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만들기로서의 혁명
판을 넘어가는 일의 발생, 즉 사건을 구성하는 것은 이야기 만들기이다. 새로운 공재의 평면의 구성, 즉 진정한 의미의 변혁은 그 시초에 새로운 이야기의 형태로 존재한다.
들뢰즈(와 가따리)가 이야기 만들기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한 곳이 없지 않지만 이야기 만들기를 정치철학적 주제로 최초로 명시적으로 정식화한 것은 아마도 네그리일 것이다. 그는 감옥에 갇혀있던 1988년에 쓴 한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운동은 이야기이며 미래의 사건은 이야기에 의해 구성됩니다. 혁명적 사건의 위기는 혁명적 이야기의 몰락과 연관되어 있으며 오직 새로운 이야기만이 혁명적 사건 자체는 아닐지라도 혁명적 사건의 사유 가능성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
사건이 이야기를 향해 끌리는 것, 뜻밖인 만큼 희망의 대상인 새로운 사건으로 이야기가 종결되는 것. 미래를 향한 이러한 내뻗음은 그 형태를 미리 알지 못하고 그럴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해방의 절차 그 자체입니다. 그렇다면 이야기의 쓰임새는 무엇일까요? 바로 사건을 기다리고 구성해야 하는 사람의 상황에 우리를 다시 위치시키는 데 쓰임새가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다중이, 다중의 모든 상상력이 움직입니다. 과거를 거부하고 미래를 지향하며 새로운 사건을 향한 긴장 속에 완전히 몰입되어 있는 이야기―이보다 더한 긴장이 어디 있을까요! (인용자의 밑줄) 1
네그리는 이 이후에 이야기라는 말을 유지하면서 여기 담긴 생각을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삶정치론은 위 대목들에 담긴 통찰들의 연속이다. 따라서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이 글(「십오소년 표류기 6」)은 네그리를 대신하여 이야기 만들기를 명시적 주제로 네그리의 삶정치론을 풀어보는 글일 수도 있다. 네그리 자신이 여기에 동의하든 아니든 말이다.
이야기는 과연 삶과 무슨 관계에 있는 것일까?
앞에서 말한 삶을 가두는 ‘판’은 인간의 정신이나 욕망과 관련된 한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사실상 뻔한 이야기들로 구성된다. 자본의 이야기, 국가의 이야기, 성공 이야기, 경제성장 이야기, 부자 되는 이야기, 로또 당첨되는 이야기, 집값 올라가는 이야기 등등. 뻔한 이야기들에 갇힌 삶, 즉 ‘판’에 갇힌 삶이란 사실상 죽은 삶이다. 살아있는 삶은 늘 뜻밖의 방향으로 새롭게 펼쳐지고 표현되는 것인데, ‘판’은 바로 이러한 펼쳐짐을 막고 삶의 힘을 기존의 형태 내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돌도록 붙들어 매어놓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이야기의 쓰임새” 즉 “사건을 기다리고 구성해야 하는 사람의 상황에 우리를 다시 위치시키는” 것은 우리가 ‘판’의 환상을 깨고 다시 살아있는 삶을 향해 나아가려는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갖추는 것에 다름 아니다.
사람은 일정하게 의식이 깨이고 나서부터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가지게 되어 있다. 그리고 자연이란 곧 변화이므로 자연에 속한 몸이 항상 변하며 그에 따라 생각도 변하게 되어 있다. 그리하여 일정한 시점에서는 그때까지의 일련의, 이러저러하게 변해온 생각들이 모여서 자신에 대한,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이루게 된다. 스피노자가 말하듯이, 우리에게 일어난 변화에 대한 의식이 바로 ‘감정’(정동)이므로 삶의 이야기는 생각의 모음집인 동시에 감정의 모음집이다.
모든 개인은 몸과 정신이 남과 다르고 감정도 엄밀하게 말하자면 남과 다르므로, 당연히 각자의 이야기도 서로 다르다. 사실 나는 각 개인의 영혼이란, 여러 종교들에 의해서 형이상학적·초월적 존재로 파악된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각자가 가진 이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영혼이란 바로 자신에 대한, 자신의 삶에 대한 일정 시점에서의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이야기가 사람마다 다르니 영혼도 사람마다 다른 것이 당연하다. 2 우리가 ‘영혼이 없다’라는 말을 쓰는데, 자신의 이야기가 없는 사람이 바로 영혼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 모두 삶에 대해 한 마디씩 하고, 모두 자신의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계몽된 근대의 대중 아닌가?
천만의 말씀이다! 앞에서 말한 근대의 ‘판’이 마치 영화 <매트릭스>의 스미스 요원처럼 사람들의 영혼을 동질화하기 때문이다. 자본, 국가, 매스미디어, 대중교육 등은 이 판이 만들어낸 이야기를 대중의 정신에 도장 찍듯이 찍어 새긴다. 영혼이 없는 대중의 탄생이다. 무엇보다도 근대 최대의 스미스 요원인 매스미디어는 대중에게 자본과 국가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전달함으로써 대중을 구성하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형성할 틈을 주지 않으며, 그럼으로써 영혼이 없는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사명을 담당한다. 3 선거의 경우 후보자들의 이야기 가운데 하나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데 적극적이어야만 ‘훌륭한’ 시민이 된다. 거부하는 사람은 정치의식이 결여된 사람으로 간주된다. 4
모든 이야기들은 서로 달라도 일정하게 중첩되고 연결되고 서로 속하기 때문에 국가의 이야기도 자본의 이야기도 우리 각자의 이야기의 재료가 될 수 있다. 그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마치 스미스 요원인 듯이) 그 형태 그대로 도장 찍듯이 새겨지는 것은 새로운 이야기의 형성이 아니요, 오히려 그것을 가로막는다.
