론이 된다.
‘사랑과 법칙의 묘합’이라는 로렌스의 통찰이 이른바 ‘초경험적 발휘’의 탁월한 사례임은 어떤 작가가 가진 사상(‘형이상학,’ ‘도덕’) 혹은 삶에 대한 이론과 작품의 관계를 짓는 방식에서 나타난다. 로렌스는 작가의 사상이 ―사람인 이상 삶에 대해 어떤 이론을 가지게 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로렌스는 말한다―작품에서 “본질적인 비판”을 받게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비판의 정도가 바로 그 작품의 “지속적인 가치와 만족”을 구성한다고 말한다. 사실 한 사람이 이미 획득한 지식 혹은 이론, 사상, 철학 등이야말로 그 사람의 ‘경험적 차원’을 구성하는 가장 강력한 요소이다. 사람은 대부분의 동물과 달리 자신의 경험을 자신의 사상으로 일반화한 형태로 전유하며 그것을 자신의 재산으로 삼는 습성이 있다. 그런데 재산은 곧 울타리이기에 재산의 소유자는 자신이 모를 뿐이지 그 울타리에 갇히게 된다. 예술작품은 바로 이 일반화된 경험에 비판을 가하며, 그럼으로써 울타리를 헐고 경험의 차원에 문을 내어 저 청랑한 미지의 하늘로, 무한한 자유의 공간으로 열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로렌스에게는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들뢰즈에게는) 글쓰기를 포함한 예술창작이란 이미 가지고 있는 확연한 생각의 표현(즉 전달)이 아니라 ‘생성’이며 ’떠나기’이다. 10
[덧붙임]
글쓰기에서의 생성 즉 경험의 차원을 넘어서기에 대한 들뢰즈의 말을 한 대목 더 들어보자.
글쓰기는 분명 살면서 겪은 경험이라는 재료에 (표현의) 형식을 부과하는 일은 아니다. 문학은 오히려, 곰브로비치(Gombrowicz)가 실천하고 또 말했듯이, 좋지 않은 형식을 가진 것 혹은 불완전한 것의 방향으로 움직인다. 글쓰기는 생성(becoming)의 문제이며, 항상 미완이고, 늘 형성되는 도중에 있으며, 살면서 겪을 수 있는 혹은 그렇게 겪은 소재를 넘어선다. 그것은 과정이며, 살면서 겪을 수 있는 것 혹은 그렇게 겪은 것 모두를 가로지르는 ‘삶’의 이행(移行)이다. 글쓰기는 생성과 분리할 수 없다. 글쓰기에서 우리는 여성이 되고 동물 혹은 식물이 되며 인식할 수 없게 될 정도까지 분자적이 된다. 11
‘이기묘합’
‘사랑과 법칙의 묘합’이라는 로렌스의 통찰은 기존의 삶을 재료로 새로운 삶형태를 구축한다는 말이 자칫 오해될 수 있는 것을 피해가게 해주기도 한다. 어떤 것을 재료로 새로운 형태를 구축한다고 할 때 그 형태가 상위에 놓이고 재료가 그 상위의 것에 종속된다고 이해되기 쉽다. ‘matter’(물질 혹은 재료)에 ‘form’(형식)이 부과된다는 생각은 근대 이후의 사회에서 널리 보급된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법칙의 묘합’은 이러한 ‘물질-형식’이라는 틀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우선 이 ‘묘합’에서는 ‘사랑’과 ‘법칙’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상위에 놓이지 않는다. 만일 어느 하나가 상위에 놓인다면 그것은 로렌스가 말하는 ‘묘합’이 아니다. 로렌스는 실제로 한쪽이 기울어진 결합의 사례로 에우리피데스와 스윈번(Swinburne) 12을 든다. 전자는 ‘사랑’에 치우친 사례이고 후자는 ‘법칙’(육신)에 치우진 사례이다. 13 또한 ‘사랑’과 ‘법칙’은 헤겔의 변증법에서처럼 하나가 다른 하나를 통합하지도 않는다. 둘은 갈등을 멈추지 않으며 다만 이례적인 경우, 즉 예술작품이 탄생하는 경우에만 묘합의 관계를 이룬다. 로렌스는 이것을 결혼의 완성으로서의 ‘합궁’(consummation)에 비유한다. 14
신랑과 신부가 더 가까워질수록 [신부의] 반응과 저항은 더 섬세해지고 식별불가능하게 되며, 이러한 합궁의 상태에서 운동은 그만큼 더 ‘하나가 된 둘’(Two-in-One)의 운동이 된다. 여기서 둘은 식별 불가능하게 되는데, 이는 둘이 서투르게 합쳐지는 운동이 아니다.
