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오 소년 표류기’ 7
[앞붙임]
글의 흐름상 ‘이야기하기로서의 혁명’을 다루는 ‘십오소년 표류기 6’이 먼저 나가야 하는데 6이 조금 덜 완성이 되어서 (사실 ‘완성’이란 것은 없지만) 7을 먼저 내보내기로 했다. 아무래도 ‘대학’ 문제에 관한 내 생각을 먼저 내보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나는 운이 좋아서 일찍이 1985년에 교수가 되었는데, 처음에는 교수 생활을 오래 하리라는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세상을 바꾸는 다른 일을 하기 전에 잠깐 있게 되겠지, 라는 생각이었다. 물론 이는 명확한 형태로 존재하는 생각이라기보다는 막연히 혹은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생각이었다. 규칙적인 출퇴근을 자랑하는 회사들에는 ‘죽어도’ 들어가기 싫었기 때문에 대학에서의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한 5년 정도 흘렀다.
그 사이에 정치적 상황이 바뀌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치 대학, 자율적인 대학을 만드는 일이 희망어린 과제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것이 나를 대학의 삶에 깊이 몸을 담그도록 만들었다. 나 개인의 공부의 면에서나 학생들과의 삶의 면에서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한 10년이 흘렀다.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예의 과제를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이 대학에 침투한 신자유주의에 의해 서서히 위험에 처해 가는 것을 보았다. 그걸 막기 위해 싸우느라고 대학의 삶에서 떨어져 나올 수 없었다. 그렇게 한 10년이 흘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기본적으로 대학이 아니라고 판단되었다. 몇 명의 아름다운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교수라는 집단도 경멸스러웠다. 학교를 운영하는 자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내가 있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없었다.
총 27년이 지나 나는 대학 바깥에 나왔다. 이것이 벌써 3년 전의 일이다. 이제 대학에서의 기억이 더 아스라해지기 전에, 대학에 대한 고민을 했었다는 사실을 잊기 전에, 대학이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내 생각을 조금이라도 기록해 놓을 때이다.
대학과 자유
1977년 3월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한 오리엔테이션 강연에서 어떤 선생님 1이 대학은 ‘자유’(Freiheit)와 ‘고독’(Einsamkeit)의 장소라고 했다. (누군가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 알고 있다.) ‘고독’은 몰라도 ‘자유’는 실로 대학의 보이지 않는 주춧돌이다. 이것은 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믿음이다. 겉으로 아무리 으리으리하고 시설이 좋아도 자유가 없는 대학은 대학이 아니며, 아무리 겉으로 허술해도 자유가 있고 자유에 기반을 두어 무언가를 배우는 곳이 대학이다.
‘자유가 밥 먹여주냐’고 현대의 신자유주의자들을 마치 취업을 못하고 있는 모든 젊은이들을 위한다는 듯이 외칠 것이고, 취업을 하기 어려운 학생들과 그 학생들의 걱정 많은 부모들이 이 외침에 호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식의 태도가 노예적 태도이다. 밥을 먹기 힘든 상태이니 자유가 아니라 밥을 달라는 사고방식이 사회에 팽배할 때 취업 문제는 더 악화된다. 노예란 자신이 식량을 생산하면서도 주인에게 밥을 얻어먹는 존재이며, 주인에게 밥을 얻어 먹는 한 영원히 노예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탈출한 노예는 자신의 힘으로 밥을 먹으면서부터 진정으로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노예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만든 사회는 노예상태를 영속화하는 사회일 수밖에 없다. 부모라면 자식이 밥 굶는 것을 못 참겠지만, 마찬가지로 노예상태를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은 부모도 거의 없으리라는 생각을 하면, 노예상태의 영속화를 방치하는 대한민국은 참으로 기이한 사회가 아닐 수 없다.
나중에 따로 절을 하나 마련하여 좀 상세하게 말할 예정이지만, 인류가 먹고사는 문제를 가장 집중해야 할 과제로 안게 된 것은 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부터이다. 그 이전까지 (아마도 자연력에 압도되어 간신히 생존을 이어갔을 초기를 제외한다면) 인류 역사상 대부분의 시기에 먹고사는 것은 기본적으로 해결된 문제였고, 2 관심은 삶을 어떻게 의미심장하게 만드는가에, 즉 문화의 측면에 집중되었다. 3 그 문화를 나중의 관점에서 ‘비과학적’이라고 부르든 아니든 말이다. 자본주의가 이를 변화시켜 먹고사는 문제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노예적 삶형태를 일반화한 것이다.
먹고사는 것, 즉 생존은 말하자면 컴퓨터에서의 ‘디폴트’와 같은 조건이 되고 이를 넘어서 삶의 의미에 대한 탐구가 개시될 때, 그때 우리는 자유를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대학은 자유를 함께 살아가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장소 가운데 하나이다. 취업을 일차적 목적으로 하는 대학은 엄밀하게 말해서 대학이 아니다. 예전에, 공부를 못해서가 아니라 집에 돈이 없어서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지 못하고 눈물을 삼키며 실업계 고등학교를 갔던 사람들의 운명을 신자유주의는 찬양하는가? 아니면 말이 인문계이지 사실 인문계 고등학교는 대학을 가기 위한 고등학교이고 대학은 시간이 좀 더 걸릴 뿐 결국은 더 좋은 직업으로 가는 통로였다고 말할 것인가? 지적으로 저열하고 공감력이란 개미 발톱만큼도 없는 현재 대한민국의 신자유주의자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모든 것은 밥벌이로!’ ‘밥통 만세!’ ‘취업 못시키는 대학에는 지원도 하지 말라.’ 이는 우리 자식들을 취업 못하는 순으로 굶겨 죽이자는 말과 진배없다.
나는 어느 해 여름방학에 서울대 관악캠퍼스에 ‘출석수업’을 받으러온 방통대 학생들이, 캠퍼스에 직접 와서 수업을 받는 것을 그 자체로 눈물이 날 정도로 좋아했던 모습들을 기억한다. 4 이 학생들에게 대학은 밥벌이 수단의 문제, 단지 ‘밥통’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의 문제, 자유로운 삶의 문제였던 것이다.
사실 인간이 하나의 종(種)으로서 지구에 등장한 때부터 인간의 문제는 자유의 문제였다. 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점이 동물과 구분되는가? 동물을 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동물은 어떤 면에서는 인간보다 뛰어나다. 개는 인간보다 후각이 더 뛰어나고 벼룩은 도약력이 더 뛰어나며 거의 모든 물고기는 인간보다 수영을 잘 한다. 겨울 산 얼어붙은 폭포에 이르는 눈덮인 길을 한 번도 미끄러짐 없이 뚜렷한 발자국을 남기며 뛰어올라간 어느 고양이과 동물의 능력은 차라리 신의 능력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다른 면도 있다. 동물은 자신의 능력만큼 살다가 간다. 깨끗하다. 이에 대해 들뢰즈는 “동물은 죽음을 자신 안에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고 말한다. 5 이 “내적 죽음”을, 즉 “폭군-노예의 보편적 사도마조히즘”을 발명한 것은 동물이 아니라 바로 인간이다. 노예상태는 내적 죽음의 한 양태로서, 인간은 마치 노예상태를 자유로 착각하고 그것을 위해 싸우기도 한다. 6 그렇다면 인간이 총과 활로 동물들을 제압한다고 해서 동물의 삶을 뛰어넘은 것은 아니다. 그건 동물 가운데 가장 강한 동물이 된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도 노예상태라는 치명적 결함을 안고 있는 ‘강함’이다. 인간은 자유의 과제를 이행할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
나에게 자유란 법에 추상적으로 정해진, 그리고 현실에서는 거의 늘 무력하며 매우 자주 무시되는 기본적 권리가 아니다. 나는 자유를 니체 식으로 이해한다. 7 인간이 자신의 본성(자연, nature)을 미리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만들어내는 힘, 이 시리즈를 관통하는 주제인 삶정치적 지성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자신의 삶형태를 자신이 만들어내는 힘이 바로 자유이다. 삶형태는 삶의 의미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삶의 의미는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여하는 것이며, 부여하기 위해서는 발명되어야 한다. 그것은 발명되는 것이기에 잠재적으로 무한히 다양하다.