이와 달리 우리의 현실을 강력하게 구성하는 자본과 국가를 아예 이야기의 재료에서 배제하는 삶도 상상 가능하다. 로렌스의 중편 『쓴트 모』(St. Mawr)에서 웨일스인(人) 마부 루어스(Lewis)가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다. 그는 평소에는 별로 말이 없는 사람인데, 자신을 고용한 윗 부인(Mrs. Witt)과 단 둘이 말을 타고 여행을 할 때 유성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숲에 대해서, 그리고 ‘달의 사람들’(the moon people)에 대해서 동화 같은 이야기를 한다. 그걸 믿느냐는 윗 부인의 물음에 루어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니요,” 그는 그의 빈정대는 작은 대낮 목소리 5로 말했다. “이런 말을 하면 제가 조롱거리가 될 뿐이라는 것을 저는 알지요. 그러나 모든 종류의 것들이 우리의 머리를 통과하는데, 어떤 것들은 머무는 것 같고 어떤 것들은 아니지요. 부인께서 신에 대해 물어보셔서 그런 이야기를 할 생각이 든 거예요. 저는 제가 무슨 종류의 이야기를 믿는지 모르겠어요. 다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믿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건 알죠. 생계를 버는 일에 임해서라면, 혹은 당신 같은 사람들에게서처럼 큰돈을 지출하는 일에 임해서라면 우리 중 아무도 그런 이야기들을 믿지 않지요. 그때 우리는 빵을 사는 데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잠자는 데조차도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알죠. ―그게 노동이죠. 혹은 당신 같은 사람들에게서처럼 그저 재산을 소유하고 당신이 가진 돈에 대한 가치를 획득하도록 하는 것이죠. ―그러나 사람의 정신은 항상 가득 차 있어요. 그리고 나의 숙모나 숙부 같은 사람들의 정신은 종교로 그리고 자신들 말고 모두가 갈 지옥으로 가득 차 있죠.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의 정신은 온통 돈, 돈, 돈이고, 자신들이 아직 손에 쥐지 못한 것을 쥐는 방법에 골몰하죠. 그리고 당신 같은 사람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무얼 쫓고 있나 항상 궁금해 하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즐기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대단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전적으로 추구하고, 캐링턴 부인 같은 일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 줄을 모르죠. 저로 말하자면, 저는 다른 사람들이 머릿속에 넣고 있는 것을 제 머릿속에 넣고 다니고 싶지 않아요. 저는 제 것을 가장 좋아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
다른 것은 몰라도 루어스는 뚜렷한 영혼을 가진 자생적 자율주의자이다. “저로 말하자면, 저는 다른 사람들이 머릿속에 넣고 있는 것을 제 머릿속에 넣고 다니고 싶지 않아요. 저는 제 것을 가장 좋아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이런 삶은 비록 사회에서 다소 떨어져 있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어엿한 삶이다. 적어도 ‘판’에 사로잡혀 판박이가 된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야기라는 단어는 너무나도 평범하고 진부하고 사소한데, 이것을 진지하게 다루는 것 자체가 우스운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판’의 이야기만 경험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판’의 이야기야말로 판박이 이야기요, “지루한 것이 된 뻔한 이야기, 우리 모두가 외우고 있는 무미건조한 이야기”(디킨즈, 『리틀 도릿』)이다. 부의 축적과 경쟁의 열기가 이 지루함을 가리는 것이다.
만일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면, 서로 만나서 아무리 이야기해도 지루해지지 않을 것이다. 이는 단지 재미나 흥미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특이성은 타자성(alterity)을 자양분으로 삼는다. 자신과 다른 것이 자신의 내부에도 있어야 하고 외부에도 있어야 하며, 그 결과로 끊임없는 생성과 변화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것이 모여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공유하다 보면, 이야기들이 모여서 더 큰 이야기(‘우리의 이야기’ 혹은 ‘공통적인 이야기’)를 구성하고, 영혼들이 모여서 더 큰 영혼을 구성하고 몸들이 모여서 더 큰 몸을 구성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더 큰 몸을 구성하는 과정이 바로 삶정치이며, 삶정치는 권력의 정치가 아니라 활력의 정치이다.
