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정치적 지성이 기반을 두는 시간성은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말한 시간의 셋째 종합으로 설명될 수 있다. 시간의 첫째 종합은 ‘습관’을 구성한다. 이는 시간의 용어로는 ‘살아있는 현재’를 구성하는 종합이다. (습관은 어디에 저장되어 있는 것을 끌어왔을 때 비로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바로바로 작용한다.) 시간의 둘째 종합은 기억을 구성한다. 이는 시간의 용어로는 ‘순수 과거’를 구성하는 종합이다.
삶정치적 지성과의 관계에서 가장 핵심적인, 시간의 셋째 종합은, 들뢰즈가 쓴 용어로는 ‘망각’을 구성한다. 그것은 시간의 용어로는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으로서의 ‘미래’를 구성한다. 과거와 현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기서는 과거와 현재가 미래에 종속된다. 들뢰즈에 따르면 셋째 종합에서 현재는 “스스로를 지우게 될 운명인 배우, 저자, 행위자”일 뿐이고 과거는 “기본으로 작동하는 조건”(une condition opèrant par défaut)일 뿐이다. 그리고 미래는 “조건과의 관계에서는 그 산물의 조건지어지지 않은 성격을, 그리고 저자나 배우와의 관계에서는 작품의 독립성을 동시에 긍정한다.”(··· affirme à la fois le caractère inconditionné du produit, par rapport à sa condition, l' indépendance de l'oeuvre par rapport à son auteur ou acteur) 1 이를 삶정치적 지성의 관점에서 풀어서 말하자면 과거는 새로운 삶형태의 ‘재료’이고 현재는 그것으로 새로운 삶형태를 구성하는 행동이며, 미래는 새로운 삶형태 자체이다.
여기서 몇 가지 점을 더 살펴보자. 과거는 ‘조건’이지만 종합의 산물인 미래는 조건지어져 있지 않다. 다시 말해서 과거와의 관계에서 불연속적이다. 현재를 하나의 점으로 표상할 때, 과거와 미래는 이 점에서 그 연속적 관계가 끊긴다.
이것을 들뢰즈는 (횔덜린의 표현을 빌어서) 시간이 ‘더 이상 운을 맞추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한 햄릿 왕자의 말을 그대로 빌어서, ‘시간의 이음매가 풀렸다’(time is out of joint)고 말하기도 한다. 이제 과거-현재-미래는 ‘이전-휴지-이후’라는 구도로 매우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다. ‘휴지’(休止, caesura)란 불연속이 발생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지점을 가리키며, 모든 현재는 잠재적으로 ‘휴지’이다.
저자나 배우와의 관계에서의 작품의 독립성이란 소유관계로부터의 해방이란 의미를 가진다. 영문학의 전통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시인 블레이크의 유명한 말이 있다. 그는 자신의 시들에 대해서 “나는 그것들을 내 것이 아니라고 부르고 싶다”(I’d rather call them not mine)라고 말했다. 블레이크가 작가로서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이 말을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말은 삶에 대한 거대한 책임감의 표현이다. 삶에 대한 책임감이란 소유될 수 없는 것에 대한 책임감이기 때문이다. 어떤 행동의 산물을 소유관계 속에 넣는 것은 그것을 과거의 관계 속으로 끌어당기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삶형태의 재료로 쓰이는 것을 가로막는 것, 그리하여 결국은 진정으로 새로운 것의 도래를 막는 것이다. 사적 소유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작가들, 예술가들이 스스로의 생존의 유지라는 차원에서 불가피하게 소유자로서의 자신을 앞에 내세우지만, 2 삶정치적 지성의 관점에서는 배우, 저자, 행위자란 들뢰즈의 말대로 “스스로를 지우게 될 운명”, 망각의 운명을 가진다. 3
들뢰즈의 ‘셋째 종합’을 네그리 식으로 말한다면 다음과 같이 된다.
내 생각에는, 존재의 윤리적 구축의 정신에 입각해서 사상사(思想史)에 관한 연구를 착수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연구에서는 모든 변증법을, 모든 역사주의적 흔적을, 삶의 시간에 기반을 두지 않는 모든 규정을 삭제해야 한다. 이는 근본적 선택을 의미한다. 즉, 무훈들에 관한 역사(historia rerum gestarum)가 아니라 무훈(res gestae) 그 자체만을 택한다.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미래의 기획인 이야기가 될 수 없거나 실제로 되지 않을 모든 기억은 삭제한다. 4
이러한 시간의 셋째 종합의 구도, 즉 ‘이전-휴지-이후’를 반복시키면 “아까와는 다른 시간”(김수영, 「꽃잎 이(二)」)의 연속으로서 나타난다. 니체가 말한 ‘영속적 회귀’(ewige Wiederkehr)이며, ‘차이의 반복’이다.
