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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세 우화

 

세 우화 ― 『공통체』(Commonwealth) 3부, De Singularite 1―Of Love Possessed



 Bernard Mandeville의
벌들의 우화

 (The Fable of the Bees
)에
 대한 아담 스미스의 독해
 벌과 꽃의 우화   천 개의 고원말벌과
 난초의 사랑 (* 부록 참조)
  

자기이익이 시장교환과 자본주의 경제의 토대이다. 모두가 자기이익을 추구하며 행동한다면 공적인 선(the public good)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인도되어 시장활동으로부터 나올 것이다.

 

 

긍정적 외부들(positive external-ities)과 덕있는 교환(virtuous ex-
changes)에 입각한 상호부조(mu-tual aid).

 

 

물질적으로 생산하지 않는, 즐거움을 위한 사랑. 난초의 ‘말벌되기’ (becoming- wasp)와 말벌의 ‘난초되기’(becoming orchid)의
조우. 이것이 새로운 배치를, ‘말벌-난초 기계’를 형성함.

 자기사랑≠ 사랑   

사랑의 한 형태이지만 정태적이고 부패한 형태이다. 양자는 온전하게 되기 위해서는 서로를 보완해야 하며 공통적인 것을 동일성과 통일성에 가둔다.

 

 

짝(couple)과 가족에 갇히지 않은 사랑. 타자성의 조우에 기반을 둔 사랑. 또한 달라지는 과정에 기반을 둔 사랑.

 

자본가가 꿈꾸는 모델 : 자기이익에 열중하고 공동선은 돌보지 않는 자유로운 개인들이 노동과 재화를 시장에서 거래함.

 

 

사회주의적 유토피아

 

삶정치적 경제의 조건들을 가리킴.

 

산업적 생산의 헤게모니

 

 

산업적 생산의 헤게모니

 

  

비물질적 생산. 특이성들이 조우하는 가운데, 각 특이성들이 공통적인 것 속에서 계속적으로 변신하는 새로운 배치가 창출됨. 삶정치적 경제를 활성화하는 주체성의 생산.
 


“그렇다면 일벌들에는 더 이상 신경쓰지 말고 말벌-난초 사랑의 특이성들과 생성들(~되기들)에 초점을 맞추자!” (Commonwealth, 188쪽)



[부록]

『천 개의 고원』 1장 「서론 : 뿌리줄기」 중 말벌과 난초에 관한 부분


어떻게 탈영토화의 움직임들과 재영토화의 과정들이 상대적이고 항상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엮여있지 않을 수 있는가? 난초는 이미지를 형성함으로써, 말벌의 모습을 투영함으로써 탈영토화한다. 그러나 말벌은 그 이미지 재영토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벌은 난초의 생식기관의 일부가 됨으로써 탈영토화한다. 그러나 말벌은 난초의 꽃가루를 실어나름으로써 난초를 재영토화한다. 말벌과 난초는 이질적인 요소들로서 뿌리줄기를 형성한다. 난초가 말벌의 이미지를 기표기의적 관계의 방식(미메시스, 흉내, 유혹 등)으로 재생함으로써 말벌을 모방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지층의 수준에서만 옳다. 두 지층 사이에 유사성이 존재하여서 한 쪽의 식물조직이 다른 쪽의 동물 조직을 모방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전혀 다른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다. 모방이 아니라 코드의 포획, 코드의 잉여가치, 결합가(valence)의 증가, 참된 생성, 난초의 말벌되기와 말벌의 난초되기이다. 이 생성들 각각은 한 쪽의 탈영토화와 다른 쪽의 재영토화를 가져온다. 두 생성들의 서로 엮이고 강도들의 유통에서 중계(relay)를 형성하여 탈영토화를 더욱 진전시킨다. 모방도 없고 닮음도 없으며 오직 공통적 뿌리줄기에 의해 구성된 탈주선 위에서 일어나는 두 이질적인 계열들의 폭발만 존재한다. 이는 기표기의적 관계를 갖는 그 어떤 것으로 귀속되거나 그것에 종속되지 않는다. 레미 쇼뱅이 이것을 잘 표현하고 있다. “서로 결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두 존재들의 비평행적 진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