[덧붙임]
스피노자가 『정치론』등에서, 개인들이 모여서 이룬 ‘더 큰 몸’ 즉 사회체는 그것을 구성하는 개인들(작은 몸들)과 마찬가지로 그 권리(jus)가 활력(potentia)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말했을 때, 스피노자는 자신의 정치론이 바로 삶정치론임을 보여주고 있다. 스피노자의 이 말은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어떤 국가의 사람들이 대통령을 선출하여 그에게 국민의 안전을 지키라고―스피노자가 말하는 정부의 목적은 국민의 ‘평화와 안전’(『정치론』)이다―‘가장 큰 힘’(스피노자의 ‘summa potestas’ 즉 주권적 권력 6)을 이전해 주었다면, 이 주권적 권력의 진정한 크기는 법에 따라 부여된 권한(예컨대 인사권 같은 것으로서 이는 법이 바뀌지 않는 한 언제나 똑같다)의 크기가 아니라 주권 이전(移轉)의 규칙(헌법)을 준수하여 발휘할 수 있는 실제 활력 즉 국민들의 생명을 실제로 보호하고 구하는 힘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이다. 만일 세월호의 경우처럼 국민들의 생명을 실제로 구하는 힘 즉 활력이 제로라면, 이는 주권적 권력의 힘의 크기가 실제로는 제로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는 애초에 이전된 국민들의 주권을 대통령이 말살했음을 의미한다. 7
[/덧붙임]
이야기와 과학
이야기라는 말로 포괄될 수 있는 모든 것들―문학예술 작품들을 포함한 모든 창조된 삶의 잠재태들―은 한때는 힘(정치권력)이 없다는 이유로 격하되었고,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로도 격하되었으며 이제 신자유주의가 만연된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돈 버는 데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격하되고 있다. 8 이야기는 자본과 그것이 가진 사이비 객관주의에 의해 익사되고 있는 것이다. 9
그러나 대한민국이 진흙탕 속을 구르든 말든 세상에는 변하고 진전하는 흐름이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자연과학의 발전은 자연과학 자체를 이야기에 더 접근시켜 놓았다. 뇌 연구로 2000년에 노벨상을 받은 에릭 캔델(Eric Kandel)은 단기기억의 이해에서 장기기억의 이해로 넘어가는 과정을 ‘낮과학’과 ‘밤과학’의 구분을 통해 설명한다.
프랑수아 자콥은 박테리아 유전자에 대한 자신의 연구에 대해 성찰하면서 과학적 탐구의 두 범주를 낮과학(day science)과 밤과학(night science)으로 구분했다. 낮과학은 합리적·논리적·실용적이며 정밀하게 고안된 실험들에 의해 추진된다. “낮과학은 톱니바퀴들처럼 맞물리는 추론을 사용하며 확실성의 힘으로 결과를 성취한다”고 자콥은 썼다. 반대로 밤과학은 “일종의 가능한 것들의 워크숍인데, 여기서 과학을 구성하는 재료들이 될 것이 다듬어진다. 여기서는 가설들이 모호한 예감의 형태, 흐릿한 감각의 형태를 띤다.” (에릭 캔델, 『기억을 찾아서』In Search of Memory)
그러면 낮과학은 현실의 진실한 재현인가? 이미 1950년대에 ‘슈뢰딩거방정식’으로 유명한 물리학자 슈뢰딩거(Erwin Schrödinger)는 ‘객관화’라는 원칙을 비판하면서 과학의 서술모델도 재현이 목적이 아님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 모델들이 예측을 확인해주는지를― 따라서 예측이 합리적인지 아닌지, 그리고 우리가 사용하는 모델 혹은 상이 적절한지를― 보기 위해서 이 모델들을 설계한다. 진실하다(true)고 말하지 않고 적절하다(adequate)고 말하는 것을 선호함을 주목하라. 어떤 서술이 진실하려면 실제 사실과 직접 비교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 모델들의 경우에는 보통 이런 비교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Science and Humanism,” p. 126)
나는 앞에서 더 일반적인 맥락에서 말한 것을 고수하겠다. 확실히 그것은 적절한 상이다. 그런데 그 진실성에 대해서 물어야 할 적절한 질문은 그것이 진실한가 아닌가가 아니라 그것을 놓고 애초에 진실과 거짓을 가를 수가 있는가이다. 필시 그렇지 않다. 필시 우리는 모든 관찰된 사실들을 포괄적인 방식으로 종합할 수 있고 우리가 찾는 새로운 사실들에 대한 합리적 예측을 부여할 수 있는 그저 적절한 상 이상의 것을 구할 수가 없다. (“Science and Humanism,” p. 128)
이와 비슷한 것은 과학연구만이 아니라 가장 기초적인 감각에도 적용된다. “감각 체계는 가설들의 발생기이다.”(에릭 캔델, 『기억을 찾아서』) 그리고 가설들이란 사실 이야기의 구성요소들에 다름 아니다.