시간의 셋째 종합이 실천과 관련하여 말하는 바는 매우 명확하고 단순하다. 우리는 언제라도 새로운 삶을 향한 새로운 노력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실제로 이런 노력은 보기 힘들고 그래서 귀한 것일까? 이러한 노력을 막는 거대한 장애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부과하는 생존의 위협에서 느끼는 두려움, 이와 짝을 이루는 것으로서 사유재산의 증가를 위한 삶의 추구, 개인적·집단적 차원에서의 복수심과 앙심 등등. 이러한 장애물들은 여러 각도에서 포착할 수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삶의 지평을 거대한 판에 가두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1955년에 생을 마감하기 전에 물리학 권위자로서 마지막으로 했던 일 가운데 하나는 찰스 햅굿(Charles Hapgood)이라는 지질학자가 쓴 『움직이는 지각: 지구과학의 핵심 문제에 대한 열쇠』(Earth’s Shifting Crust: A Key to Some Basic Problems of Earth Science)라는 책(1955)에 짧지만 열광적인 서문을 쓴 것이었다. 이 책의 중심 논지는 대륙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주장을 단호하게 부정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지질학자들 대부분의 결사적인 반대를 받았던 이 대륙이동설은 1964년에 와서 '판 구조론'(plate tectonics)으로 정설이 되었다. 대륙이동설을 처음으로 완성시킨 알프레드 베게너(Alfred Wegener)는 기상학자였는데, 프랭크 테일러(Frank Bursely Taylor)라는 미국의 아마추어 지질학자가 1908년에 처음 주장한 이론을 받아들인 그는 1912년에 자신의 주장을 정리한 책 『대륙과 대양의 기원』(Die Entstehung der Kontinente und Ozeane)을 냈다. 베게너는 자신의 주장이 인정받는 것을 보지 못하고 1930년에 사망했다. 아인슈타인도 자신이 잘못된 이론을 후원했음을 알지 못하고 1955년에 사망했다. 5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인슈타인은 물리학 분야에서 기존의 판, 즉 고전물리학(뉴턴이 대표하는 물리학)에서 벗어나는 데 획기적인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분야에서는 더 철저하게 기존의 판에 갇혀 있었으니 말이다.
판에 가두기는 권력의 기본 속성이다. 모든 권력은 자신의 지배대상을 거대한 판 안에 가둔다. 거친 권력은 강제로 가두고(주권적 유형의 권력의 경우), 세련된 유형의 권력은 지배대상의 욕망을 자극하여 그들 스스로 갇히게 만든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후자의 경우 판이 충분히 넓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여러 기술들이 존재한다. ‘경제성장’과 같은 것은 판이 양적으로 무한하다는 환상을 유포한다. 이 연작의 앞서간 글에서 나온 그림에서처럼 판이 한 방향으로는 무한으로 터져있다는 환상. 이는 무한한 증식을 지향하는 자본의 욕망이 투사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판 안에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판을 가득 채운다. 판 안 모두의 시선이 가장 높은 쪽, 가장 많은 쪽을 향한다. 판이 지배하는 세상은 일방향 시선들의 세상이다. 6
물론 실제로는 '행복이 가득한 세상'이 아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판의 일부를 특정의 지대로 만들어 여기서 온갖 가짜 희망과 공포를 유포하는 기술이 작동한다. 이 지대와 이 기술의 이름은 바로 ‘정치’이다. 한국의 주류 언론이 좋아하는 이른바 ‘프레임 설정’도 이 기술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판의 존속에 기여할 뿐이며, 따라서 진정으로 새로운 삶과는 당연히 아무런 연관이 없다. 진정으로 새로운 삶은 오직 판 너머의 무한한 차원에 아직은 알 수 없는 상태로 놓여있다.
그러나 의외로 무겁기 짝이 없는 생각의 고개를 들어 그 시선을 이 판 너머로 보내는 것은, 아인슈타인에게 거대한 땅덩어리가 움직인다는 생각을 하기 어려웠듯이 그렇게 어렵다. ‘물고기는 자신이 헤엄치고 있는 물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시야가 판에 갇힌 판-맹인들이 양산되며, 이들은 이 판을 존재 전체와 동일시하고 그럼으로써 판과 공동운명체처럼 된다. 아니, 이들이 바로 판의 주된 구성요소이다. 이들이 없다면 삶을 가두는 판이란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적 대중’이 ‘삶정치적 다중’의 최대의 장애물이다.
