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오 소년 표류기’ 3
초과로서의 아름다움
앞에서 “살아있는 모든 것에는 어떤 불규칙성들과 부족함들이 있는데, 이는 삶의 표시일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의 원천이다”라는 러스킨의 말을 인용한 바 있다. 여기에 삶정치적 지성의 관점에서 아름다움이란 과연 무엇인지가 암시되고 있다. 이것이 명확하게 표현된 사례 가운데 하나가 네그리의 『다중과 예술』이다. 여기서 네그리는 ‘초과’(excedence) 1를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꼽는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이란 새로운 존재이고 집단적 노동을 통해 구축되는, 노동의 창조적 활력에 의해 산출되는 초과입니다. 아름다운 사건을 결정하는(낳는) 이 생산, 아름다움의 이러한 생산이 바로 명령으로부터 해방된 노동입니다. 이 노동은 추상적이며 추상적일수록 존재의 초과를 산출하는 능력을 가집니다. 이것들이 아름다움의 정의의 주된 요소들입니다. 2
초과는 우선 척도(측정 가능성)와의 대조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척도로 측정될 수 없는 일(‘사건’)이 일어날 때 초과가 발생한다. 그게 무엇이든 어떤 것(Δ)이 새로 생겼다고 해보자(가장 왼쪽 그림). 이 ‘Δ’가 기존의 것을 재는 것과 같은 척도로 측정될 때(가운데 그림), 그것은 기존의 척도에 종속되게 된다. 가격을 달게 되는 모든 상품은 교환가치의 측면에서는 바로 이런 식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이 ‘Δ’가 기존의 척도로 측정되어질 수 없을 때, 바로 이때가 ‘초과’가 발생하는 때이다. 그런데 실제 현실에서는 초과와 척도에의 종속이 동시에 발생할 수 있다. (물론 앞에서 말한 ‘경험의 차원’에 갇히면 양자를 구분하는 능력에 문제가 생길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화가가 예술성이 뛰어난 그림을 그렸을 때, 그 그림은 예술작품으로서는 초과의 발생에 해당하지만(제대로 된 비평가는 이 측면에 집중할 것이다), 상품으로서는 척도에 종속되어 자본을 구성하는 가치의 증가(사업가로서의 화랑 주인은 이 측면에 집중 할 것이다)로 간주될 것이다. 자본주의에서의 삶은 이렇게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탈측정’ 혹은 ‘탈척도’의 측면 이외에 초과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다른 측면이 있다. ‘탈형식’ 혹은 ‘무형식’이 바로 그것이다. 새로운 특이성의 창출이야말로 초과의 진정한 의미인데, 이는 기존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형식(형태)의 창출이기 때문이다. 초과와 탈형식(무형식)의 연관성은 ‘숭고’에 대한 네그리의 생각에서 찾을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숭고(das Erhabene, the sublime)에 대한 이론으로서 칸트의 것이 유명하며 네그리의 논의는 이것을 이어받고 있다. 칸트에게서 숭고는 아름다움(das Schöne)과 대조된다. 아름다움이란 상상력이 대상의 형식(형태)을 성찰하는 데서 나온다. 그런데 (이 글에서 누누이 말하지만) 형식이란 곧 제한이다. 이에 반해 숭고는 상상력이 대상의 형식을 성찰하는 데서 한계에 처하는 경우에 발생한다. 이렇게 한계에 처할 때 상상력은 오히려 형식에 의한 제한으로부터 해방되고 전체를 총체로 보라는 이성의 소명에 응하면서 감각의 세계를 넘어서 이성이 거하는 초감(각)성(Übersinnlichkeit)의 세계로 상승하게 된다. 3 이제 상상력은, 칸트에게서는 인간 정신의 최고의 능력인 이성(Vernunft)을 대신하는 기능을 한다. 이성의 이념은 감각적으로 제시될 수 없는데, 숭고의 경우에는 이 이념이 해방된 상상력에 의해 직관 가능하게 제시되기 때문이다.