이렇듯 ‘묘합’은 헤겔의 변증법 방식이 아니라 음양이 뚜렷이 구분되는 태극(太極)의 상태에서 무극(無極)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내가 이러한 것이 서양 철학에서 포착되는 것을 본 것으로 들뢰즈·가따리가 말하는 ‘식별 불가능성의 지대’(the zone of indiscernibility)라는 개념이 있다. 이는 절대적 탈영토화의 경우에 일어난다. 절대적 탈영토화는 ‘탈영토화하는 요소’와 ‘탈영토화되는 요소’를 함축하는데, 이 중 하나는 표현에 할당되고 다른 하나는 내용에 할당된다. (여기서 ‘탈영토화하는 요소’는 로렌스의 ‘사랑’에 상응하고 ‘탈영토화되는 요소’는 ‘법칙’에 상응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탈영토화는 재영토화의 위험에 항상 노출된다. 재영토화된다 함은 그것에 어떤 형식이 부과되는 것, 그리고 그 부과된 형식에 갇히는 것이다. 따라서 ‘탈영토화하는 요소’와 ‘탈영토화되는 요소’는 형식이 부여된 것과 형식이 부여되지 않은 것으로 다시 나뉜다. 그 결과로 들뢰즈·가따리에게 특유한 4가적 성격의 이중마디결합이라는 구도(다이어그램)가 등장한다. (앞에서 언급한 ‘물질-형식’이라는 2가적 구도는 설 자리가 없다.) 이 구도를 구성하는 항목들은 맥락마다 조금씩 이름을 달리하기도 하지만, 그 4가적 성격에는 변함이 없다. 15 예컨대 들뢰즈·가따리의 개념인 ‘배치’(agencement)― 이는 실재의 단위이다― 의 경우는 아래와 같이 그려질 수 있다. (왼쪽을 표현으로 부르고 오른쪽을 내용으로 부르든 아니면 그 반대이든 관계없다. 빗금 친 부분은 (재)영토화를 나타내고 빗금이 없는 부분은 탈영토화를 나타낸다.)
이것은 일반적인 상태이다. 들뢰즈·가따리 자신들의 말로는 “내용과 표현의 변수들이 그 상호 전제하는 이질적 형식들에 따라 공재의 평면에 분포된” 상태이다. 앞에서 말한 ‘묘합’의 상태, 극치의 상태, ‘식별 불가능성의 지대’가 발생하는 상태는 이와 다르다. 이는 “이 평면의 가변성이 형식의 이원성을 압도하여 두 형식을 ‘식별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내용과 표현의 변수들을 구분하는 것조차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그러한 상태이다. 이것이 바로 “탈영토화의 절대적 문턱”이다. 16
이런 경우 위의 그림은 아래와 같은 식으로 변형될 수 있다. 탈영토화된 된 두 영역이 점점 서로 식별 불가능하게 되면서 태극이 무극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17 (이런 ‘사건’은 들뢰즈·가따리가 철학 개념으로 설명한 만큼이나 문학작품을 놓고도 설명할 수 있다. 사실 로렌스도 셸리의 시를 놓고 예의 ‘묘합’을 설명한다. 셰익스피어에게서는 더 훌륭한 사례를 듬뿍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나중의 작업으로 돌린다. 지금 1회로 그치려고 한 이 글이 자꾸자꾸 길어지고 있다.)