감각들은 감각신경말단들의 코드화 기능에 의해, 그리고 중추신경계의 신경 통합 메커니즘에 의해 정해진다. 몸 중심부로 향하는 신경섬유들은 고충실도로 기록하는 계기들이 아니다. 특정 자극들은 강조하고 다른 자극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중추 신경세포는 신경섬유들과의 관계에서 이야기꾼 역할을 하며 결코 완벽하게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과 측정의 왜곡을 허용한다······ 감각은 실재 세계의 복제가 아니라 추상이다. (에릭 캔델, 『기억을 찾아서』)
사실 추상 즉 뽑아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적 변형을 가한다. 10
뇌가 가령 시각적 장면의 제한된 분석으로부터 의미를 도출할 수 있는 이유는 시각체계가 카메라처럼 장면을 단지 수동적으로 기록하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다. 오히려 지각은 창조적이다. 시각체계는 망막에 맺히는 2차원적 패턴들을 감각세계에 대한 논리적으로 정합적이고 안정된 3차원적 해석으로 바꾼다. 뇌의 신경 경로들 안에는 추측하기의 복잡한 규칙들이 내장되어 있다. 이 규칙들이 뇌로 하여금 몸 안으로 들어오는 상대적으로 빈곤한 신경 신호들의 패턴들로부터 정보를 추출할 수 있게 한다. 이렇듯 뇌는 모호함을 해소하는 탁월한 기계인 것이다. (에릭 캔델, 『기억을 찾아서』, 인용자의 강조)
이렇듯 감각의 차원에서도 수용 이전의 과정에서 이미 창조가 발생하는데,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위의 인용문이 흥미롭게 시사하는 것은 ‘논리’조차도 사실은 현실의 객관적 반영의 산물이 아니라 창조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논리’가 마치 주체들과 무관한 객관적인 어떤 것으로서 주체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환상이다. 이는 화폐의 가치가 객관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환상인 것과 같다. 또한 의회 정치만이 정치인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환상인 것과도 같다. 이렇듯 과학은 창조를 발견하고 환상은 객체를 발명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우리는 세상 모든 담론은 그 가장 밑바탕에서는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다. 뇌과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뇌에서 주체적 해석(이야기꾼으로서의 능력발휘)의 비중이 큰 기능일수록 ‘상급’(higher-order)의 기능이라고 말하는데 이에 비추어보면, 어떤 담론이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의 객관적 재현(반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 담론이 상대적으로 하등하다는 주장밖에는 되지 않는다. 즉 현실의 재현이란 아무리 충실한 것일지라도 이야기 가운데 상대적으로 하등한 것이라는 말이다. 뇌는 전과는 다르게 행동함으로써 바뀐 현실에 적응하는 데 복무하면서 진화해왔다. 이 말은 우리의 의식은 그 핵심이 새로운 행동 즉 미래로 향하는 능력이며, 따라서 늘 바뀌는 현실을 마치 아까의 현실이 아직도 존재하는 양 ‘재현’하기에 급급하기보다는 새로움에 대한 욕망과 상상을 이야기로 투사하는 능력이다. (사실 논의가 ‘상상’에 이르면 나로서는 금세 스피노자의 정치론이 다시 떠오르지만 이는 앞서 말했듯이 차후의 과제로 넘기기로 한다.)
이야기와 철학
다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 여기서 말하는 ‘이야기’론은 두 가지 강조점을 가진다. 하나는 재현이 아니라 추상, 변형, 창조의 측면에 대한 강조이며, 다른 하나는 모든 주체는 이야기꾼이라는 점, 즉 창조의 담당자라는 점에 대한 강조이다. 벤야민은 당시에 사라져 가는 것으로 아쉬워하는 ‘이야기꾼’(storyteller)의 이야기하기의 특징을 바로 이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야기하기는 정보나 보고(報告)처럼 사물의 순수한 본질을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이야기하기는 사물을 이야기꾼의 삶 속에 빠뜨렸다가 다시 그로부터 꺼낸다. 그리하여 도공의 손모양이 도자기에 붙어있듯이 이야기꾼의 흔적이 이야기에 붙어있는 것이다.
논의가 감각에서 문학으로 넘어왔는데, 이 뿐만이 아니다. 철학에서도 이야기하기는 직접적으로 거론되는 일은 별로 없을지 몰라도 핵심적인 테마이다. 캔델이 『기억을 찾아서」에서 뇌의 주체적 능력(뇌에 이미 내장된 능력)을 말할 때마다 주로 칸트의 초월론을 원용하지만, 사실 이야기 만들기와 관련하여 훨씬 깊이 혹은 멀리 나아간 사람으로는 들뢰즈를 꼽아야 할 것이다. 들뢰즈의 철학에서 ‘순수 사건’(l'événement pur)은 핵심적 위치를 점하는 개념들 가운데 하나인데 이 “순수 사건은 이야기요 짧은 소설이지 현실태가 아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사건들은 기호들이다.”(『의미의 논리』) ‘순수 사건’은 잠재성의 영역에 속한다. 들뢰즈는『차이와 반복』에서 이데(idée, 순수 사건)는 ‘극화’(dramatization)의 방식으로 현실화(혹은 분화differenciation)된다고 한다.
이데들의 현실화를 결정하는 것은 역동적 과정들이다. 그런데 이 과정들의 현실화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 과정들은 바로 드라마들이다. 이 과정들은 이데를 극화한다. (『차이와 반복』)
이데의 현실화란 들뢰즈가 한 말을 빌자면, 생성의 차원이 역사의 차원으로 현실화되는 대목이다.
나는 생성과 역사의 구분 가능성을 점점 더 깨닫게 되었던 거지요. “비역사적인 운무(雲霧)” 없이는 중요한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얘기한 것은 바로 니체입니다. 영원한 것과 역사적인 것, 명상과 행동을 대립시키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니체는 일이 일어나는 방식에 대하여, 사건들 혹은 생성 자체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가 사건으로부터 포착하는 것은 그것의 특정 상황에서 현실화되는 방식입니다. 사건의 생성은 역사의 범위를 벗어납니다. 역사는 실험적이지 않습니다. 단지 역사 너머의 무언가를 가지고 실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다소 부정적인 선결 조건들의 집합일 뿐입니다. 역사가 없다면 실험은 애초의 조건들을 결여한, 비(非)결정된 것으로 남겠지만, 그렇다고 실험이 역사적인 것은 아닙니다. (Gilles Deleuze, Negotiations)
생성은 역사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어떤 것입니다. 구조적 역사라 할지라도 일반적으로 과거․현재․미래의 관점에서 사고합니다. 혁명이 잘못되고 있다고, 혹은 그 여파로 괴물을 낳았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이는 낡은 생각입니다. 스딸린을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나폴레옹과 크롬웰도 마찬가지입니다. 혁명이 안 좋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민중의 혁명적 생성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유목민들에게 그토록 관심을 가져왔다면 이는 그들이 역사의 일부가 아니라 생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역사에서 배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변모하여 어떤 사회적 장의 탈주선들에서 전과는 다른 뜻밖의 형태로 다시 나타납니다. (Gilles Deleuze, Negotiations)
이렇듯 ‘새 역사의 창조’는 역사(현실성)의 영역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생성의 영역에서 실험의 형태로 시작되고 역사의 영역에서 현실화된다. 그리고 이 실험이 현실화되는 방식이 바로 ‘극화’ 혹은 ‘이야기하기’인 것이다. 문학과 예술이 진정한 의미의 혁명과 깊은 내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이는 그것이 정치적 소재를 다룬다거나 정치적 입장을 제시한다거나 역사상의 사건을 다루어서가 아니라 작품들의 존재 자체가 가능한 생성의 구현이기 때문이다.