숭고의 감정이 다음과 같은 추상적 제시방식, 즉 감각적인 것의 측면에서 완전히 부정적이 되는 제시방식으로부터 손해를 입을 것이라고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상상력은 자신이 머물 수 있는 감각적인 것 너머에서는 실상 자신을 지탱할 것을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지만 바로 이러한 한계가 걷어지면서 그 자체가 한계지어지지 않는 것으로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래서 저 추상(Absonderung)은 무한의 제시이며 이는 바로 그 때문에 단지 부정적인 제시가 될 수 있을 뿐이지만 그러면서도 영혼을 확장한다. 4
사실 이는 마치 저 앞에서 말한 근대적 유형의 총체에서 탈근대적 유형의 다양체(차원의 무한대)로 이동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리고 이러한 이동은 곧 인간 정신의 힘의 표현이다. 칸트에게서 초점은 ‘숭고하다’고 판단되는 어떤 자연 대상이 아니라 그러한 판단을 하는 인간 주체의 힘, 인간의 정신적 힘, 이성의 이념의 힘에 두어진다. “따라서 자연에서의 숭고에 대한 느낌은 우리의 소명에 대한 존중이다. 이 존중을 우리는 자연 속의 대상에게 ‘허위진술’(subreption)―우리의 주체에 있는 인간의 이념에 대한 존중 대신 대상에 대한 존중을 택하는 것―을 통하여 보이는 것이다.” 5
사실 칸트가 말하는 이러한 이동은 이미 네그리가 말하는 ‘초과’에 해당한다. 그러나 네그리는 몇 가지 점에서 칸트와 다르다. 네그리는 칸트가 말한 두 유형의 숭고―수학적 숭고(das mathematisch Erhabene)와 역학적 숭고(das dynamisch Erhabene)―를 자본주의, 근대, 보편화된 시장 등과 연관되는 부정적인 유형의 숭고로 보고, 이것을 극복한 “숭고의 셋째 모델”을 제시한다. 이 “숭고의 셋째 모델”이 칸트에서의 숭고와 다른 점은, 칸트의 경우에는 대상을 전유하는 정신적 힘으로서의 상상력하고만 연관시키는 반면에 네그리에게서는 상상력이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특이한 것을 발명하여 실천적으로 구성해내는 행동으로서 실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에게서 초과는 정신에서만 일어나는 반면에 네그리에게서 초과는 몸과 정신이 함께하는 실천적 행동에 의해 구축되는 새로운 존재의 형태로 일어나는 것이다.
네그리에게서는 이렇게 구축된 특이한 존재, 즉 “숭고의 셋째 모델”이 바로 아름다운 것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말했듯이, 칸트의 도식론이 정식화하기 시작한 아름다운 것의 이미지를 회복합시다. 우리는, 수학적 무한의 한계점 위에 조직되는 숭고 너머에, 혹은 둘째 모델에 따라 자연의 엄청난 힘에 의해 고양되는 숭고 너머에, 윤리적 행동으로, 다중의 텔로스의 구성으로 구체화되는 숭고의 셋째 모델이 있다고 주장해야 할 것입니다. 이 모델은 (스피노자의) 사랑(amor)이 욕망(cupiditas)의 운동을 완결하면서 구축하는 가장자리에서 나타납니다. 6 윤리적 숭고로서의 공통적인 것, 미적 숭고로서의 공통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생성(anthropogenesis)과 기술생성(technogenesis)의 이러한 교차로써 정신주의적 신비화에 맞서야 합니다. 이 교차는 공통적인 것의 구성의 표시인 동시에 공통적인 것의 드러남의 표시입니다. 7
이렇듯 네그리의 아름다움 개념(초과를 필수적으로 함축한다)과 칸트의 아름다움 개념(초과를 함축하지 않는다)은 다르다. 그러나 네그리의 아름다움 개념은 칸트의 숭고 개념과 내용상으로 통하며, 그 초점은 인간의 주체적 힘의 긍정에 있다. 이미 말한 바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말이다.
초과로서의 아름다움은 척도를 넘어가고 기존의 형식을 넘어가는 것이기에 그 자체로 정신의 새로워짐과 병행되며, 따라서 새로운 사유를 함축한다. 따라서 초과로서의 아름다움은 곧 지성(삶정치적 지성)의 발휘이다. 이 관점에서 고딕 예술을 보면 러스킨의 통찰이 가진 중대한 의미가 드러난다. 러스킨에게는 어떤 작품에서 ‘발명’을 찾는 것이 최우선이다.
항상 우선적으로 발명을 찾으라. 그런 다음에 그 발명을 도우며 발명자가 고통스러운 노력이 없이도 할 수 있는 만큼의 실행을 찾으라. 그 이상은 찾지 말라. 무엇보다도 사유가 부재하는 곳에서 실행의 세련됨을 요구하지 말라. 이는 해방되지 않은 노예의 노동이기 때문이다. 8
러스킨에게 아름다움의 문제는 곧 사유의 문제이고 사유의 문제는 곧 자유의 문제가 된 것이다.