노예상태란 바로 이러한 힘이 결핍되어 외부로부터 부과된 삶형태를 살아야 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동물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이 가진 특유의 강렬한 힘에도 불구하고 자유의 차원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동물들에게는 노예상태라는 말도 적용되지 않는다. 앞에서 말한 대로 동물에게는 ‘내적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동물 되기’(devenir-animal)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내적 죽음을 제거하는 상태로 이행함을 나타내기 때문일 것이다. 8
자본주의의 등장은 삶의 의미들을 자본을 구성하는 가치(즉 가격)로 대체해버렸다는 점에서는 인류에게 큰 비극적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9 이 사건이 함축하는 바는, 인간의 삶이 오로지 ‘먹고 사는’ 수단을 버는 활동―먹이를 찾는 동물의 활동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으로 환원되었다는 점이다. 맑스의 말로 하자면 노동력이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으로부터 분리된 것이다. 이 분리가 바로 자유의 상실이며, 이 상실이 당연시될 때, 즉 노동력을 팔아야 먹고살 수 있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간주될 때 자유의 차원은 은폐된다. 이런 의미에서 자본주의란 인간의 삶에서 자유의 차원을 은폐시키는 데 탁월한 체제인 것이다.
그러나 자유의 차원을 은폐하는 것이 완전히 성공하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삶이 있기에 죽음이 따르듯이 자유가 있기에 그것의 은폐가 있는 것이다. 자유가 항상 우선적이라는 말이다. 10
내가 입학했을 때, 대학은 예의 선생님의 강연이 없더라도 이미 충분히 자유의 장소였다고 할 수 있다. 교정 여기저기에 배치된 형사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끼니를 때우는 문제보다 어떻게 사는가의 문제가 우선인 문화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취업에 집중하거나 혹은 그것을 넘어서 부와 권력으로 향하는 학생들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실제 숫자와 관계없이 대학의 문화를 완전히 지배하지 못했다.
자유는 공부에서의 자유로움과 가로지르기로도 드러났다. 자신의 전공과 관계없이 사회에서의 삶의 형태를 고민하는 데 관련된 공부가 여기저기서 자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이때의 공부문화가 대한민국 대학 역사상 최고의 문화였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자유로운 문화의 쇠퇴는 뜻밖에도 내적인 데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사회적 삶에 대한 고민의 산물인 학생들의 급진주의에서 ‘지도-피지도’ 관계가 유일하게 올바른 정치적 조직화원리로 자리 잡기 시작하고 국가권력을 필요한 수단으로 보는 관점이 정착되면서 자유로운 문화는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언뜻 보면 많은 정파들의 난립이 자유로움의 표현인 듯하지만, 사실 자체 내에서 차이를 용인하지 못하는 문화적 풍토에서 차이가 새로운 정파의 수립으로 귀결되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학생 급진주의에는 표면에 부상한 혁명론이나 전략전술론과 별개로 그 저변에 자유에 대한 갈망이 깔려있었다. 이 갈망에 결정적 타격을 가한 것은 IMF 위기와 신자유주의의 침투이다. 이것들이 가져온 생존에의 위기감은 삶의 의미니 자유니 하는 ‘사치스러운’ 것은 다 치우고 오로지 밥벌이에만 눈을 고정시킨 삶을 가장 추구할 만한 ‘선진화된’ 삶의 형태로 부각시켰다. 그러니까 오늘 세끼 먹을 것이 있어도 내일 먹을 것, 또 내달 먹을 것, 내년 먹을 것, 내후년 먹을 것, 아들이 먹을 것, 손자가 먹을 것 등등을 미리 축적해 두지 않으면 도저히 불안해서 못 사는 삶이었다. 이로써 ‘자유’는 밥벌이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확실하게 규정되어 대한민국의 쓰레기통에 내던져지게 되며, 형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어도 정신이 자유로웠던 대학은 상점들이 진을 친 감옥이 된다. 자유가 쓰레기 취급을 받는 곳에서 갑질이 성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일 것이며, 또한 아무리 화려해도 감옥에서 자유인이 나오기를 기대한다면 이는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자유는 과연 밥벌이와 돈벌이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밥벌이와 자유의 공존과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능력의 양성과 자유의 관계이다.
이 문제들에 대해서 네트워크 시대의 자유인들인 해커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들어봄으로써 도움을 얻기로 하자.
사람들은 보통 해커를 컴퓨터 보안망을 뚫고 들어가 분탕질을 치는 범죄자들인 크래커들과 혼동하고 있다. 정부나 언론의 잘못된 생각이 대중들로 하여금 그렇게 혼동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해커들을 범죄자들과 혼동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언론의 서술과는 반대로, 전통적으로 이 용어는 어려운 기술적 과제들을 쾌활한 공동체 정신에 입각한 윤리로 해결하는 일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프로그래머들을 가리켜 왔다.” 11 실제 인물들을 거론하자면, GNU를 만든 리처드 스톨먼(Richard Stallman), 리눅스의 제안자인 리누스 토발즈(Linus Torvalds), 애플 컴퓨터의 공동창립자인 워즈니악(Stephen Gary "Woz" Wozniak), 오픈소스 운동가이며 해커들이 쓰는 용어를 설명한 자곤 파일("신 해커사전")을 편집한 에릭 레이먼드(Eric Raymond), Cisco Systems의 공동창립자인 쌘디 러너(Sandy Lerner) ―이들이 바로 해커들이다.
해커들은 ‘먹고사는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빌 게이츠라면 돈벌이가 전부일 것이다. 신자유주의적으로 해석하자면, 돈벌이란 밥벌이다. 그러므로 밥벌이가 전부다. 그런데 『해커 윤리』(The Hacker Ethic)를 쓴 히마넨(Pekka Himanen)에 따르면 상업화된 빌 게이츠는 “컴퓨터 해커의 제1의 적”이다.
먹고사는 기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해커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토발즈가 작성한 ‘리누스의 법칙’(Linus’s Law)을 통해 알아보기로 하자. 12 이 법칙은 ①생존(survival) ②사회적 삶(social life) ③여흥(entertainment)의 세 국면으로 이루어진다. 생존 단계는 토발즈에 따르면 ‘당연한 것’(truism)이다. 생명이 없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이 소중한 생명을 기꺼이 바치는 사례들이 있지 않은가? 가족을 위해서든 나라를 위해서든 종교를 위해서든. 개인의 생명보다 중요한 것으로 간주된 사회적 유대가 바로 두 번째 동기이다.