[덧붙임]
(들뢰즈는 이러한 문학과 예술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야기 만들기 없이 문학은 없다. 그런데 베르그송이 볼 수 있었듯이, 이야기 만들기―이야기를 만드는 기능―의 핵심은 자아를 상상하거나 투사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이야기 만들기는 이러한 비전들을 획득하며, 11자신을 이러한 생성들과 활력들로 끌어올린다. (「문학과 삶」)
이는 (제목이 알려주듯이) 문학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들뢰즈가 이야기 만들기에서 보는 핵심적인 것은 바로 창조적 삶의 과정이자 추동력에 다름 아닌 “생성들과 활력들”인 것이다. 12
예술작품을 ‘기념비’로 정의하는 『철학이란 무엇인가?』(가따리와 공저)에서도 저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기념비의 행동은 기억이 아니라 이야기 만들기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어린이 되기’인 어린이다움의 블록들로 쓴다.
캔델은 이 구절을 읽으면 아마 기억 자체가 이야기 만들기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로서의 기억은―마치 리눅스의 ‘버전’처럼?―늘 변형된다고 말했을 것이다.)
[/덧붙임]
이야기 만들기와 비판
이렇듯 이야기 만들기는 새로운 삶형태의 구성이 거쳐 가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이제 이야기 만들기와 비판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살펴볼 차례이다.
상당한 토론 문화가 있는 곳이라면 비판이 비난과 구분된다는 것은 사실 건전한 상식이어야 하는데, 과연 그런 적이 있었는지 기억이 아련할 정도로 지금은 보기 힘든 상식이다. 13 그래도 어떻든 말을 줄이기 위해 여기서는 이 상식을 전제하기로 하자. 비판도 여러 유형이 가능하다는 것이 우리의 초점이다. 예컨대 들뢰즈는 어떤 자리에서 두 가지 방식의 비판을 구분한다.
철학은 ‘비판’과 불가분합니다. 다만, 비판을 하는 데 두 가지 방식이 존재합니다. 한편으로, ‘잘못된 적용’(false applications)을 비판하는 것이 있습니다. 잘못된 도덕, 잘못된 지식, 잘못된 종교 등등. 이것이 예를 들어 칸트의 유명한 ‘비판’에 들어있는 구상이죠. [비판의 결과로] 이상적 지식, 진정한 도덕 그리고 신앙이 하나도 손상을 입지 않은 채로 나오게 됩니다. 다른 한편, 이와는 다른 철학자군(群)이 있는데 이들은 진정한(true) 도덕, 진정한 신앙 그리고 이상적인 지식에 포괄적인 비판을 가합니다. 그리하여 사유의 새로운 이미지의 기능에 해당하는 무언가 다른 것을 찾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것’을 비판하는 데 만족하는 한, 우리는 그 누구도 귀찮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의 비판은 진실한 형식들에 대한 비판이지 잘못된 형식들에 대한 비판이 아닙니다. 자본주의나 제국주의를 그 ‘실수들’을 비난함으로써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철학자들에는 루크레티우스, 스피노자, 니체가 포함됩니다. 이들은 철학에서 파격적인 계보를 이룹니다. 폭발적이며, 전적으로 화산처럼 격렬한 점선(點線)의 계보를. 14
다른 곳에서 들뢰즈는 이를 칸트적 비판과 니체적 비판으로 명확하게 나눈다. (『니체와 철학』3부 참조.) 진정하지 않은 지식, 진정하지 않은 도덕, 진정하지 않은 종교를 비판하여 진정한 지식, 진정한 도덕, 진정한 종교를 정당화하는 것이 칸트적 비판인 반면에 니체적 비판은 진정한 도덕, 진정한 지식, 진정한 종교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다. 도덕적 사실이나 현상은 없으며 현상에 대한 도덕적 해석만 존재한다는 것. 지식에 대한 환상은 없으며 지식 자체가 환상이라는 것. 요컨대, 칸트적 비판이 진정한 가치의 보존이 목적이라면, 니체적 비판은 새로운 가치의 창조가 목적이다.
푸꼬 역시 비판의 두 유형을 구분한 적이 있다. 『자기에 의한 통치와 타자에 의한 통치』(The Government of the Self and Others : Lectures at the College De France 1982-1983)에서 그는 칸트가 창립한 근대 철학을 양분한 두 거대한 전통을 말한다. 그 하나는 ‘진실한 지식의 가능성의 조건을 묻는 비판철학의 전통’이다. 근대 철학 전체가 19세기 이래 진실의 분석학으로서 자신을 제시하고 발전해왔다고 말할 수 있다고 푸꼬는 말한다. 다른 하나는 계몽의 문제나, 혁명에 대한 칸트의 텍스트에서 탄생한 전통이다. 이 전통은 진실한 지식의 가능성의 조건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이 전통은 ‘무엇이 현재적 실재인가?’, ‘무엇이 우리의 경험의 현재적 장인가?’, ‘무엇이 가능한 경험의 현재적 장인가?’를 묻는다. 여기서는 진실의 분석학이 관건이 아니라, “현재의 존재론, 현재적 실재의 존재론, 근대의 존재론, 우리 자신의 존재론(une ontologie de nous-même)”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 관여된다.