‘묘합’, ‘절정’, ‘절대적 탈영토화’는 잠재적으로는 언제나 존재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가끔씩만 발생한다. 그 현실화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어려움이 종종 우리를, 예술작품은 원래가 소수의 천재적 예술가들이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새로운 삶형태의 창출도 소수의 뛰어난 ‘지도자들’이나 ‘전문가들’ 혹은 ‘천재들’의 일이지 먹고 살기도 쉽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넘볼 것은 못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이끌 수 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 전체를 놓고 보면 삶정치적 지성이 더 우세한 편이었다고 말하는 게 사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우선 인류에게 가장 오래된 공동체인 커먼즈(commons)는 못나면 못난 대로 그 구성원들 스스로의 힘에 의하여 운영되었다. 그 활력(생산력)이 자연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어서 그렇지, 커먼즈 공동체는 구성원들이 운영하는 대로 존재했다. 국가가 자본과 함께 커먼즈를 역사의 전경에서 배경으로 밀어낸 것이 바로 근대의 시작이지만, 성공한 커먼즈의 경우 자원을 보존하는 능력은 지구를 거의 사망시키기에 이른 국가와 자본보다 더 뛰어나면 뛰어났지 결코 못하지 않았다. 더욱이 탈근대에 들어와서 디지털 커먼즈의 출현과 함께 국가도 자본도 아닌 커먼즈의 형태로 우리의 삶을 재구성할 현실적 가능성이 전지구적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 매우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아직은 이 글에서 커먼즈 논의를 할 때가 아니다. 먼저 우리는 보통 사람들에게 삶정치적 지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연히 입증할 예술이 실제로 존재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고딕예술
존 러스킨이 주목한 고딕 예술이 그 증거이다. 18 러스킨의 설명에 따르면 ‘고딕’(Gothic)이라는 말은 비난의 의도에서 나온 말이며, 북구 민족들의 야만적 성격을 표현한다고 한다. (이 단어가 언제 북구의 건축에 처음 사용되었는지는 러스킨도 모른다고 한다.) ‘고딕 예술’이란 우리말로 하면 ‘오랑캐 예술’ 정도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러스킨은 이 고딕 예술에 담긴 원리를 밝혀냄으로써 ‘고딕’이라는 말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옮겨놓았다.
러스킨이 고딕 예술의 특징으로 드는 것은 야만성(Savageness), 변화무쌍함(Changefulness), 자연주의(Naturalism), 우스꽝스러움(Grotesqueness), 뻣뻣함(Rigidity), 과잉(Redundance)의 여섯 가지이다. 여섯 가지 모두를 자세히 살펴보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여기서 그럴 여유는 없다. (한 가지, 위의 특징들을 말만으로 판단하면 안 되고 반드시 직접 읽어서 맥락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점을 말해두겠다.) 여기서는 첫 특징인 ‘야만성’ 부분에 집중할 것이다.
충격적인 점부터 미리 말해보자. 그리스 건축은 일반적으로 예술적으로 뛰어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러스킨의 관점에서 그리스 건축은 (정확하게는 “건축 장식”architectural ornament의 체계는) ‘노예적’(servile)이다. 열등한 장인(匠人)의 솜씨 혹은 힘이 우수한 장인의 지성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그리스 건축 장식은 완벽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하급 장인은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들―구(球) 모양, 용마루 모양, 완전히 대칭되는 나뭇잎 모양―만 맡고 복잡한 형태는, 더 나아가 형태의 발명은 상급 장인들이 담당한다. 여기서 노예화의 핵심은 기술의 차이에 따른 위계화라기보다는 형태의 발명하는 지성과 형태를 구현하는 기술 사이에 분리가 일어난다는 점이다. 대다수의 장인들이 미리 정해져 자신에게 주어지는 형태들을 정확하게 구현하는 일에만 종사한다. 그러나 “인간은 본래 도구와 같은 정확성을 가지고 작업을 하거나 정확하고 완벽하게 행동할 수가 없는 존재이다. 인간에게서 그런 정확성을 끌어내려 한다면, 손가락으로 톱니바퀴처럼 수치를 측정하게 만들고 팔로 컴퍼스처럼 곡선을 그리게 만든다면, 이는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것이다.” 19