셋째 동기인 여흥은 좀 복잡하므로 잘 이해해야 한다. 토발즈의 말을 좀 길게 들어보자.
여흥은 이상한 선택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이 말로 단지 닌텐도 게임기로 게임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흥이란 장기(chess)이고 그림그리기이고 우주를 설명하려는데 관여된 정신적 능력의 발휘이다. 아인슈타인이 물리학에 대해서 생각할 때 그가 먹고살아야 한다는 동기에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필시 사회적인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에게 여흥이었을 것이다. 여흥이란 내재적으로 흥미롭고 도전을 유발하는 어떤 것이다. 13
사실 사회적 유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일부 동물들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따라서 이 셋째 단계부터가 비로소 인간을 인간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차원, “당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차원이다. 14
해커는 생존을 위해서 일을 하는 단계에서 사회적 삶을 위해 일을 하는 단계를 거쳐 여흥을 위해 일을 하는 단계(그러면 ‘일’이 아니라 ‘놀이’가 될 터이다)로 나아간 사람이다. “해커들에게는 생존이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그들은 트윙키나 졸트 콜라 15를 먹고도 매우 잘 생존할 수 있다. 정말이지, 컴퓨터를 책상위에 놓고 있으면 어떻게 다음 끼를 먹을지 혹은 어떤 지붕 아래에서 잘지가 최초의 관심사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생존은 항상 동기의 일부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동기들을 배제할 정도의 일상적인 관심사는 아니다.” 16
사실 신자유주의자들은 밥벌이의 불안정성을 활용하여 부를 축적하지만, 그 부는 화폐의 형태로 축적된다. 그러면 토발즈는 활동의 동기로서 화폐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는, 화폐는 매우 유용하지만 궁극적인 동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른 더 근본적인 동기들과 바꾸기 위한 ‘대리물’(proxy)일 뿐이라는 것이다. “화폐에 대해서 주목해야 할 한 가지는, 생존을 사기는 일반적으로 쉽지만 사회적 유대나 여흥을 사기는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대문자 E로 쓴 ‘여흥Entertainment’, 즉 당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종류의 여흥이 그렇다.” 17
자, 이 지점에서 ‘자유로는 밥벌이가 되지 않는다’는, ‘자유는 돈 버는 데 별 소용이 없다’는 신자유주의자들의 말을 토발즈 법칙에 비추어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신자유주의자들은 밥벌이를 삶의 거의 유일한 목적으로 본다. 토발즈는 밥벌이를 정상적인 사회라면 당연히 기본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유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물론 별로 소용이 없는 수단으로) 본다. 이에 반해 토발즈는 화폐를 사회적 유대와 여흥(자유)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역시 별로 소용이 없는 수단으로) 본다.
이렇게 ‘리누스의 법칙’에 비추어 볼 때 신자유주의적 사고는 자유와의 관계에서 수단과 목적이 전도된 사고이며, 바로 그렇기에 노예적 사고이다. 생존을 위해서 사회적 유대와 여흥을 포기한 존재가 노예가 아니라면 누가 노예인가?
취업이 힘든 상황에서 생존의 문제를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더 있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누구 한 사람이라도 조급함과 급급함이 성공의 비결이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가? 생존에 조급하면 생존능력이 더 생기는가? 힘든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비결은 힘을 더욱 키우는 것밖에는 없다. 그리고 힘은 자신이 자신의 삶의 주인일 때, 자유로울 때 제대로 키울 수 있는 것이지 노예로서는 제대로 키울 수 없다. 애초에 스스로 자유롭지 않다면 노예로서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며, 자유로울 수 없는 한 진정한 힘의 양성은 불가능하다. 지금 우리는 말이나 낙타 같은 동물의 능력의 양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성을 가진 인간의 능력을 키우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앞에서 제기한 둘째 문제 즉 능력의 양성과 자유의 관계라는 문제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정보화, 인지자본주의,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공통적인 것의 자유’(freedom of the common)가 생산력 확대의 필수적 조건이라는 테제가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말하기로 하자. 18 여기서는 (개인들의 유형으로서) 자유인이 될 것인가 노예가 될 것인가라는 선택의 틀을 계속 유지하기로 하고, 리누스의 법칙도 계속 활용해보기로 하자.
신자유주의에 따르면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이 자유로운 사람이다. 이를 리누스의 법칙에 따라 설명하자면, 사회적 유대(②)와 여흥(③)을 삶의 지평에서 배제할 정도로 생존(①)수단의 확보에 집중한 사람이 자유롭다. 그러나 이 법칙을 작성한 토발즈에 따르자면 이런 사람은 ②와 ③으로 아직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자유인이 아니다. 어떤 각도에서 보면 아직 인간도 아니다.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차원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동물이나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다. 인간의 능력은 ①에서가 아니라 ②와 ③으로 나아가면서 비약적으로 확대된다. 현재 인류의 거의 모든 생존(①)수단은 사회적 유대(②)와 여흥(③)에 기반을 두고 있다. 특히 ③의 단계가 능력의 확장이 가장 집중적이고도 강렬하게 일어나는 단계이다. 아인슈타인 같은 물리학자들의 연구가 인류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토발즈에 따르면 해커들에게는 컴퓨터 자체가 바로 여흥(③)인데, 실제로 컴퓨터는 현재 가장 보편화된 기본적 생산수단이 아닌가. 이렇듯 인간은 생존(①)의 차원을 동물과 공유하면서도 실제로 그 양태는 동물과 다르다.
따라서 생존(①)에 시야가 갇혀있는 사람은 ①에만 집중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①을 획득하는 능력의 확대에서 크나큰 장애를 안게 된다. 19 이는 뇌에 각인되어 작동하는 장애이기 때문에 극복하기가 더욱 어렵다. 또한 ①과 ②③ 사이에 놓인 간극은 가령 침팬지와 인간의 간극과 같은 것이어서, 신자유주의 문화에 의해 철저하게 침팬지로 세뇌되었을 경우 (이는 어디까지나 가정인데, 뒤에서 말하겠지만 철저한 세뇌란 사실은 불가능하다) ②③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침팬지가 인간이 되는 것만큼이나 힘들 수 있다. 실제로는 인간에게 잠재된 본래적 능력의 발휘에 불과한 것인데도 말이다. 이렇게 인간의 본래적 잠재력을 대패로 밀어서 동물의 차원에 납작하게 눌러 붙이는 것 ― 이것이 바로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자기계몽을 막는 사이비문화로서 신자유주의가 하는 일이다. 20
그러면 자유인들은 과연 어떻게 자신의 능력을 양성하는 것일까? 토발즈를 비롯한 해커들은 고유한 능력양성의 모델, 즉 학습모델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넷 아카데미’(Net Academy), 혹은 ‘넷카데미’(Netcademy)라고 부른다. 이제 이것과 현재의 대한민국의 대학들을 비교해본다면, 이 대학들의 앞으로의 운명을 좀 더 선명하게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자유인은 결코 노예처럼 지식을 획득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체육은 강요되더라도 신체에 해를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강요를 통해 획득되는 지식은 정신에 붙어있지 않습니다.” (플라톤, 『공화국』7.536e)
해커를 정의하는 데 들어가는 세 요소가 단지 직업이 해커인 사람들(프로그래머, 컴퓨터 전문가들 등)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 모두에게 해당된다. 앞에서 말했듯이, 사회적 유대(②)와 여흥(③)에서 인간의 인간됨이 비로소 표현되거니와, 실제로 현대 사회에서 삶의 질이 이야기되고 행복지수가 이야기되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이야기되면서 ②③이 점점 더 많은 사람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물론 아직은 ‘잠재적으로’ 모든 사람이다. 실제로는 생존(①)의 차원에 갇혀있는 사람들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토발즈의 설명에 따른 ‘해커’를 단지 직접적인 의미의 해커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직업에 하나의 ‘유형’으로서 적용할 수는 있다.