그러나 대중이 생각의 고개를 들어 판 너머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스스로를 다중으로 바꾸기 시작하는 순간, 판은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들뢰즈·가따리는 사회가 바뀌는 것은 모순의 심화에 의해서가 아니라 ‘새어나감’(leak)에 의해서라고 여기저기서 말한 바 있다. 7 이는 기존 판의 구성요소들이 탈영토화되어 (이것을 『천 개의 고원』에서는 ‘탈영토화의 점들’이라고 부른다) 새로운 ‘공재의 평면’(plan de consistance)을 구성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공재의 평면’과 판은 성격이 판연하게 다르다. 판은 삶을 억제하는 구속복과 같은 것이지만, 공재의 평면은 삶 자체의 그때그때의 특이한 양태이다. (앞의 네그리 인용문에서 “무훈들에 관한 역사”가 판에 해당된다면, “무훈 자체”는 공재의 평면이다.) 판은 새로운 삶형태를 위해서 깨져야 할 것이지만, 공재의 평면은 새로운 삶의 재료가 된다. 탁월한 공재의 평면들인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그 구성요소들 및 그것들이 가진 활력은 그 이후 얼마나 많은 문학작품들의 원천이 되었던가.
따라서 ‘판으로 판을 대체한다’는 것은, 그것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든 평화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든 여전히 판에 갇혀있는 사고방식, 공재의 평면으로 나아가지 못한 사고방식, 삶정치적 지성에 도달하지 못한 사고방식이다.
현재 대한민국에 뒤집어 씌워진 판은 어떤가. 이 판은 대의제 정치, GDP 혹은 경제 성장, 이데올로기, 전쟁, 경쟁, ‘부자 되기’ 등등 여러 층위에 놓여있는 핵심적 요소들로 구성된다. 인간의 기본적 권리(생존권 포함), 환경의 보존, 행복, 평화, 진정한 민주주의, 협동, 사회적 책임 등은 판의 주변이나 외부로 밀려나 있다. 언론 또한 이 판에 대한 이야기만 국민들에게 ‘열심히’ 전달하는 중대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매우 핵심적인 요소이다. 이른바 진보 언론조차도 보수 언론과 그 입장이 다를 뿐이지 이 판에 대한 이야기를 충실하게 전달한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판의 구성요소가 되는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 정말로 지겹고 또 지겨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판은 곧 삶권력이고 삶권력이란 삶의 건강한 발현을 억압한다는 의미에서 ‘악’(惡)이므로, 우리는 일년 365일 내내 '악'의 동태에 대해서만 이러저러한 논평을 혹처럼 단 채로 듣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부처님일지라도 악에 어느정도는 물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새롭고 또 새로운 이야기이다. 진정한 의미의 혁명은, 즉 새로운 삶형태는 바로 이 새로운 이야기에 의해서만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십오 소년 표류기’ 6에 계속]
앞으로 이어질 절들
- 삶정치와 ‘이야기하기’로서의 혁명
- 비판
- 인문학?
- 해커 아카데미
- 표류
등등등
- 『차이와 반복』 불어본 125쪽. [본문으로]
- 이 점, 즉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서는 뒤에 절 하나를 따로 두어서 말할 것이다. [본문으로]
- 죽어야 할 것이 죽지 않는 것, 망각되어야 할 것이 망각되지 않는 골치 아픈 상황을 우리는 ‘오염되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실제 역사란 쓸데없이 기억된 이름들과 안타깝게 망각된 작품들로 가득 차 있는 오염지가 아닌가. [본문으로]
- 네그리, 「스피노자의 현재성의 다섯 가지 이유」, 『전복적 스피노자』. ‘이야기’에 대해서는 따로 절을 두어 말할 것이다. [본문으로]
- 빌 브라이슨(Bill Bryson)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A Short History of Nearly Everything) 12장 참조. [본문으로]
- 최근에 읽은 어떤 책의 저자에 따르면 화폐적 가치의 증식이라는 이 한 방향으로의 추구에 점점 더 많은 에너지가 집중되는 현상을 ‘폭주 효과’라고 부르며 이것을 자본주의로 하여금 사망에 이르게 할 위험한 요소 가운데 하나로 지적한다. Christopher Meyer, Standing On the Son 참조. 마이어는 맑스주의도 아니고 좌파도 아닌, 기업경영 전문가 [본문으로]
- 사실 모순의 심화란, 삶정치의 관점에서 읽자면, 새어나갈 것을 새어나가지 못하게 끌어않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며, 새어나가는 퍼텐셜의 증가를 가리키는 지표일 뿐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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