이런 방식을 택하는 그리스 건축 장식은 아마도 그 결과물에서는 높은 수준의 세련됨을 자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러스킨의 눈에는 이것이 다르게 보인다. 러스킨은 건축 장식의 어느 부분에서나 그 부분을 담당하는 장인의 사유가 (그것이 아무리 변변찮은 것일지라도) 발휘되었는가, 아닌가를 , 즉 그가 자신만의 형태를 발명했는가 아닌가를 본다. 그것이 아무리 기술적으로 서투르게 구현되었더라도 말이다. 그리스의 건축 장식은 기술은 뛰어나지만 발명은 거의 부재하기 때문에 러스킨에게는 죽어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죽어있”다는 말은 단지 비유적 표현이 아니다. 러스킨에게 기술적 불완전함이란 건축 장식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정도는 우리가 삶에 대해 아는 모든 것에 필수적이다. 그것은 유한한 몸에 들어있는 삶의 활력(생명력)을 나타낸다. 즉 진전과 변화의 상태를 나타낸다. 살아있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엄밀하게 완전하지 않고 그럴 수도 없다. 그 일부는 부패하고 다른 일부는 새로 생긴다. 3분의 1은 꽃눈이고 3분의 1은 만개해 있으며 나머지 3분의 1은 과거가 된 디기탈리스 꽃은 이 세상에서의 삶의 전형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것에는 어떤 불규칙성들과 부족함들이 있는데, 이는 삶의 표시일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의 원천이다.” 20
러스킨이 ‘혁명적’이라고 부르는 고딕 예술은 “불완전함으로 가득하고 모든 손길마다 그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단편들”로 이루어진, 그러나 “장중하고도 나무랄 데 없는 온전체”이다. 21 고딕 성당의 전면을 보면, 못생긴 도깨비들(goblins), 모양이 확실하지 않은 괴물들, 해부학적으로 맞지 않고 뻣뻣한 상들이 잔뜩 보인다. 그러나 이들을 조롱하면 안 된다고 러스킨은 말한다. 이들은 “그 돌에 정을 댄 모든 장인의 생명력과 자유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 어떤 법도, 면허장도, 자선사업도” 가져다줄 수 없는 “그러한 사유의 자유로움이요 존재의 등급에서의 위치”를 나타낸다. 22
고대 베네치아(베니스)의 유리 공예도 ‘혁명적’ 유형에 속한다. 그리스 유형에 속하는 영국의 장인은 무늬를 정확하게 일치시키고 곡선을 완벽하게 구현하고 가장자리를 완벽하게 날카롭게 하는 것만 생각한다. 그리하여 곡선을 둥글게 하고 가장자리를 날카롭게 하는 단순한 기계가 된다. 그러나 베네치아의 장인은 가장자리가 날카로운지 아닌지를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만드는 모든 유리마다 새로운 디자인을 발명했으며 손잡이나 주둥이를 주조할 때마다 새로운 상상을 불어넣었다. 베네치아의 유리는 만든 이의 능력에 따라 추하기도 하고 예쁘기도 하다. 그러나 유리마다 형태가 다 다르다. 그리고 그 다른 형태마다 사유가 깃들어있는 것이다.
손과 머리를 어떤 수준에서든 누구에게서든 분리시키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핵심이다. “사유가 건강하게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동에 의해서이며, 노동이 행복하게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유에 의해서이다. 양자가 분리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23 러스킨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당시의 영국 노동계급(산업노동계급)의 비극적 상태를 진단한다. 영국 노동자들이 ‘사유’를 잃었다는 것, 그럼으로써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잃고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인 것이다.
현재의 다중은 러스킨 시대의 노동계급이 아니다. 또한 자본주의 자체도 심대한 변화를 겪었다. 24 우리는 이제 모두가 나름대로 삶정치적 지성의 발휘자가 되어서 새로운 형태의 삶을 고딕 성당처럼 “장중하고도 나무랄 데 없는 온전체”로서 지어 올릴 현실적 가능성이 우리 앞에 열린 시대를 살고 있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현 상황이 아무리 어둡고 괴로운 것일지라도 지구 전체로는 변함 없는 사실이다.
[덧붙임]
들뢰즈·가따리는 『천 개의 고원』12장에서 고딕 건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딕 건축은 실로, 로마네스크 교회들보다 더 오래 가고 더 큰 교회들을 지으려는 의지와 분리될 수 없다. 더 넓게, 더 높게······ 그러나 이 차이는 단순히 양적이지만은 않다. 그것은 질적 변화를 나타낸다. ‘형식-물질’이라는 정태적인 관계가 뒷전으로 물러나고 ‘미시물질-힘’([불] matériau-forces)이라는 역동적 관계가 앞에 부각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돌출하는 힘을 잡아 조절할 수 있고 더 높고 오래가는 둥근 천장을 구축할 수 있는 미시물질로 돌이 바뀌도록 돌을 깎는다. 둥근 천장은 더 이상 형식이 아니라 돌의 연속적 변이의 선이다. 25 그것은 마치 로마네스크가 부분적으로 홈 패인 공간에 남아있다면 (이 경우에는 둥근 천장은 기둥을 나란히 세우는 데 의존한다) 고딕은 매끄러운 공간을 점한 것과 같다.