1984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해커 컨퍼런스에서 애플의 매킨토시 컴퓨터를 뒤에서 받쳐주는 해커인 버렐 스미스(Berrel Smith)는 이 용어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거의 모든 일에서 해커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해커 목수가 될 수 있다. 반드시 첨단기술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에 해커가 된다는 것은 솜씨와 관련이 있고 자신이 하는 일에 정성을 들이는 것과 관련이 있다.” 21
그 동안 노동과 관련하여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해온 윤리는 청교도 윤리이다. 어느 직업에나 존재할 수 있는 유형으로서의 해커들에게는 이와 대조되는 특수한 윤리가 있다. 이는 청교도 윤리를 뛰어넘을 새로운 윤리이며, 전문가들로서의 해커들에게서 탄생하여 사회 전체에 퍼지고 있는 윤리이다.
청교도 윤리가 노동 중심적이라면 해커 윤리는 창조성 중심적이다. 청교도 이전의 윤리는 여가 중심적이었다. 여가 중심적 윤리에서는 일요일이 최고의 요일이다. 이와 달리 청교도 윤리에서는 일하는 평일의 마지막 날인 금요일이 최고의 요일이다. 22 해커 윤리에서는 최고의 요일이 아예 없다. 모든 요일이 마찬가지이다. 청교도 이전의 윤리에서는 노동이 안 좋은 것이었다. 기독교 초기의 사람들은 노동을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락한 결과로 보았다. 이에 반해 청교도 윤리에서는 노동이 가치 있는 것으로 바뀌며, 삶시간을 가능하면 많이 노동시간으로 전환하는 것을 추구한다. 해커 윤리에서는 노동이 아니라 삶이 중요하다. 청교도 윤리에서는 처음에는 화폐가 노동에 종속되었으나 나중에는 노동이 화폐에 종속된다. 이에 반해 토발즈 같은 해커들에게는 삶에서 기본적인 동인이 노동이나 돈이 아니라 무언가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것을 함께 창조하는 열정과 욕망이다. 청교도 이전 사회에서는 일에 시간을 배분하는 방식이 과제 지향적(task-oriented)이었다. 이에 반해서 청교도 윤리에서는 작업이 시간 지향적(time-oriented)이다. 즉 사용되는 시간에 의해서 정의된다. 23 해커 윤리에서는 다시 작업이 과제 지향적이 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것이 자동으로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청교도 이전 | 청교도 윤리 (산업자본주의 →정보경제) | 해커 윤리 |
여가 중심적 일요일 | 노동 중심적 금요일(평일) | 창조성 중심적 금요일도 일요일도 아니다. |
노동은 안 좋은 것이다. | 노동은 좋은 것이다 →삶 시간의 노동시간화. | 삶이 중요하다 |
| 화폐가 노동에 종속 →노동이 화폐에 종속 | 노동이나 돈이 아니라 무언가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것을 함께 창조하는 열정과 욕망이다. |
| 수도원(Monastery) 윤리 1) Office Hours(하루 생활의 미리 짜여진 시간표) 2) 비밀엄수 | 학계, 과학계 윤리 플라톤의 Academy, synusia |
| 성당 | 바자(Bazaar) |
| 노동 중심적 시간 조직화 | 자기조직화 |
과제 지향(task-oriented) | 시간 지향(time-oriented) | 새로운 유형의 과제 지향 |
| 권위주의 기업 모델, 권위주의 정부 | 해커모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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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커 모델은 그 안에 독특한 학습모델을 품고 있으며, 이 학습모델은 히마넨에 따르면 플라톤의 아카데미와 과학계 모델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우선 해커 모델은 개방적 모델이다. 원하는 누구에게나 참가가 허용된다. 이에 비해 한국 대학은 완전히 폐쇄적 모델이며 폐쇄성을 돈을 버는 수단 가운데 하나로 삼는다. 이것과 반대방향으로 가는 노력이 없지 않았으며 지금도 존재하겠지만, 폐쇄성의 전체적인 증가추세에 비하면 미미하기 이를 데 없을 것이다.
해커 모델은 조직된 회의주의(organized scepticism)를 추구한다. 제시된 주장이나 이론의 결점들이 공동체 전체에 의해 감지되고 그 공동체가 제공하는 비판에 의해 점점 제거되는 방식이다. 이는 이미 과학계에서 줄곧 채택해온 방식이며, 더 과거로는 플라톤의 아카데미의 ‘씨누시아’(synousia) 24로 소급된다고 히마넨은 말한다. 한국은 대부분의 학계에서 적어도 공식적·표면적으로는 모두 이것을 채택하고 있다. 다만 교육에서 이것을 택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드물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에서 교육은 거의 모든 수준(초등, 중등, 고등교육)에서 기본적으로 해커 모델의 반대편에 있는 수도원 모델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도원에는 삶의 패턴이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시간에 반복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 일곱 개의 정해진 “Office Hours”(horas officiis)가 있고 모든 활동은 이에 따라 진행되어야 했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같은 시간에 잤으며, 같은 시간에 일하고, 공부하고, 식사했다. 이러한 패턴은 테일러주의의 형태로 나중에 대부분의 산업현장에 그대로 이전되었다. 자신의 생활을 자신이 조직하지 못하는 것, 이는 노예상태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다.
또한 수도원 모델에서는 권위주의가 철칙이어서 말하고 가르치는 것은 오로지 선생 몫이며 제자는 조용히 들어야 한다. 플라톤의 아카데미에서는 교습의 중심 과제가 “문제를 제기하고 사유의 흐름을 발전시키며 비판을 제시하는 학습자의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그 결과로 교사는 은유적으로 산파, 매파, 향연사회자(a master of ceremonies at banquets)로 지칭된다. “교사의 과제는, 학생들에게 이미 수립된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출발점부터 무언가를 창출하는 것을 돕는 것이다.” 25 이 절의 제사(題詞)에서 보여주었듯이 이러한 태도는 학생들을 자유인으로 키운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이에 반해 수도원 모델에서는 학생들이 철저하게 노예들인 것이다.
아직 ‘학생’이라서 자율성을 부여하기 힘들지 않느냐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웃기지 마라. 아무리 어려도 자유인으로 키우는 것과 노예로 키우는 것은 다르며, 그것을 모른다면 그것은 당신의 문제이지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다. 안타깝게도 피해자는 언제나 어리고 젊은 학생들이다. 노예로 키워진 학생들은 처음에는 제법 성취를 보는 것 같으나 나중에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서 자유로운 사고가 필요한 과제에 직면해서는 지적 능력을 발휘하기 어렵게 된다. 대학에서부터 진짜 공부가 시작되는 선진국과 달리 대학에만 잘 들어가면 다 해결되리는 생각이 지배적인 대한민국에서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자식을 노예로 키워서라도 대학에 잘 보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취업이 어려워지면서 이러한 생각의 토대도 흔들리고 있다. 대학에 들어간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실력을 키워야 간신히 취업의 토대가 마련되는 사회가 된 것이다. 그래도 이것은 취업의 시점에서야 피해가 발생하는 경우이다. 세월호 사건은 학생들을 노예로 보는 문화가 어린 나이의 학생들에게 당장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 중요한 사례이다. 이 비극은 대한민국에 20년 이상 뿌리를 내린 신자유주의 문화의 소산이기 때문에 문화가 완전히 바뀌지 전까지는 안타깝게도 크고 작은 형태로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다시 해커 학습모델의 특징으로 돌아가자.