진실 일반의 분석 철학으로서 나타나는 비판 철학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현재적 실재의 존재론, 우리 자신의 존재론을 형성하는 비판적 사유를 택할 것인가가 우리의 철학적 선택이라고 푸꼬는 말한다. 푸꼬의 선택은 후자의 형태의 철학이다.
이렇듯 푸꼬는 칸트를 두 유형의 비판의 한쪽 유형으로 몰았던 들뢰즈와 달리 칸트에게서 두 유형의 전통(혹은 비판)이 다 기원하는 것으로 본다. 어떻든 양자에 공통점이 있다. 진실한 지식의 조건의 가능성을 묻는 것은 들뢰즈가 말한 잘못된 적용에 대한 비판과 통하며, 계몽(‘자율적으로 되기’) 혹은 혁명으로 특징지어지는 ‘현재의 존재론’은 들뢰즈가 말한 후자의 비판과 통한다. 푸꼬의 경우는 ‘주체’의 문제, ‘진리’의 문제와 복잡하면서도 긴밀하게 연관이 되므로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자리를 마련하여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는 다시 들뢰즈로 돌아가서 두 가지 유형의 비판의 차이를 분명하게 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 시리즈를 관통하는 주제인 ‘삶정치적 지성’―기존의 삶형태를 새로운 삶형태의 재료로 만드는 지성―의 관점에서 볼 때 비판이란 새로운 삶형태의 구축에 다름 아니다. 만일 비판과 구성(이야기 만들기)의 (말로 보아서는 명백한 듯한) 차이를 굳이 가리자면, 비판은 기존의 삶형태(여기에는 지식도 당연히 포함된다)에서 새로운 삶형태의 잠재적 재료를 읽어내는 것이고, 구성은 그 재료를 실제로 변형하여 새로운 삶형태를 만드는 과정일 것이다.
맑스의 정치경제비판을 예로 들어보자. 한편으로 이 비판은 곧 자본의 힘에 대한 연구, 그 힘의 한계에 대한 연구이다. 맑스는 자본과 관련된 모든 결점, 흠집, 결함 등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그 힘을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힘의 한계를 그 힘 자체의 추동논리에서 찾으려고 했다. 맑스가 자신의 연구에서 도달한 결론은 이렇다. 한편으로 자본은 무수한 장벽들을 넘어서며 증식에 증식을 거듭하지만 그 추동논리상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인 지점에 도달한다. 다른 한편으로 자본은 그 발전과정에서 (자본가들의 의도와 무관하게/의도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지평을 넘어서는 새로운 삶의 토대―그가 “사회적 개인”으로 부른 새로운 인간형, “일반 지성”과 연관된 새로운 기술-장치, 전지구적 연결성을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기반 시설―를 마련한다. 이는 자본의 한계와 연관되지만, 한계 자체가 아니라 새로운 삶형태의 재료이다. 이렇게 볼 때 맑스의 자본 비판 혹은 정치경제학 비판은 들뢰즈가 말한 후자 유형의 비판의, 따라서 삶정치적 지성의 발현의 탁월한 사례인 것이다.
주목할 것은 전자 유형의 비판도 무조건 거부될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삶형태 즉 후자 유형의 비판의 훌륭한 재료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들뢰즈의 다음 말을 들어보자.
예를 들어 칸트는 잘못된 적용 유형의 비판을 완전하게 구현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나를 매료시키는 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천재적 작업에 직면했을 때 단지 ‘반대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선 감탄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제기한 문제를, 그의 독특한 기계를 재발견해야 합니다. 이러한 감탄을 통해서 진정한 비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매니아/비판광들은 비판대상에 감탄할 줄을 모릅니다. '반대'하거나 아니면 수다를 떨고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모든 것을 자기들의 수준에 갖다 놓습니다. 이것은 비판의 방식이 아닙니다. 노력을 해서 천재적인 저자가 제기한 문제들까지 되파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가 말하는 것 속에 있는 그가 말하지 않는 것에까지 되파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여전히 그에게 속해있는 그 무엇을 추출해야 합니다. 비록 그것을 그와 대립시키더라도 말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비난하고자 하는 천재들에게 영감을 받아야 하며, 그들의 방문을 받아야 합니다. 15
여기서 들뢰즈의 태도는 새로운 형태의 재료를 추출하려는 노력의 발현이다. (이로써 들뢰즈가 실상은 앞에서 말한 것보다 푸꼬와 더 가깝다는 점이 시사된다.) “그가 말하는 것 속에 있는 그가 말하지 않는 것”, “그와 대립”될 수도 있지만 “여전히 그에게 속해있는 그 무엇”이 바로 그 재료들이다. 만일 이러한 재료를 잠재적으로 가지지 않은 대상이라면, 도대체 왜 우리가 활력을 지출해가면서 그것을 연구해야 하는가? 적어도 우리의 활력의 지출에 값하는 비판대상이라면 우리의 새로운 삶형태 창출 작업에 필요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게 마련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비판하기 전에 이러한 잠재성을 감지하는 건강한 감각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들뢰즈는 비판에서 중요한 것은 정당화가 아니라 다르게 느끼는 것, 즉 다른 감수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니체와 철학 3부 10절)
부록
다음은 Collective Intelligence: Creating a Prosperous World at Peace 에 붙인 서언인 벤클러(Yochai Benkler)의 “The Wealth of Networks: Remixed Highlights”의 일부이다.