이에 덧붙여 이러한 러스킨의 통찰이 필연적으로 다중지성으로 통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러스킨의 고딕 예술론의 밑바닥에 깔린 현실적 관심사는 당시의 영국 노동자들의 노예상태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이 안타까움은, 고딕 예술에서처럼 모든 사람이 뛰어나면 뛰어난 대로 그렇지 못하면 그렇지 못한 대로 자신만의 사유를 할 수 있고 그 사유들이 합쳐져 “장중하고도 나무랄 데 없는 온전체”를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짓밟혀지고 있다는 데서 온다.
러스킨의 생각은 다중지성을 크게 고려하는 가운데 대가들(masters, great artists)이 가진 힘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대가들이 가진 힘이란 과연 무엇인가? 미학에서는 예술성과 기술적 뛰어남(‘virtuoso’)을 구분하는 것이 상식이다. 9 우리는 따분한 미학 책을 굳이 읽지 않더라도, 예컨대 케이팝스타 오디션 장면 같은 데서 기술적으로는 미숙하지만 예술적으로는 뛰어난 사례들. 반대로 기술적으로 완벽한데 아무런 예술적 감동을 주지 못하는 사례들을 만난다. 문학 영역에서도, 어떤 시인이 시를 별다른 노력 없이 쓱쓱 써내는데 그 시가 언제나 제법 괜찮지만, 그 시들을 시간을 따라 관찰하면 그 시인이 일정한 수준에서 더 올라가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돌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이와 반대로 끊임없이 이전의 수준을 넘어가는 10 시인이 있다.
러스킨이 보기에 대가를 대가로 만드는 것은 그 기술적 뛰어남에 있지 않다. 대가들이 기술적으로 뛰어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아무리 그의 실행 기술이 뛰어나더라도 “그의 정신이 항상 그의 실행하는 힘을 훨씬 앞서간다”는 말이다.
때로 그의 실행능력은 정신을 쫓으려다 무너지기도 한다. 또한 그는 항상 그의 작품의 열등한 부분에는 필요한 만큼의 열등한 관심만을 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위대함에 상응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에 대한 불만감에 익숙해져서 11 피로할 때나 자신에게 화가 날 때에는 보는 사람이 불만족하든 말든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내 생각에는 이러한 필연성을 인정하지 않고 항상 완전함에 도달하려고 한 사람이 딱 하나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이다. 그런데 그의 헛된 노력의 결과 10년이 걸려서도 그림 하나를 완성하지 못하고 남겨 두게 되었다. 따라서 위대한 예술가가 작업을 하든 아니면 군소 예술가들이 최선을 다하든, 그 작품은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불완전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일에서는 좋지 않은 것만이 나름의 좋지 않은 방식으로 완전할 수 있다. 12
아름다움의 원천은 지성의 발휘―이는 손(기술)과의 연결을 전제하는 발휘이다―로서의 새로운 형태의 발명에 있으며, 위대한 예술가의 위대함은 바로 이 발명의 힘의 크기에 있다. 그러나 이 위대함은 보통 사람들이 고딕 예술의 경우처럼 나름대로 특이하게 사유할 때의 그 힘과 동일한 종류의 것이다. 그래서 잠재적으로는 누구나가 위대한 예술가인 것이다.
[덧붙임1]
‘고졸(古拙)하다’는 말이 있다. 아마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회화(동양화)에서 사용하는 최고의 찬사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내가 아는 어떤 동양화가가 중국에서 여행 가서 벼루를 사온 일이 있다. 그 벼루를 보여주면서 이 분이 한 말이, 벼루에 그려진 낚시하는 노인의 그림의 선이 ‘고졸해서’ 사왔다는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그은 것 같은 단순하고 유치한 듯한 이 선은 결코 흉내를 낼 수가 없다고 하면서. 이 화가는, 아이들의 그림을 보면 다 천재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13 그런데 커가면서 상투형이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하고 그것이 화가로서의 자질을 망가뜨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가가 되려면 다시 이 상투형을 깨고 어린아이의 단순함을 회복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한다. ‘상투형’이란 사실 이미 존재하는 형식이 반복되어 습성화된 것에 다름 아니다.