앞에서 시사했듯이, 해커 모델에서는 학습자들 사이에는 물론이요 가르치는 사람(선생)과 배우는 사람(학생) 사이에 위계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위계와 차이를 혼동한다.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곳은 없다. 개방모델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참여하여 이룬 학습공동체라고 하더라도 참석한 사람들 사이에는 실력의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실력이 좋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선생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당장은 실력이 없어도 좋은 선생이 될 수 있으며, 반대로 좋은 선생은 자기보다 못한 학생들에게서도 배운다.
미국의 유수한 대학에서 강의부담 없고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교수직을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후진국인 데다가 독재자가 지배하는 조국 칠레로 돌아온 생물학자 마뚜라나(Umberto Maturana)는 “때때로 대학 내에서는 연구와 교육의 결합이 폐지되어야 하느냐 마느냐를 둘러싸고 다소 논란이 있”고 “최고의 연구자들은 적어도 교육에서 면제되어야 한다는 등의 말이 있”는 상황에서 학생들과 함께 작업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을 한다.
가르치는 일은 나에게는 언제나 매우 중요했습니다. 학생들의 지적인 소견들에 고무되는 경우, 나는 내 세미나를 사고의 가능성들을 시험하기 위한 실험실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결코 지루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제기되는 어떠한 질문도 흥미로울 수 있고 또 좀 더 면밀히 살펴본다면 심화된 성찰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학생들에 대해 낮게 평가하는 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이 어쨌든 똑같이 지적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26
마뚜라나의 이러한 태도가 바로 해커 모델에 상응하는 태도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이지만, 해커 모델에서는 전문가가 반드시 좋은 교사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어떤 주제에 더 이상 새롭게 다가가지 않으며 따라서 초보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해 감을 잃은 전문가보다 그 주제에 막 관여하게 된 사람이 더 잘 가르칠 수 있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는 학습자에게 필요한 단순화를 거부하기 쉬우며, 기초사항에 대한 교습을 만족스럽게 여기지도 않는다. 물론 이것은 해커 모델에 어울리지 않는 부정적 유형의 전문가인 경우이다. 실제로 실력있는 전문가는 자신들을 ‘산파’가 될 수 있는 학습자로서 간주한다.
해커 모델의 또 다른 특징은학습모델이 개발모델과 같다는 것이다. (연습과 실전이 같고, 공부와 일이 같다는 말이다.) 해커가 어떤 프로그램의 소스코드를 연구할 때, 그는 종종 그것을 더 발전시키며, 이 작업으로부터 다른 사람들이 배울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프로그램의 발전과 학습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 참여하는 보상은 동료들로부터의 인정(peer recognition)이다. 27 이는 학습이 철저하게 ‘좋은 성적’이라는 목적에 종속된 체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성적에 종속된 체제란 곧 취업경쟁에 종속된 체제이고, 이는 ‘장차’ 프로그램의 개발과 같은 일을 함으로써 임금을 받을 자격을 가질 사람들을 선발하는 데 종속된 체제이다. 어찌 보면 실전에 투입되기 전이라서 학습이 더 집중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체제이지만, 이것은 상당히 많은 경우 착각이다. 실전보다 좋은 훈련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영어 읽기 능력을 양성하려는 경우, ‘공부’단계에 맞추어진 것으로서 특별히 출판된 학습서들을 읽는 것보다는 영어로 된 좋은 책들을 그 내용에 대한 관심에 끌려서 읽는 경우가 두말할 것도 없이 더 효율적이다.)
이 글에 거론된 해커들은 물론 대한민국의 대학을 모른다. 그러면 자국의 대학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정확히는 모른다. 일부 해커들이 대학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지만 말이다. 『해커 윤리』를 쓴 히마넨은 현대 사회의 아카데미인 셈인 대학들이 과학계 모델보다는 수도원 모델을 이어받았다고 본다. 대학에서 ‘학장’을 의미하는 영어 ‘dean‘이 원래는 수도원의 한 직책―10명의 사제들로 이루어진 지구의 장―을 의미했다는 점은 비본질적인 것이라고 치자. 중요한 것은 교습이 이루어지는 방식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아카데미는 그 학습구조를 수도원적인 송신자-수신자 모델에 맞추는 경향이 있다. 이 아이러니는 아카데미가 ‘사이버 대학’(virtual university)을 구축하기 시작하는 순간 증폭될 뿐이다. 그 결과는 컴퓨터화된 수도원 학교이다. 28
히마넨이 보기에는 현재 서양의 대학들도 기본적으로 자유인을 키우는 곳이 못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보기에 자유인을 키우는 곳은 어디인가? 바로 해커들의 공동체 자체이다. 예를 들면 리눅스를 만들고 유지하고 업데이트하는 것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이버 공동체가 그 하나의 사례이다. 토발즈가 말했듯이 리눅스는 사회적 유대(②)와 여흥(③)의 산물이다. “리눅스 해커들이 무언가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매우 흥미로우며, 그들은 이 흥미로운 일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어 한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의 산물이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리눅스 시장은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고 리눅스를 돌리는 서버들, 데스크탑, 패키지 소프트웨어의 수입은 2008년에 357억 달러(2015년 3월 환율로 계산하면 약 38조 원)를 넘어서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분석가들과 리눅스 지지자들은 리눅스의 상대적 성공의 원인이 그 안전성, 신뢰성, 낮은 경비, 벤더락인(vendor lock-in)으로부터의 자유에 있다고 본다.” 사회적 유대(②)와 여흥(③)이 생존(①)에 크나큰 기여를 한 것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그 돈이 개발자들에게 가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항의를 할 것이다. 무슨 상관인가? 해커들은 재미있어서 했으니 그것으로 된 것이고, 그 결과가 사회의 새로운 경제활동의 토대가 되었으니 그 또한 사회적으로 좋은 일이다. 해커들이 즐거움의 대가로 굶었을 리도 없지만, 여하튼 ‘윈-윈’이 따로 없지 않은가. 너희 신자유주의자들은 공공의 재산 혹은 남의 사유재산을 자기 것으로 사유화하기만 했지 이런 식의 사회적으로 생산을 증진시키는 일을 해본 적이나 있는가?
히마넨은 리눅스를 만들어 낸 활동에 들어있는 잠재력을 확대 및 일반화하여 구상한 아카데미를 ‘넷 아카데미’(Net Academy) 혹은 ‘넷카데미’(Netcademy)라고 부른다. 넷 아카데미에서는 모든 연구자료가 무상으로 사용되고 비판될 수 있으며 누구에 의해서나 발전될 수 있다. 넷 아카데미의 구성원들은 다양한 주제들에 대한 열정에 의해서, 그리고 그들의 기여에 대한 동료들의 인정에 의해 추동된다. 대학과 같은 방식으로 학점(크레딧)을 매기지 않는다. 연구자료의 계속된 확장·발전 및 연구와 검토가 넷 아카데미에서 학점을 부여하는 유일한 방법이며, 최고의 학점은 전체 학습공동체에 가장 가치 있다고 판명되는 성취에 주어질 것이다. 자료를 비판하고 개선하는 것이 목적인 해커 스타일의 자료독해는 또한 그냥 자료를 (대부분 수동적으로) 읽는 대학의 일반화된 방식보다 학습에 더 도움이 된다.