이야기하기 사회가 레즈(Reds), 블루즈(Blues), 그린즈(Greens) 이렇게 셋이 있다고 상상해보자. 각 사회는 어떻게 살고 어떻게 이야기를 하는가에 대해 일단의 관습을 따른다. 레즈와 블루즈의 경우에는 모든 사람들이 하루 종일 바쁘며 모두 저녁에만 이야기를 한다. 저녁에 이 두 사회에서는 모두 큰 텐트 안에 모이며 이미 지명된 이야기꾼이 청중 앞에 앉아서 이야기를 한다. 다른 곳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이 사회들에서는 시간의 압박 때문에 누군가가 한낮에 그늘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해도 아무도 멈추어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레즈 사회에서는 이야기꾼의 자리가 세습되며 세습 받은 사람만이 어떤 이야기를 할지를 결정한다. 블루즈 사회에서는 매일 밤 단순한 다수결에 의해서 이야기꾼이 선출된다.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은 그날 밤의 이야기꾼으로 지원할 자격이 있으며 모든 구성원이 투표할 자격이 있다.
그린즈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하루 종일 어디서나 이야기를 한다. 모두가 이야기를 한다. 사람들은 원하면 멈추어 귀를 기울인다. 때로는 두세 사람들이 모여서, 또 때로는 많은 수가 모여서.
이 각 사회에서 이야기들은 세계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이야기들이 바로 사람들이 그들이 아는 바의 세계를 서술하는 방식이다. 이 이야기들은 세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 수 있는지를 상상하는 시험장 역할을 하며 좋고 바람직한 것과 나쁘고 바람직하지 않은 것을 가름하는 방식으로서 기능한다.
이제 각각 레즈, 블루즈, 그린즈에 속하는 론(Ron), 밥(Bob), 거트루드(Gertrude)를 살펴보자.
자신에게 가능한 선택들에 대한 론의 인식과 이 선택들에 대한 그의 평가는 대체로 세습 이야기꾼에 의해 통제된다. 그는 이야기꾼과 접촉하여 다른 이야기를 하도록 설득하는 시도를 할 수 있지만 어떤 이야기를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세습 이야기꾼이다. 이 이야기들이 론이 아는 선택들의 우주를 서술하는 만큼, 그 만큼 세습 이야기꾼이 론이 가진 선택들을 정하는 셈이다.
밥의 자율성은 이야기꾼에 의해서가 아니라 블루즈 내의 투표자들 다수에 의해 제한된다. 이 투표자들이 이야기꾼을 선출하며 선택하는 방식이 밥이 이야기들에 접근하는 데 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만일 다수가 즐겁고 기분 좋게 해주고 인기 있거나 (부나 정치권력 같은 다른 차원에서) 강력한 소수의 사람들만을 선출한다면, 선택범위에 대한 밥의 인식은 론의 것보다 그저 아주 조금 더 넓을 뿐일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밥의 인식을 통제하는 힘이 있는 장소가 론의 경우와 다르다. 세습 이야기꾼이 아니라 다수가 그 힘의 장소이다.
거트루드는 매우 다른 위치에 있다. 첫째, 그녀는 자신이 원할 때마다 이야기를 하기로 결정할 수 있다. 듣고 싶어 하는 다른 그린즈 구성원이 한 사람은 있어야 한다는 조건만 채우면 된다. 거트루드는 그린즈의 다른 개별 구성원의 자율성에 의해 제한되는 경우 말고는 자유롭게 능동적인 생산자가 될 수 있다. 둘째, 그녀는 다른 그린즈 구성원이 말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들 가운데에서 선택할 수 있다. 그녀나 그녀를 둘러싼 모두가 그늘에 앉아 이야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개인이든 다수든 그 누구도 그녀가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그녀 대신 결정할 수 없다. 그 누구도,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다른 그린즈 구성원으로부터 그녀가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의 범위와 다양성을 그녀 대신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제기될 수 있는 물음이 있다. 즉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려고 해도 네트워크화된 정보경제가 제공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어떤 정보가 신빙성이 있어서 자신의 이야기의 적절한 재료가 될지를 어떻게 판단하는가? 또한 모두가 자기 이야기를 가진다면, 이 이야기들은 어떻게 서로 만나서 거대한 ‘공통의 이야기’를 구성하는가? 사실 후자는 스피노자가 이미 제시한 ‘공통 관념의 구성’과 원리적으로 다를 바가 하나도 없으므로 그것으로 갈음해도 될 것이다. 전자에 대해서만 벤클러의 대답을 들어보자. (사실 벤클러는 전자의 질문만 던졌다.)