[덧붙임2]
정신이 항상 실행하는 힘을 앞서간다는 것은, 철학적으로 돌려서 말하면, 잠재성의 영역이 현실성의 영역에 존재론적으로 우선한다는 말이다. 영국의 낭만주의 셸리의 다음과 같은, 낭만주의적으로 표현된 생각 역시 이러한 취지로 통한다.
시는 추론과는 다르다. 14 즉 의지의 결정에 따라 발휘될 수 있는 힘이 아니다. 우리는 ‘나는 시를 지을 거야’라고 말할 수가 없다. 위대한 시인조차도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창조과정에 있는 정신은, 마치 사그라지던 잉걸불이 변덕스러운 바람처럼 불어온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일깨워져 일시적으로 밝아진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 힘은, 개화를 거치면서 흐려지기도 하고 변하기도 하는 꽃의 색깔처럼 안에서 생긴다. 우리의 본성의 의식적인 부분들은 이 힘이 오는 것이나 떠나는 것을 예측하지 못한다. 이 힘이 처음 가진 순수함과 위력이 오래 간다면 그 결과가 얼마나 위대할지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를 짓기 시작할 때 영감은 이미 쇠퇴하는 중이며, 세상에 전해진 가장 영광스러운 시도 필시 시인의 원래의 구상의 미미한 그림자일 것이다. 15
[‘십오 소년 표류기’ 4에 계속]
- 이탈리아어로 ‘eccedenza’인데 영어본에서 ‘excedence’로 옮겼다. 영어에 ‘excess’는 있어도 이 명사는 없는데, 그 특이한 의미를 살리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본문으로]
- 안토니오 네그리, 『다중과 예술』, 마씨모에게 보내는 편지. [본문으로]
- 감각의 차원에서는 총체를 직관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초감각의 차원으로 이동하게 된다. [본문으로]
- 칸트, 『판단력 비판』, 「일반적 발언」 * 독어본에서 인용자가 직접 옮김. [본문으로]
- 『판단력 비판』, § 27. [본문으로]
- 【스피노자의 윤리학에서】 ‘conatus’는 사물이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려는 ‘노력’이다.(『윤리학』 3부 정리VI) 이는 그 사물의 본질에 다름 아니다. ‘conatus’를 정신하고만 연관시킬 때 ‘voluntas’(의지)라고 불린다.(『윤리학』 3부 정리IX 주석) ‘conatus’를 정신과 몸 양자와 공히 연관시킬 때 ‘appetitus’(욕구)라고 불린다.(『윤리학』 3부 정리IX 주석) ‘cupiditas’(욕망)는 스스로를 의식하는 ‘appetitus이다.(『윤리학』 3부 정리IX 주석) ’amor’(사랑)은 자신의 활력을 증가시키는 외적 원인에 대한 생각을 동반한 즐거움(lætitia, pleasure)이다.(『윤리학』 3부 정리IIII 주석) [본문으로]
- 『예술과 다중』, 에필로그. [본문으로]
- The Stones of Venice, p. 167. [본문으로]
- ‘virtuoso’의 의미를 영한사전에서 찾아서 거기에 의존하면 안 된다. [본문으로]
- 더 정확하게는 “넘어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이다. 노력한다고 성공이 보장되는 성격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 늘 불만이라는 말이다. 자신이 만든 도자기를 마음에 안 들면 계속해서 부수어버리는, 예술가로서의 도공을 생각해보라. [본문으로]
- The Stones of Venice, p. 170-71. [본문으로]
- 이 대화가 오고갈 당시에는, 한국 아동들의 행복도가 지금처럼 OECD 국가 가운데 꼴찌를 할 정도로 낮지는 않았다. [본문으로]
- 추론에는 초과가 부재하다. 오히려 초과가 존재하면 논리의 비약으로, 따라서 잘못된 추론을 낳는 것으로 간주된다. [본문으로]
- P. B. Shelley, 「시의 옹호」(“A Defense of Poetry”)에서. [본문으로]
'활력의 관점에서 세상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십오 소년 표류기’ 5 (0) | 2015.03.31 |
---|---|
'십오 소년 표류기' 4 (0) | 2015.02.14 |
‘십오 소년 표류기’2 (0) | 2015.01.21 |
‘십오 소년 표류기’ (0) | 2015.01.14 |
중검(重劍) 익히기 (0) | 2014.1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