넷 아카데미는 해커 모델에서 그렇듯이 해당 분야에서 초보 학생에서부터 최고의 연구자에 이르는 전체 과정이 연속체가 되도록 한다. 학생들은 처음부터 연구하는 학습자가 됨으로써, 연구자들과 문제를 토론함으로써 배울 것이며, 나중에는 해당 분야의 연구출판물을 직접 공부함으로써 배울 것이다.
넷 아카데미에서는 모든 학습이 모든 다른 학습자들을 영속적으로 풍요롭게 할 것이다. 학습자는 혼자 혹은 동료들과 함께 공유된 자료에 무언가를 추가할 것이다. 현재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방식과는 다르다. 후자의 경우에는, 모든 학생들이 처음부터 시작하고, 다른 모든 사람으로부터 고립되어 동일한 시험을 거치며, 다른 사람들의 통찰로부터 혜택을 얻지 못한다. 더 나쁜 것은 시험을 본 후에 시험관이 시험지에 담긴 모든 개인적인 통찰들을 휴지통에 던져버린다는 점이다. 이는 각 세대의 연구자들이 그들의 결과를 마지막에 던져버리기로 결정하여 새로운 세대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합리한 과정이다.
현재 대학의 교육은 대체로 학습자료의 단일성에 기반을 둔다. 그러나 넷 아카데미에서는 모두가 학습자료의 변형과 확대에 기여하므로 학습자료는 하나의 단일한 통일체가 될 수 없다. 이것을 해커들이 사용하는 ‘동시버전시스템’(concurrent-versioning systems)으로 해결한다. 이 시스템은 서로 경합하는 버전들이 기존의 버전과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서로 어떻게 다른지 볼 수 있게 해준다. 더 이론적 수준에서는 자기조직된 레퍼리 집단이 경합하는 버전들 사이에 결정을 내리고 필요하면 그 아이디어들을 결합할 수 있다.
현재 대학의 방식이 학습자들에게 결과만을 제공하는 데 비해서 넷 아카데미에서는 학습 모델 자체를 학습하게 하는데, 이는 문제를 집단적으로 제기하고 해결책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이 이는 열정과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기여에 대한 인정에 의해 추동되는 것이다. “아카데미의 핵심은 개인들의 성취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아카데미 모델 자체로 구성된다. 29
개방되어 있고, 차이가 존재하지만 협동의 방식으로 연결되며, 30 과정에의 참여에 기반을 두고, 개인들의 열정과 서로 간의 인정에 의해 추동되며, 실전과 연습이 통합되어 있고, 그 과정의 심화와 확대 이외에 다른 어떤 보상을 바라지 않는, 그러나 효율적이기 이를 데 없는 이 넷 아카데미 모델, 이 해커 모델은 사실 커먼즈 패러다임을 학습에 적용한 사례로 볼 수 있는데, 그런 만큼 그것은 현재 시점에서의 실현 정도와 관계없이 31 정부나 기업의 권위주의적 모델과 당당히 맞서는 대안적 모델이다.
과학자들과 해커들은 강한 구조들의 결여가 이 모델[해커들과 학계의 오픈 모델―인용자]이 그토록 강력한 이유 가운데 하나임을 경험으로부터 배웠다. 해커들과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열정을 깨닫기 시작하고 그런 다음에 그것을 공유하는 다른 개인들과 네트워크를 구성할 수 있다. 이 정신은 기업이나 정부에서 발견되는 정신과 다르다. 정부 기관들에서는 권위라는 생각이 회사들에서보다 더 강하게 일의 실행에 침투해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끊임없이 회의를 열고 셀 수 없이 많은 위원회를 구성하고 따분한 전략문서를 작성하는 등등의 전형적인 정부 방식은 해커들에게는 적어도, 아직 시작도 되지 않은 아이디어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마켓리서치를 하는 것만큼이나 커다란 고통이다. (대학이 정부 관료조직이나 수도원으로 변하는 것 또한 해커들이나 과학자들을 끊임없이 화나게 하는 일이다.) 32
해커 모델과 넷 아카데미를 이렇게 길게 소개한 것은, 그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자유로운 대학의 요소들을 거의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토발즈가 말한 사회적 유대(②)와 여흥(③)에 집중하는 가운데 생존(①)의 수단을 새로이 창출하는 데 기여함으로써, 그 자체가 인간의 자유로움의 강력하고 집중적인 표현이 된다. 또한 넷 아카데미는 미래를 향하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의해 가능해진 것이면서도 과거로 소급하여 플라톤의 아카데미와 과학계의 협동 및 참여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는 점에서도, 정부처럼 되고 싶어 하고 기업처럼 되고 싶어 하는 현재의 모조품 대학들, 아니 화려한 감옥들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자유인을 키우는 당당한 대학이다.
해봐야 소용없는 말이지만, 80년대에 활발했던 한국의 대학문화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더 발전했더라면 이 넷 아카데미에 가까워질 수 있었을지 모른다. 디지털 커먼즈라는 매우 유리한 기술적 조건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은 대학의 신자유주의화로 인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죽은 자식 뭐 붙잡고 있을 수만은 없듯이 대학들이 저절로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오기만을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다. 현재로서는 ‘백년하청’이니, 가능성이 없는 곳에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대한민국에서도 넷 아카데미와 같은 것의 구축이 현재로서는 자유인을 키우는 대학을 가지게 되는 유일한 방법이다. 넷 아카데미는 인터넷 기반이기 때문에 사실상 장소가 따로 없다. 따라서 넷 아카데미의 구축은 대학의 외부에 있든 내부에 있든 모든 자유인들의 현재의 과제로서 우리 앞에 놓여있다. 이미 대학 바깥에 실질적 중심을 두고 있는 여러 학습공동체들이 대학의 안팎을 가로지르며 뚜렷한 자율적인 의식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이 과제의 실현은 이미 미미하게나마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신자유주의에 세뇌된 정부, 언론, 기업 및 대학 운영자들의 백태 낀 눈에는 아예 안 보이거나 아니면 정원에 들일 수 없는 잡초들의 몸부림처럼 보일지라도 말이다.
[덧붙임] 인문학?
대학 이야기를 마치기 전에 인문학 이야기를 좀 해야 할 필요가 있는 듯하다. 대학 신자유주의화의 가장 큰 피해자가 인문대학이라는 것은 사실이고, 나 자신도 인문대학 소속으로서 긴 세월 동안 대학 내의 신자유주의자들과 싸웠기 때문이다.
발표한 어떤 글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지적 추구를 하거나 사회적 주장을 해본 적이 없다. 1970년대 말에 대학에 입학하여 1980년대 초에 대학원에 들어갈 때의 나는 ‘혁명적 이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인문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문(文)·사(史)·철(哲)’의 연속성, 심지어는 여기에 자연과학 및 사회과학을 더한 연속성을 믿고 있었긴 해도 그것이 ‘인문학’이라는 이름과 특별히 연결되어 있지는 않았다. ‘인문학’은 현실로부터 떨어진 상아탑에서, 정치적으로는 대체로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얌전하게 순응하는 사람들이 하는 고색창연한 학문(이것이 그렇다고 해서 내용상으로 해로울 것은 없겠지만)처럼 느껴졌다.