< 「‘십오 소년 표류기’3」에서 계속>
- 저널리즘은 그 본성상 로렌스가 말한 ‘작은 더러운 비밀’(dirty little secret)에 관심이 많은 듯하다. [본문으로]
- F. R. Leavis의 말이다. [본문으로]
- Gilles Deleuze, Pourparlers. [본문으로]
- Gilles Deleuze, Pourparlers. 창조성을 억압하는 이 현상은 주로 선진국에서 대중매체에 의해서 일어나며 검열보다 더 나쁘다고 들뢰즈는 말한다. [본문으로]
- 기호를 ‘기표’와 ‘기의’의 결합으로 보는 것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본문으로]
- 칸트에게서는 ‘transcendental’과 ‘transcendent’가 구분되지만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양자모두를 (칸트의 용어가 아니라 자신의 용어로 사용할 때에는) 경험을 넘어선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본문으로]
- 로렌스가 말하는 ‘불활성’(inertia)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음’(陰)에 해당한다. 물론 ‘순수 운동’ 혹은 ‘능동적인 힘’이 ‘양’(陽)이다. [본문으로]
- D. H. Lawrence, “Study of Thomas Hardy,” Phoenix. [본문으로]
- 다른 곳에서 로렌스는 이것을 “half-created”라고 형용하기도 했다. [본문으로]
- “로렌스에 따르면 문학의 최고 목적은 ‘떠나고, 떠나고, 탈출하고···지평을 넘어서 다른 삶에 진입하는 것이다’”라고 들뢰즈는 말한다. Gilles Deluze, “On the Superiority of Anglo-American Literature,” Dialogues. [본문으로]
- Gilles Deleuze, “Literature and Life”, Essays Critical and Clinical. [본문으로]
- 영국 빅토리아조의 시인. [본문으로]
- 육신에 치우친 경우 ‘Love’는 ‘Love’가 아니라 ‘passion’이 된다고 로렌스는 말한다. [본문으로]
- ‘consummation’은 맥락에 따라 ‘총합, 성취, 달성, 결론, 완결, 절정, 극치’ 등으로 옮겨질 수 있다. [본문으로]
- 들뢰즈·가따리는 이 그림에서 위의 두 영역만을 가지고 말하는 경우에는 (사실 창조적 생성을 말하는 경우에는 아래쪽이 군더더기일 뿐이다) ‘material-force’([불] matériau-forces)라는 구도로 ‘matter-form’([불] forme-matière) 구도를 대신한다. ‘material’은 분자화된 ‘matter’이다. 그리고 그것은 고정시키고 가두는 ‘형식’과 연관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형식에 갇히지 않는 우주의 힘인 ‘force’와 연관지어진다. 사실 ‘material-force’ 관계는 ‘순음’(純陰)과 ‘순양’(純陽)의 관계에 가깝다. [본문으로]
- 이상 Gilles Deleuze and Félix Guattari, A Thousand Plateaus, 4장. [본문으로]
- 이런 그림은 늘 이해를 돕기 위해 단순화하는 것이므로, 그림에서 어떤 취지를 읽어야지 그림을 모든 내용의 비례에 따른 재현으로 보면 안 될 것이다. [본문으로]
- 이하 고딕 예술에 관한 이야기는 존 러스킨의 『베네치아의 돌들』(The Stones of Venice) 6장 「고딕 예술의 성격」의 주요 내용이다. [본문으로]
- John Ruskin, The Stones of Venice (New York : The Caxton Press 1891), p. 161. [본문으로]
- The Stones of Venice, p. 171. [본문으로]
- The Stones of Venice, p. 160. [본문으로]
- The Stones of Venice, p. 163. [본문으로]
- The Stones of Venice, p. 169. [본문으로]
- 이에 대해서는 한 절을 따로 할당할 것이다. [본문으로]
- 어떤 형태가 주어지고 그 형태를 현실화하기 위해서 돌들을 (요즘처럼) 콘크리트 등으로 연결한 것이 아니라 돌들이 각각 하나의 힘으로서 연결된 것이 그대로 형태가 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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