··· 걸러냄과 신뢰도 평가 자체가 다른 것들처럼 정보재이며, 이 또한 커먼즈 기반의 비(非)시장 모델에서 생산될 수 있다는, 따라서 ··· 사유재산의 재도입이 부과하는 자율성의 결핍 없이 생산될 수 있다는 생각이 있다. (···)
(···)
네트워크화된 정보경제는 개인들로 하여금 스스로 일을 더 잘하게 하며, 매스미디어 문화에서 그랬던 것보다 다른 사람들에 의한 조작에 덜 당하게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이러한 새로운 일단의 기술적·경제적·사회적·제도적 관계들의 출현은 각 개인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만드는 데서 할 수 있는 상대적 역할을 증가시킬 수 있다.
그 행동이 정치적 조직화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든 ··· 아니면 교육 및 전문지식 획득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든 ··· 네트워크화된 정보환경은 생산적 삶을 위한 새로운 영역,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영역을 열어젖힌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에게 생산적인 인간으로서 우리의 삶을 상상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공해준다.
벤클러의 말은 광화문의 촛불에서 우리가 생생하게 경험적으로 확인하는 바이다. 2008년부터 촛불들은 하나의 이야기에 휩쓸려 하나가 되기(동질화)보다는 각자 자기의 이야기를 가지고 하나가 되는(합류, 혹은 공통적으로 되기) 모습을 보여 왔다. 이러한 자율성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성장했고 이와 함께 광화문에 모이는 숫자도 늘어났다. (물론 모든 일에는 물리적인 한계가 있어서 무한정 늘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의 규모로도 엄청난 것인데, 다만 하도 실제 현실에 무감각해져서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는 자들이 정치권에 즐비할 뿐이다.)
물론 우리는 아직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그리고 모두의 공통된 이야기를 완성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그렇듯이 이야기에 완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갱신될 뿐.
♣
- 안또니오 네그리 지음, 심세광 옮김, 『다중과 예술』(갈무리, 2004) [본문으로]
- 이 생각은 스피노자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비록 각 개인이 그가 부여받은 본성에 만족해하면서 살고 그것에 기뻐하지만, 각 개인이 만족해하는 삶과 그 기쁨은 그 개인의 생각 혹은 영혼[anima]에 다름 아니며, 그래서 한 사람의 본질이 다른 사람과 다르듯이 한 사람의 기쁨은 다른 사람의 기쁨과 다르다.”(윤리학』 정리 587 주석) [본문으로]
- 교육도 여기에 속하는데, 교육에 대해서는 「‘십오 소년 표류기’ 7」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 현실 사회주의를 낳은 레닌주의도 대중이 스스로 이야기를 형성할 능력을 억제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대중에게 ‘진리’의 이름으로 전위가 만든 이야기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설득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전위가 보급하는 ‘진리’가 판의 역할을 한다. 그 내용이 얼마나 ‘옳으냐’는 적절한 초점이 아니다. 언제나 옳은 것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에 고정된 옳음 즉 ‘정통’이 수립되는 순간 판이 수립되고 대중에게서 영혼이 사라진다. 그런데 현재의 시점에서 이렇게 현실 사회주의를 논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닌 듯하다. [본문으로]
- 대낮 목소리 : 루어스는 지금 서술되는 밤에 낮보다 말이 많아지고 목소리가 커졌다. [본문으로]
- 이는 ‘국민들’이 자신의 주권을 이전하여 몰아준 것이다. 국민들 각각의 의도와 관계없이 정치적 과정이 그렇게 되어있다. [본문으로]
- 스피노자의 저 말은 더 긴 설명이 필요한 말이지만 여기서는 일단 이 정도로 말해 놓기로 한다. 언젠가는 이 시리즈에서든 별도로든 스피노자의 정치론을 다룰 예정이다. [본문으로]
- 베스트셀러라는 예외는 있다. [본문으로]
- 자본의 사이비 객관주의는 공리주의(특히 벤삼식 공리주의)라는 유사철학적 사고방식으로 표현되고 경제학에서의 수리주의로 표현된다. 자본을 구성하는 가치만이 단 하나의 가치로 인정되는 동시에 단 하나의 객관적 실재로 인정된다. 자본의 가치만이 아니라 모든 가치는 그 자체가 객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객관적으로보는 것은 사이비 객관주의이다. [본문으로]
- 우리가 방의 일부를 사진으로 찍고 그 사진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면 그 사람이 그 사진을 보고 상상하는 방은 실제 방과 다를 것이다. 이렇듯 추상물은 변형이 없이도 그 자체로 그것이 원래 속했던 것과는 다른 주위 환경을 잠재태로서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발할 수 있다. [본문으로]
- 앞에 거론된 비전들은 흰고래 모비딕, 수전노가 원하는 황금 등이다. [본문으로]
- 들뢰즈가 기각하고 있는 “자아를 상상하거나 투사하는” 것이 바로 객관주의자들이 ‘이야기하기’를 비하하는 이유이다. ‘그건 너무 주관적이지 않아? 과학성이 떨어져! 논리가 없어!’ 그런데 사실상 이들은 자신들의 짧은 이해력을 과시하고 있는 셈이다. [본문으로]
- 작품이 되었든 이론이 되었든 비판대상의 최고 성취를 지적하면서 (성취가 곧 한계이므로) 자연스럽게 그 한계를 말하기보다 ‘못난 점들’을 지적하는 것이 비판이라는 생각이 한국의 비평세계에 널리 퍼져있는 듯하다. [본문으로]
- Gilles Deleuze, “On Nietzsche and the Image of Thought”, Desert Islands and Other Texts 1953 – 1974. 장-노엘 봐르네(Jean-Noel Vuarnet)와의 대담이다. [본문으로]
- Gilles Deleuze, “On Nietzsche and the Image of Thought”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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