나중에 교수가 되어 대학 신자유주의화를 직접 겪는 과정에서 인문대에 가해지는 공격과 싸우기 시작한 다음에도 나 자신은 인문학의 이름으로 싸움을 한 적은 없다. 물론 인문대 학생들에게 자본이 생산의 확대(→자본의 증식)를 위해 인문학을 점점 더 필요로 하게 되리라고 말한 적은 있다. 지금 인문대가 입지조차 흔들리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 바깥의 사회에서는 ‘인문학’ 담론이 역설적으로 활성화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네그리와 하트가 『다중』에서는 주로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라는 말로, 『공통체』에서는 ‘삶정치적 생산’이라는 말로 지칭한 자본의 새로운 경향이 이와 관련이 있다. 33 이 경향의 핵심적 요소들 가운데 하나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자유가 자본주의 체제의 생산력을 높이는 데 필수적인 조건이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도 자유란, 공통적인 자원에 자유롭게 접근하여 새로운 삶형태를 스스로 창조하는 힘이다. 선진국들에서는 (한국은 내 기준으로는 후진국이다) 일반적으로 자유 혹은 삶형태의 발명과 가장 긴밀하게 연관된 분야로 인정받는 것이 인문학일 터이다. 34 이런 흐름이 수입되어 한국에서 ‘인문학’ 담론의 부상을 낳았을 것이다.
학부제가 그렇듯이 어떤 제도나 사고방식이 대한민국에 제대로 수입되는 경우는 드물다. ‘인문학’ 담론도 한국에는 자본의 논리나 그 논리에 따른 변화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단지 어떤 유행 같은 것으로만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CEO들이 인문학 분야 교수에게 상당한 강의료를 주고 인문학 강의를 듣는 것, 바로 이 희화(戲畫)가 대한민국에서 자본에 의해 인정받은 ‘인문학’의 모습을 나타낸다. 마치 평소에는 신경도 안 쓰더라도 전문가의 강의 몇 번이면, 그만큼의 돈을 들이면 인문학을 금세, 상당히 익힐 수 있다는 듯이.)
사실 특정의 학문분야로서의 인문학이란 그 자체로 자유와 필연적인 연관이 없고 새로운 삶형태의 창조와도 필연적인 연관이 없다. 그냥 특정 유형의 지식의 집합일 뿐이다. 자유와 관련하여 정말로 중요한 일은 ‘인문학’ 담론의 부상이라기보다는, 내가 있던 곳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대학들 거의 전체에 걸쳐서 대대적으로 일어난 자유의 질식과정,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탐욕스런 수도원’ 모델이 수립되고 공고화되어 가는 과정이다. 교육 관련 정부부처와 대학권력의 무지로 인해 이 과정이 ‘인문학’ 담론의 부상을 희화적으로라도 낳은 자본주의의 변화의 방향을 거슬러 인문대를 공격하는 것으로 ‘나타날’ 뿐 이 과정의 본질은 반(反)인문대적인 것도 아니고 반(反)인문학적인 것도 아니다. (인문대나 인문학이 아니었더라도 다른 어느 곳이 반드시 피해를 입는다.) 그 본질은 대학에서의 자유의 사멸이며, 나는 인문학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 죽어가는 것을 조금이라도 살려보려고 싸웠던 것이다. 대학에서 자유가 사멸하는 과정은 다수의 교수들이 신자유주의적 대학권력에 노예처럼 굴복하는 과정이었는데, 이로 인해 대체로 관례적 형태로 존재하던 민주적 운영방식이 성문화된 법과 문서의 형태를 빌어 파괴되고 35 이에 기반을 둔 이윤을 노린 노예교육이 완전히 대학을 뒤덮게 된다.
따라서 대학이 대학다워지는 길은 대학에서 신자유주의를 쫓아내고 자유를 복원하는 것뿐이다.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못된다. 예의 ‘탐욕스런 수도원’ 모델이 대학의 학습모델로 계속 작동하는 한 인문학도 대학에서 가르쳐지는 다른 학문 및 기술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노예의 학문이 될 운명을 벗기 힘들기 때문이다. 왜 노예의 학문이냐고? 사회적 유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개인의 생존을 위해서 공부하고, 새로운 삶형태를 상상하기보다 더 높은 임금(더 높은 생존능력)을 상상하며, 지적 활력의 상승에 힘쓰기보다 취업을 위한 ‘스펙’의 획득에 힘쓰는 노예들에게, 민주적 대학운영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자신의 생존이 온전하기만을 바라는 노예들에 의해 가르쳐지는 학문일 것이기 때문이다. 36
“민주주의[가] 오직 행함으로써만 배울 수 있”듯이, 37 사람은 자유롭게 살아감으로써만 자유인이 된다. 그리고 대학은 자유인들이 학습과 연구를 자유롭게 행할 때 비로소 대학다운 대학이다. ♣
* 이어지는 그림은 주석 36에 딸린 것이다.
- 요즘 학생들은 ‘교수님’이라는 호칭을 주로 사용하는데, 우리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으며, 내가 선생으로 대학에 와서도 학생들에게 ‘선생님’이라고 부르도록 했다. 나중에는 점점 더 많은 학생들이 ‘교수님’이라고 불러서 포기했다. 고등학교 교사 출신의 교수들 가운데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듣는 것을 싫어했던 분들이 꽤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 분들은 ‘교수님’과 ‘선생님’ 사이에 등급이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공부하는 세계에서는 선생과 학생의 구분밖에 없으며, 이 구분도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먼저 공부한 학생과 나중에 공부한 학생의 구분에 지나지 않는다. [본문으로]
- 간단히 해결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생산력이 낮았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 이 측면에 대해서는 조르주 바따이유(George Bataille)의 ‘데빵스’(dépense) 개념을 참조하기 바란다. 나중에 이 시리즈에 이 개념을 생각도 가지고 있다. [본문으로]
- 시험 잘 보는 데만 신경을 써서 ‘어떤 시험문제가 나오냐’고 미리부터 물어보는 선구적으로 신자유주의적인 학생들도 있었지만 결코 다수가 아니었다. [본문으로]
- Gilles Deluze, Spinoza : The Practical Philosophy, p. 12. 들뢰즈는 여기서 스피노자의 철학이 삶의 활력의 긍정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설명하는 중이다. [본문으로]
- 이는 들뢰즈가 자주 원용하는,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서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본문으로]
- 사실 이는 『1844년 경제철학 수고』의 맑스의 관점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 로렌스도 이와 비슷한 취지로 야생의 삶에 대해서는 ‘아직 창조되지 않은’(uncreated)나 ‘반쯤 창조된’(half-created)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또한 ‘원천’(source)라는 말도 사용한다. 이 말들이 나타내는 것은 내가 여기서 말하는 자유를 향한 출발점이라고 보면 되는데, 인간은 그 노예상태로 인해서 이 출발점보다 훨씬 뒤쳐진 곳에 위치하기 쉽다. 로렌스는 이 노예상태를 ‘죽음’이라는 말로 자주 표현한다. 생존과 공존하는 ‘죽음’이다. 러스킨(John Ruskin)은 『건축의 일곱 개의 등불』(The Seven Lamps of Architecture)에서 인간의 이중적 존재를 구성하는 ‘진성 삶(의 활력)’(a true life)과 ‘가성 삶(의 활력)’(a false life)을 구분하면서, 흥미롭게도 전자를 “하등 유기체들”의 그것과 같다고 한다. “외부 사물들을 틀짓고 제어하는 그러한 독립적인 힘”이며, “주위의 모든 것을 식량으로, 아니면 도구로 전환시키는 동화력”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가성 삶’은 “죽음이나 무감각의 상태”이며 “사물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외부 사물의 무게에 눌리고, 그것에 의해 틀지어지는 그러한 삶”이다. [본문으로]
- 물론 맑스가 ‘자본의 역사적 사명’이라고 부른 측면도 있다. 언제나 그렇지만 자본을 바라볼 때에도 일면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본문으로]
- 자유가 우선한다는 것은 푸코의 유명한 통찰이고 네그리와 하트도 이것을 『공통체』에서 이어받고 있다. ‘절대적 탈영토화가 우선적이다’라는 들뢰즈·가따리의 통찰에도 이런 사유가 담겨 있다. ‘절대적 탈영토화’야말로 자유의 가장 순수한 표현일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 David Bollier, Bollier, David Think Like a Commoner: A Short Introduction to the Life of the Commons, p. 126. [본문으로]
- ‘리누스의 법칙’은 한 컨퍼런스에서 토발즈가 무엇이 해커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지, 왜 리눅스와 같은 것이 해커들을 그토록 끌어당기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작성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H = F3(Happiness equals food, fun, and friends)라는 워즈니악의 행복 공식이 있다. [본문으로]
- Pekka Himanen, The Hacker Ethic: the Spirit of the Information Age (London: Vintage Publishers 2001), p. xv. 여흥과 짝을 이루는 태도는 ‘열정’(passion)이다. [본문으로]
- The Hacker Ethic, p. xvi. [본문으로]
- 트윙키(Twinky)는 스낵 케이크의 한 브랜드이며, 졸트 콜라(Jolt Cola)는 에너지 음료의 한 브랜드이다. [본문으로]
- The Hacker Ethic, p. xvi-xvii. [본문으로]
- The Hacker Ethic, p. xv-xvi. [본문으로]
- 이 테제는 『공통체』에서 네그리와 하트가 제시한 것이다. 뒤에서도 본격적으로 길게 다루지는 못하고 자본주의의 변모를 다루는 절을 따로 하나 마련할 생각이다. [본문으로]
- 나는 그 한 사례를, 취업에 일단 턱걸이를 하기 위해서 대학 4년의 적어도 반 이상을 토익 공부에 낭비하여 자발적으로 영어 실력을 제한하는 한국의 수많은 학생들에게서 본다. [본문으로]
- ‘자기계몽을 막는 사이비문화’는 니체에게서 가져온 어구이다. [본문으로]
- The Hacker Ethic, p.7. [본문으로]
- ‘Friday’는 로빈슨 크루소의 충성스런 흑인 하인의 이름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 해커들이 아니라 맑스가 분석해낸 바이지만, 자본을 구성하는 가치 자체가 생산·재생산에 투여되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으로 정의된다. [본문으로]
- ‘함께 함’(coming together)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이다. [본문으로]
- he Hacker Ethic, p.76. [본문으로]
- 움베르또 마뚜라나와 베른하르트 푀르크젠 지음, 서창현 옮김, 『있음에서 함으로』 갈무리 2006, 220. [본문으로]
- 동료들의 인정보다 우선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 있는 당사자의 (일에 대한) 열정이다. [본문으로]
- The Hacker Ethic, p.76. [본문으로]
- 이상 넷 아카데미에 대한 구상에 대해서는 The Hacker Ethic, p.76 ff 참조. [본문으로]
- “해커정신의 핵심은 위대한 일들이 개인들의 직접적인 협동에 의해 성취될 수 있음을 오픈모델을 통하여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유일한 한계는 우리의 상상력이다.” The Hacker Ethic, p.80. [본문으로]
- 처음부터 100% 실현되는 제도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본문으로]
- The Hacker Ethic, p.71. [본문으로]
- 기업의 이윤을 늘리는 방식에 관여하는 경영자문가인 스탠 데이비스(Stan Davis) 같은 이도 이미 2001년에 데이터, 정보, 지식 다음으로 ‘지혜’(wisdom)가 경제적 중요성을 띠게 될 것임을 예측한 바 있다. 데이비스에 따르면 데이터는 사물을 표현하는 방법이고 정보는 데이터를 의미 있는 패턴으로 정리해놓은 것이다. 지식은 정보의 응용과 생산적인 사용이며, 마지막으로 지혜는 지식을 분별 있게 사용하는 방법이다. 각각의 단계가 반드시 다음 단계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최후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순서에 따라 이 단계들을 밟아야 한다고 데이비스는 말한다. 이상 스탠 데이비스 지음, 김승욱 옮김, 『미래의 지배』(경영정신사 2002) 참조. 영어본 Lessons from the Future: Making Sense of a Blurred World은 2001년에 출간되었다. [본문으로]
- 바로 앞 주석에서 소개한 데이비스의 견해를 보라. 실제로 데이비스는 T. S. 엘리엇의 시 3행을 인용하면서(!) ‘지혜’라는 최종 단계를 부각시킨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잃어버린 삶은 어디 있는가?/ 우리가 지식 속에서 잃어버린 지혜는 어디 있는가?/ 우리가 정보 속에서 잃어버린 지식은 어디 있는가?”(“Where is the life we lost in living?/ Where is the wisdom we lost in knowledge?/ Where is the knowledge we lost in information?”) T.S. Eliot, The Rock (1934). [본문으로]
- 예를 들어 대학 행정의 결정권이 문서의 논리로 총장에게 있다는 구실로 단과대나 학과의 견해를 무시하고 총장(을 비롯한 소수의 권력자들) 마음대로 행정을 벌이려 하는 작태는 대학계에서 매우 흔한 것이 되었다. 투명한 행정의 표현인 양 수많은 문서들을 쏟아내는 수많은 위원회들은 사실은 언제라도 대학권력이 원하는 바대로 일을 해줄 수 있는 기동대이다. 가끔 일에 따라 ‘태스크포스’라는 임시 기동대를 쓰기도 한다. 관례적으로 존재하던 민주적 운영은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서 봉건적 특권과 같은 것을 유지시키는 것으로 매도되기도 한다. [본문으로]
- 이 점과 관련하여 스탠 데이비스의 생각이 흥미롭다. 데이비스는 교육과 학습을 구분한다. 교육은 데이터-정보-지식-지혜의 각 단계에서 어느 한 단계에만 통달하게 한다. 이에 반해 학습은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상승하게 해준다. 흥미롭게도 데이비스는 일반적인 학교는 학습보다 교육을 더 많이 제공한다고 보며, 그래서 학습의 제공이 앞으로 기업의 몫이라고 본다. 미국은 몰라도 한국의 탐욕스런 수도원 학교는 확실히 ‘교육’에 치중한다. 취업전문학교에서는 데이비스가 말한 ‘학습’이 이루어지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지혜’로 향하는 학습은 꿈도 꾸기 어렵다. [본문으로]
- 『공통체』, 427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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